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열-이만수-류현진-이대호-윤석민 계보에 외국인 처음으로 이름 올릴까
야구에서 트리플 크라운은 단순한 '3관왕'과 구분된다. 투수의 3대 주요 타이틀인 다승·평균자책점·탈삼진, 타자의 3대 주요 타이틀인 타율·홈런·타점을 동시 수상해야 한다. 3개 부문에서 1위에 오르더라도 세 타이틀 중 하나가 빠지면 트리플 크라운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만큼 달성하기 어렵고, 그래서 드문 기록이다. 지난해까지 KBO리그 41년 역사에서 투수 3명과 타자 2명만이 트리플 크라운을 해냈다. 올해는 NC 다이노스 외국인 투수 에릭 페디(30)가 외국인 최초 트리플 크라운에 도전하고 있다.
#선동열과 이만수
KBO리그 역대 최초 트리플 크라운의 주인공은 1984년 삼성 라이온즈의 간판 포수로 활약했던 이만수다. 그는 팀당 100경기 체제였던 그해 77경기에서 타율 0.340, 홈런 23개, 80타점을 기록해 세 부문 모두 1위에 올랐다. 다만 이만수의 타격왕 타이틀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져 기록의 순수성에 흠집이 났다. 마지막까지 아슬아슬했던 타격왕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타율 관리'를 했다는 논란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삼성이 이만수의 타격왕 경쟁자였던 홍문종(롯데 자이언츠)을 8타석 연속 고의볼넷으로 내보내는 꼼수를 쓰면서 비난은 더 거세졌다. 결국 이만수는 첫 트리플 크라운의 위업을 이루고도 1983년에 이은 2년 연속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를 놓쳤다.
그 다음 트리플 크라운의 주인은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투수로 꼽히는 선동열이었다. 그는 투수와 타자를 통틀어 유일하게 세 번 이상 트리플 크라운을 해낸 주인공이기도 하다. 타자 중엔 이대호(2006년·2010년)가 두 번 해낸 게 최다 기록인데, 선동열은 투수트리플 크라운을 네 차례나 달성했다.
프로 두 번째이자 첫 풀타임 시즌이던 1986년이 첫 기록이었다. 그는 그해 39경기에서 262⅔이닝을 던지면서 24승 6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0.99, 탈삼진 214개라는 무시무시한 성적을 올렸다. 남들은 '소포모어 징크스'에 시달린다는 프로 2년 차에 오히려 0점대 평균자책점 신화를 작성하면서 정규시즌 MVP와 투수 골든글러브를 휩쓸었다. 그해 한국시리즈에서는 1차전과 4차전에 선발 등판하고 5차전에서 구원 투수로 4이닝 세이브를 올려 해태 타이거즈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선동열은 이어 1989년부터 1991년까지 트리플 크라운에 승률왕까지 석권하면서 3년 연속 4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1989년엔 21승 3패 8세이브, 평균자책점 1.17, 탈삼진 198개를 기록했고 1990년엔 22승 6패 4세이브, 평균자책점 1.13, 탈삼진 189개를 남기면서 다시 2년 연속 정규시즌 MVP와 투수 골든글러브를 손에 넣었다.
이듬해인 1991년에도 19승 4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1.55, 탈삼진 210개로 맹활약하면서 투수 부문 황금장갑을 꼈다. 다만 MVP 트로피는 홈런 35개를 때려내며 '고졸 연습생 신화'를 이룬 장종훈(빙그레 이글스)에게 내줬다. 선동열이 트리플 크라운을 하고도 MVP에 오르지 못한, 유일한 시즌이다.
#류현진과 이대호
2006년은 KBO리그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시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일무이하게 투수와 타자 트리플 크라운이 동시에 나왔다. 주인공은 류현진(당시 한화 이글스·현 토론토 블루제이스)과 이대호(롯데)였다.
