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층 결집 동시에 중도층 투표 포기 효과…뉴라이트에 둘러싸였나? 여권 내에서도 우려 높아
#윤 대통령 연이은 ‘이념’ 발언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산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해 허위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다”며 이념적 발언을 꺼냈다.
이어 윤 대통령은 8월 25일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 출범 1주년 성과 보고회를 주재하고 “통합의 기제가 되는 자유·인권·법치라는 보편적 가치가 우리 사회에 널리 확산되도록 많은 역할을 해 달라”며 “새는 날아가는 방향이 같아야 오른쪽 날개와 왼쪽 날개가 힘을 합쳐 그 방향으로 날 수 있는 것이다. 시대착오적인 투쟁·혁명 같은 사기적 ‘이념’에 굴복하거나 휩쓸리는 것은 결코 진보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8월 28일 국민의힘 연찬회에 참석해서는 “지난 대선 때 힘을 합쳐 국정운영권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됐겠나 하는, 정말 아찔한 생각이 많이 든다”며 “(문재인 정부에서) 선거 때 표를 얻기 위해 벌려놓은 것인지, 그야말로 나라가 거덜나기 일보직전(이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이념’이다. 철 지난 이념이 아니라 나라를 제대로 끌고 갈 수 있는 그런 철학이 바로 이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8월 29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간부위원과의 통일대화 격려사에서는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전체주의가 대결하는 분단 현실에서 공산전체주의 세력과 그 맹종 세력,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들은 허위조작, 선전선동으로 자유사회를 교란시키려는 심리전을 일삼고 있으며,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국내 공산전체주의 세력을 문제 삼았다. 이어 “이것이 바로 공산전체주의의 생존 방식”이라며 “인접한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발전하면 사기적 ‘이념’에 입각한 공산전체주의가 존속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홍범도 흉상 결국 철거
정부여당은 ‘이념’을 말로만 외치지 않고 행동도 보였다. 봉오동·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 장군이 ‘색깔론’에 휘말렸다. 국방부가 육군사관학교 내 설치된 홍범도·김좌진·지청천·이범석 장군과 이회영 선생의 흉상을 철거하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다.
이종섭 국방부 장관은 8월 25일 국회 국방위 전체회의에서 흉상 이전 방침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해줬다. 이전 이유로 홍범도 장군의 공산당 가입 이력을 문제 삼았다.
여야를 막론하고 비판 여론이 거세게 일었다. 이에 대해 윤 대통령은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다만 윤 대통령이 지난 8월 29일 비공개 국무회의에서 “어떻게 하자 하진 않겠다. 다만 문제를 제기하고 한번 어떤 게 옳은 일인지 생각해보는 게 좋겠다” 말했다고 조태용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이 전했다.
육사는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8월 31일 교내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이전하기로 결정했다. 홍 장군 외 5위 흉상의 경우 기존 위치가 아닌 육사 교정 내 적절한 장소에 이전하기로 했다.
더 나아가 해군의 잠수함 ‘홍범도함’의 이름이 바뀔 가능성도 대두되고 있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8월 31일 국회에 나와 홍범도함 명칭에 대해 “우리의 주적과 전투해야 하는 군함 이름이 공산당원이었던 사람으로 하는 것은 적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수정을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1800톤(t)급 잠수함 홍범도함은 박근혜 정부였던 2016년 진수돼 명명됐다. 당시 해군은 “홍 장군의 애국심을 기리고, 국가 안보의식 고취를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광주광역시가 조성 추진 중인 ‘정율성 역사공원’에도 제동을 걸었다. 정율성은 광주 출신의 항일단체 조선의열단 출신 작곡가다. 1933년 중국 난징에서 의열단에 가입, 조선혁명군사정치 간부학교를 졸업했다. 일본군을 상대로 첩보활동을 벌이다 옌안으로 이주해 1939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해방 뒤에는 북한으로 건너가 활동하다 ‘조선인민군 행진곡’을 작곡했다. 또한 중국 인민해방군가로 지정된 팔로군 행진곡을 지어 ‘중국 3대 작곡가’로 꼽히고 있다.
광주시는 2018년부터 정율성의 동구 불로동 생가를 복원하는 역사공원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인근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연계해 중국 관광객 유치를 목표로 총 사업비 48억 원이 투입됐다. 내년 초 완공 예정이었다.
