▲ 김현희가 1995년 5월 20일 자신의 일본인화 교육을 맡았던 일본 여성 이은혜를 회상하는 3번째 고백수기 <이은혜, 그리고 다쿠치 야에코> 발간에 맞춰 책을 쓰게 된 배경과 심경을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
그 무렵 일본 기자들로부터 다구치 야에코의 아들이 김현희를 만나기를 희망하고 있고, 만나는 게 여의치 않다면 편지라도 전해주길 바라지만 김현희와의 연락이 전혀 안 되고 있어 매우 안타깝게 여긴다는 얘기를 보도를 통해 들었다.
‘언젠가는 만날 수 있겠지.’
나는 그들이 김현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몇 년 전 김현희는 일본을 방문했다. 이은혜 사건이 터진 지 10년이 넘은 뒤의 일이었다. 그녀에게 어떤 위해가 가해질지 몰랐기 때문에 철저한 경호가 이루어졌다. 김현희는 일본에서 결국 다구치 야에코의 가족들을 만났다.
이은혜에 대한 신원이 아직 밝혀지기 전에 안가에서 생활하던 어느 날 누군가가 김현희에게 유명한 그리스 여가수인 ‘나나 무스쿠리’의 노래 테이프를 주었다. 나나 무스쿠리는 한때 한국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다. 그녀의 히트곡은 <plaisir d’amour>, <Amazing Grace>, <The River In The Pines>, <Parapluies De Cherbourg>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김현희는 그녀의 테이프를 듣기 시작하더니 곧 좋아하기 시작했다. 나나 무스쿠리는 성량이 풍부하고 서정적인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이 노래가 무슨 뜻이에요?”
하루는 김현희가 ‘Donna Donna’라는 제목의 노래를 듣다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왜 그래?”
나는 의아하여 김현희에게 되물었다.
“이 노래가 일본 노래인가요?”
“아니야. 나나 무스쿠리가 불렀으니 그리스 노래겠지.”
“일본 노래가 아니었어요?”
“아니야. 왜 그러는데?”
“이은혜가 이 노래를 일본 말로 부르는 것을 들은 일이 있어요.”
나는 김현희에게 그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다.
“북한에서 이은혜와 함께 초대소 주변을 산책한 일이 있어요. 그때 이은혜가 초대소 주변 풍경이 자기가 알고 있는 노래 가사와 비슷하다면서 일본어로 된 저 노래를 가르쳐 주었어요. 가사 내용이 처량하여 속으로 ‘이은혜가 자신의 처지를 처량하게 생각하나보다’라고 생각했었어요. 나는 이 노래가 일본 노래인 줄 알았어요.”
어느 맑은 낮에 시장으로 가는 길
마차에 딸그락딸그락 송아지를 싣고가네
귀여운 송아지 팔려가네
슬픈 눈빛으로 보고있네요
도나 도나 도나 도-나 송아지를 태우고
도나 도나 도나 도-나 마차가 흔들리네
가사는 대강 이런 내용이다. 이 나나 무스쿠리에 대한 이야기는 주무수사관을 통해 상부에 보고됐다. 김현희의 일상은 언제나 상부에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얼마 후 이 노래에 얽힌 사연을 알게 된 일본의 간사이 TV에서 김현희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안기부에서는 오랫동안 심사숙고한 뒤에 인터뷰를 허락했다. 일본은 어떻게 하든지 이은혜의 신원을 밝히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은 김현희에게 일본어로 인터뷰를 할 것을 요청했다.
“왜 일본 말로 인터뷰를 하자는 것일까요?”
김현희가 의아하여 물었다.
“김현희 씨가 일본어를 배웠다고 하니까 그렇겠지.”
김현희는 일본어로 인터뷰를 하게 되자 약간 긴장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자신이 북한공작원임을 자백한 이후로는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아 말하는 것이 어색하다면서 인터뷰 날이 다가오자 며칠 동안 연습을 하기도 했다. 마침내 일본의 간사이 TV와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이은혜 씨와 친하게 지냈나요?”