동산고를 졸업하고 한화에 입단한 19세 류현진은 프로 데뷔전이던 그해 4월 12일 잠실 LG 트윈스전에서 7⅓이닝 10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가 두 번째 등판인 18일 삼성전에서도 6⅔이닝 7탈삼진 1실점으로 호투한 뒤 세 번째 등판인 두산 베어스전에서 9이닝 11탈삼진 1실점으로 완투승까지 올리자 야구계는 난리가 났다. 심지어 류현진은 다섯 번째 등판이던 5월 4일 LG전에서도 다시 9이닝 8탈삼진 1실점으로 두 번째 완투승을 추가했다. 유망한 신인 투수의 반짝 돌풍을 넘어 한국 프로야구에 마침내 선동열 이후 최고 투수가 등장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류현진은 그 후로도 승승장구를 이어갔다. 6월 23일 KIA전에서 첫 10승과 전 구단 상대 승리를 동시 달성했고, 7월 7일 삼성전에선 9이닝 9탈삼진 무실점으로 데뷔 첫 완봉승도 해냈다. 6월 18일 두산전에서 통산 100탈삼진, 9월 26일 SK 와이번스(현 SSG 랜더스)전에서 200탈삼진을 차례로 돌파했다. 그해 류현진의 최종 성적은 18승 6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23, 탈삼진 204개였다. 신인 투수 최초로 세 부문을 석권하면서 1991년의 선동열 이후 15년 만의 투수 트리플 크라운을 작성했다. KBO리그 신인 투수가 200이닝-200탈삼진을 동시 달성한 것도 류현진이 역대 최초였다.
당연히 그해 신인왕은 류현진의 차지였다. 현대 유니콘스 소속으로 12승을 올린 대졸 신인 장원삼도 평소라면 신인왕을 받고도 남을 성적을 냈지만, 경쟁자가 너무 강력해 명함도 내밀지 못했다. 오히려 KIA 한기주가 8표, 장원심이 1표를 얻어 류현진이 만장일치로 수상하지 못한 게 논란을 일으켰을 정도다.
류현진이 그렇게 단숨에 리그 최고의 투수로 발돋움한 사이, 롯데의 4번 타자 이대호도 타율 0.336, 홈런 26개, 88타점을 기록하면서 그해 타율·홈런·타점 부문 타이틀을 모두 손에 넣었다. 22년 만에 나온 역대 두 번째 타자 트리플 크라운이었다. 이만수와 달리, 이대호의 트리플 크라운에는 어떠한 논란도 없었다. 이대호는 홈런을 가장 많이 친 거포가 정교한 타격도 가장 잘 할 수 있음을 보여준 '타격 천재'였다.
문제는 데뷔하자마자 리그를 평정한 류현진의 임팩트가 너무 컸다는 거다. 투수 트리플 크라운과 타자 트리플 크라운의 대결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신인' 류현진을 손을 들어준 '유권자'가 많았다. 역대급 투고타저 탓에 이대호의 성적이 30홈런-100타점에 못 미쳤다는 점도 감점 요인이 됐다. 결국 총 유효표 92표 중 47표를 받은 류현진이 35표의 이대호를 제치면서 역대 최초로 MVP와 신인왕을 동시 수상하는 역사를 썼다. 이대호는 대기록을 세우고도 12표 차로 MVP 트로피를 양보해야 했다.
#이대호, 윤석민 다음은?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10년, 이대호는 두 번째 트리플 크라운으로 완벽한 설욕에 성공했다. 그냥 주요 세 부문만 석권한 게 아니라 전무후무한 타격 7관왕의 위업을 이뤘다. 그해 이대호의 성적은 타율 0.364, 홈런 44개, 타점 133개, 안타 174개, 득점 99개, 장타율 0.667, 출루율 0.444. 모두 리그 최고였다. 이전까지 한 시즌 최다 타이틀 수상은 1994년의 해태 이종범(타율·안타·득점·도루·출루율)과 1999년의 삼성 이승엽(홈런·타점·득점·장타율·출루율)이 기록한 5관왕이었다. 이대호가 이들을 넘어 새 역사를 썼다. 4번 타자의 상징인 홈런·타점·장타율은 물론이고, 거포가 차지하기 어려운 타율·최다 안타·출루율 타이틀까지 모두 손에 넣었다. 이승엽이 2004년 일본에 진출한 뒤, 이 정도로 리그를 압도한 타자는 이대호밖에 없었다.