하지만 박민식 보훈부 장관이 지난 8월 22일 본인의 소셜미디어(SNS)에 “자유대한민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앞장섰던 사람을 우리 국민 세금으로 기념하려 하는 광주시의 계획에 강한 우려를 표한다”며 “정율성 기념공원 조성 사업계획 전면 철회가 마땅하다”고 올려 논란의 불씨를 당겼다. 보훈부는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사업 관련 법적 조치를 검토 중이라고 전해졌다. 헌법소원 또는 공익감사 청구까지 거론됐다.
국민의힘은 정율성 역사공원을 반헌법·반국가적 사업으로 규정했다. 강민국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8월 29일 “윤석열 대통령 역시 정율성 공원 건립을 정체성 훼손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며 “행정안전부와 국가보훈부를 비롯한 관련부처는 해당 사업의 예산집행 과정 전반에 대한 점검과 함께 법령 검토 등을 통해 광주시의 무책임한 사업 추진을 막아내야 한다”고 촉구했다.
#여권에서도 비판 목소리
민주당은 윤 대통령의 이념 논쟁에 “국민을 향해 싸우겠다고 선포한 것”이라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재명 대표는 “매카시가 대한민국에 돌아온 것 같다. AI(인공지능) 시대에 철지난 색깔론 반공이데올로기가 웬말이냐”며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몰역사적이고, 반헌법적 폭거를 당장 중단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강선우 민주당 대변인은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결정으로 윤석열 정권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반국가세력이 됐다”며 “독립영웅을 이렇게 모욕하고 부관참시한 정권은 일찍이 없었다. 항일독립운동의 역사를 지우려는 윤석열 정권의 ‘역사 쿠데타’”라고 비판했다.
강기정 광주시장은 “정율성 기념사업은 중앙정부가 먼저 시작했다. 35년 전 노태우 대통령 재임 시기인 1988년 서울올림픽 평화대회추진위에서 정율성 선생 부인인 정설송 여사를 초청, 한중 우호 상징으로 삼았다. 2015년 박근혜 대통령도 중국 전승절 기념식에 참석, 정율성 음악이 연주되는 퍼레이드를 참관해 많은 관련 보도도 있었다”며 “오랜 기간 정부도, 광주시민도 역사 정립이 끝난 정율성 선생에 대한 논쟁으로 더 이상 국론을 분열시키지 말라”고 호소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까지 나서 “대한민국의 뿌리가 임시정부에 있듯 우리 국군의 뿌리도 대한독립군과 광복군에 있음을 부정하는 것인가. 국권을 잃고 만주로, 연해주로, 중앙아시아로 떠돌며 풍찬노숙했던 항일무장독립운동 영웅들의 흉상이 오늘 대한민국에서도 이리저리 떠돌아야겠는가”라며 “깊은 우려를 표한다”고 밝혔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2021년 8월 홍 장군의 유해를 카자흐스탄으로부터 봉환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했다.
여권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특히 홍범도 장군과 관련한 공산당 이력 논쟁은 대다수 국민들이 항일독립무장항쟁의 영웅으로 인식하고 있는 홍 장군을 건드리고 있는 만큼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8월 27일 자신의 SNS에 “6·25전쟁을 일으킨 북한군 출신도, 그 전쟁에 가담한 중공군 출신도 아닌데 왜 이제와 논란이 되느냐. 역사 논쟁·이념 논쟁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항일독립전쟁의 영웅까지 공산주의 망령을 뒤집어씌워 퇴출시키려는 것은 너무 오버다”라며 “그건 반역사다. 매카시즘으로 오해 받는다. 그만들 하라”고 질타했다.
유승민 전 의원 역시 같은 날 “윤석열 정권의 이념 과잉이 도를 넘고 있다. 보수든 진보든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체성에 충실한 정당이라면, 친일도 안 되고 종북도 안 된다”며 “친일매국에 대해선 지나치게 눈감고 종북좌익에 대해서는 일제시대의 이력까지 끄집어내어 매도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이념 편향이고 이념 과잉 아니겠나. 윤석열 대통령과 정부는 역사를 평가하는 기준과 원칙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밝히라”고 요구했다.