카메라가 돌아가고 진행자가 김현희에게 물었다.
“네.”
“이은혜 씨가 강제로 납치되었다고 하던가요?”
“본인이 직접 이야기하지는 않았어요.”
“그럼 어떻게 알게 되었지요?”
“초대소에서 일을 하는 식모에게 들었어요.”
“어떻게 납치되었다고 하던가요?”
“자세한 것은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고향을 그리워하던가요?”
“네. 아이들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어요. 부모님도 그리워하는 것 같았고….”
“이은혜가 가르쳐 준 노래가 이 노래가 맞는지 들어보십시오.”
인터뷰가 시작되고 은혜에 대해 이것저것 묻던 간사이 TV의 진행자는 인터뷰 중간에 일본어로 부른 도나 도나 노래를 녹음해 와서 김현희에게 들려주었다. 김현희는 일본 가수가 부르는 도나 도나를 듣자마자 그때의 추억이 떠오르는지 눈물을 흘렸다. 카메라 기자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연신 셔터를 눌렀다.
“이 노래가 맞습니까?”
“맞아요.”
“일본어로 불렀나요?”
“네.”
“이은혜 씨가 김현희 씨에게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고 했는데 조금만 불러 볼래요?”
김현희는 머뭇거리다가 진행자가 시키는 대로 노래를 조금 불렀다.
“다른 것은 생각나는 게 없습니까? 무엇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사소한 것이라도 생각나는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생각나는 게 없어요.”
김현희는 고개를 흔들었다. 진행자는 계속 질문을 했으나 김현희의 대답에는 특별한 내용이 없었다. 나는 이은혜의 신원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일본 경찰이나 언론의 모습을 보자 더 이상 진전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당시 수사를 담당하고 있던 S 부국장은 일본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일본통이었다. 그러한 까닭에 이은혜의 신원을 찾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김현희는 더 이상의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하루는 S 부국장이 나를 집무실로 불렀다.
“김현희는 어떻게 지내?”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습니다.”
“김현희가 정말 이은혜에 대해 그것밖엔 모르는 것 같은가? 좀 더 기억을 되살려 보라고 해보지.”
“네.”
나는 대답을 했으나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자네 혹시 김현희가 일부러 이은혜를 보호하려고 감추는 것 같지는 않나?”
“글쎄요, 그것까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알았어. 이은혜에 대해서 숨기고 있는지 잘 물어 봐.”
나는 S 부국장의 사무실을 나왔다. 김현희에 대한 공적인 취조가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다시 취조할 수는 없었다.
‘김현희가 정말 이은혜에 대해서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다. 이은혜는 북한에 남아 있었다. 그녀의 정체가 밝혀지고 납치되었던 사실이 공개되면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실제로 북한은 이은혜의 신상이 공개된 후에 그녀가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이은혜의 죽음이 자연사인지 처형을 당한 것인지, 아니면 숙청되었으나 북한이 그렇게 발표한 것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김현희는 잊히기 시작했다. 외국 수사기관이나 언론들의 김현희와의 인터뷰 요청도 뜸해졌고 전국 각지 교회의 요청에 따라 돌아 다녔던 신앙 간증도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던 중 김현희가 이은혜의 가명이 치토세라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 결국 이은혜의 신원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왜 이런 이야기들이 이제야 나오는 거지?’
나는 김현희의 진심을 알 수가 없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종된 이은혜를 찾는 일본경찰 입장에서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도 있었다. 과연 김현희는 이은혜가 다구치 야에코이며 그녀에 대한 구체적인 인적 사항들이 속속 밝혀지자 그녀의 기억 속에서 잠자고 있던 이은혜가 되살아난 것일까?
아니면 이은혜의 신원이 밝혀지면서 그녀에 대해 알게 된 사실들을 자신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저서에 끼워 넣은 것인지도 모르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정리=이수광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