김태흠 충북지사는 홍 장군 흉상 문제와 관련해서 “홍범도 장군은 조국을 위해 타국만리를 떠돌며 십전구도했던 독립운동 영웅이다. 철 지난 이념 논쟁으로 영웅을 두 번 죽이는 실례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실제 국민 여론에도 윤 대통령의 이념 논쟁이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론조사업체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지난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사흘간 실시한 전국지표조사(NBS) 여론조사에 따르면 윤 대통령 국정운영 긍정평가가 33%, 부정평가는 59%를 기록했다. 긍정평가가 2주 전 같은 조사 대비 5%포인트(p) 떨어진 것. 이는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와 함께 윤 대통령의 연이은 ‘이념’ 발언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여론조사 자세한 사항은 여론조사기관 또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다시 돌아온 뉴라이트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 전쟁’을 꺼낸 것에 대해 정가에선 해석이 분분하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보수 지지층 결집을 노린 것이라는 분석도 그중 하나다. 윤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은 30%대에 갇혀있다. 더 큰 문제는 윤석열 정부가 지지율 반등을 이뤄낼 모멘텀 마련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윤 대통령 입장에서는 현재 정부여당을 지지하는 30%대 지지층을 내년 4월 총선까지 확실히 잡아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에 그들이 원하는 색깔론 ‘이념’ 발언을 계속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수도권 등 중도층 확장에는 ‘악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경제 상황이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이념 공세에만 집중하면 국민들에 역풍을 맞을 것이란 우려와 맞닿아 있다.
과도한 이념 논쟁과 정제되지 않은 메시지를 거듭해 투표율을 떨어뜨리려는 전략일 수도 있다는 해석이다. 앞서 민주당 관계자는 “역대 총선 승패는 투표율에서 갈렸다. 투표율이 높으면 민주당이 승리했다”며 “이념 전쟁 과정에서 여야가 거친 말을 주고 받으면 정치혐오가 커질 수 있다. 이러면 중도층이 투표장에 나오지 않을 수 있다. 윤 대통령이나 국민의힘에서는 이를 노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과거 역사 왜곡 논란을 빚은 ‘뉴라이트’ 학자들이 윤석열 대통령 주변에 포진해 있다는 점도 거론된다. 친이(친이명박)계는 윤석열 정부 들어 실세그룹으로 급부상, 내각과 정부기관 등 요직에 대거 발탁됐다. 그러면서 ‘뉴라이트’ 학자들도 윤석열 정권에서 중용됐다. ‘뉴라이트’는 2000년대 중반 태동한 보수 집단을 일컫는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을 비롯해 김광동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 한오섭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 김종석 규제개혁위원회 민간위원장, 강규형 EBS 이사 등이 뉴라이트 성향 단체 등에서 활동한 이력이 있다. 특히 강 이사의 경우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홍범도 장군을 소련 공산당 활동을 문제 삼아 ‘반민족 행위자’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과 함께 백선엽 장군을 치켜세우는 움직임은 뉴라이트 인사들이 윤 대통령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추측에 무게를 더하는 대목이다. 앞서 국방부는 육사 내 백 장군 흉상을 세우는 방안 검토 의혹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육사가 지난 7월부터 홈페이지에 백 장군 웹툰을 5년여 만에 다시 게재한 사실이 확인되며 논란은 증폭됐다. 국가보훈부 역시 국립현충원 안장 기록에서 일제강점기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백 장군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문구를 삭제했다.
야권의 한 관계자는 “뉴라이트 인사들은 지난 보수 정권에서 건국절, 백선엽 추대 운동 등 역사 논쟁을 한 차례 일으켰지만, 결국 실패했다. 철 지난 반공이데올로기를 윤석열 정권 들어 다시 시도하고 있는 것”이라며 “윤 대통령의 발언을 보면 최근 이념을 언급하는 등 극우적으로 굉장히 거칠어졌다. 뒤에서 누군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꼬집었다.
2022년 7월 22일 ‘장·차관 국정과제 워크숍’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정부의 의사결정이 ‘이념’이 아니라 실용과 과학 중심으로, 객관적 사실과 데이터에 기초해 이뤄져야 하고 늘 국민과 소통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불과 1년 만에 대조적인 언행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원로 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은 8월 30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윤 대통령이 ‘이념’을 강조하고 나선 데 대해 “뉴라이트 늦바람이 분 것 같다”고 평가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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