이뿐 아니다. 2010년의 타이틀은 '품질'도 엄청났다. 타율 0.350-40홈런-100타점을 모두 넘기며 '역대급' 위력을 자랑했다. 특히 세계 최장 기록인 9경기 연속 홈런을 포함해 홈런 44개를 터트리면서 4년 전의 아쉬움을 털어냈다. 2003년의 이승엽(당시 56개) 다음으로 많았고, 2006년보다는 18개나 늘어난 수치였다.
물론 류현진도 그해 역사적인 활약을 펼쳤다. 비공인 세계 기록인 23경기 연속 퀄리티 스타트 행진을 펼쳤고, 5월 11일 LG를 상대로 삼진 17개를 잡아내 정규이닝 최다 탈삼진 기록을 작성했다. 무엇보다 평균자책점 1.82로 시즌을 마치면서 1995년의 선동열 이후 15년 만이자 21세기 유일한 1점 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타격 7관왕'의 위엄을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이대호는 정규시즌 MVP 투표에서 총 92표 중 59표를 가져가 류현진(30표)을 제치고 왕좌에 올랐다.
이듬해인 2011년엔 국가대표 오른손 에이스로 활약하던 KIA 윤석민이 류현진 이후 5년 만의 투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17승 5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45, 탈삼진 178개를 기록하는 눈부신 활약이었다. 그는 그해 완봉승만 세 차례 해내는 이닝 이터의 면모를 뽐냈고, 팔색조 같은 변화구 구사력은 류현진마저 공개적으로 부러워할 만큼 리그 최고로 꼽혔다. 정규시즌 MVP 투표에서도 이변 없이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그 후 11년간 KBO리그에선 트리플 크라운에 성공한 선수가 나오지 않았다. 각 팀 전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해온 외국인 선수의 트리플 크라운이 한 번도 없었던 점도 의외로 여겨졌다. 그 발자취에 가장 근접했던 선수는 2021년 정규시즌 MVP인 아리엘 미란다(두산)였다. 그는 평균자책점(2.33)과 탈삼진(225개) 부문에서 압도적인 1위에 올랐고, 특히 탈삼진 부문에선 레전드 투수 최동원의 역대 최다 기록을 36년 만에 갈아치우는 기염을 토했다. 다승 부문에서도 시즌 막바지까지 선두권을 유지해 외국인 선수 첫 트리플 크라운의 기대감을 높였다. 그러나 결국 14승에서 멈춰 서면서 경쟁자였던 데이비드 뷰캐넌(삼성)과 에릭 요키시(키움 히어로즈·이상 16승)에게 공동 다승왕을 내주고 뒤로 물러났다. 나머지 두 부문에서 적수가 없었던 만큼, 더 아쉬운 고배를 들었다.
#페디, 외국인 첫 위업 도전
페디는 2년 전 미란다가 실패한 트리플 크라운의 위업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9월 8일까지 17승 6패, 평균자책점 2.28, 탈삼진 160개를 기록해 다승과 평균자책점 선두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탈삼진 부문에서도 안우진(키움·164개)과의 간격을 4개 차로 좁혔다. 안우진은 팔꿈치 수술로 시즌을 조기 마감한 상황이다. 올 시즌 경기 평균 탈삼진 6.7개를 기록 중인 페디의 추월은 시간문제다.
미란다는 승운이 필요한 다승 부문에서 밀려났지만, 페디는 다승 부문에서 시즌 초반부터 일찌감치 앞서나갔다. 탈삼진 부문 3위 라울 알칸타라(두산)와 격차도 한참 벌어져 있다. 남은 등판에서 평균자책점만 더 낮추면 세 부문 동반 1위가 유력하다. 그가 트리플 크라운을 해낸다면, 올해 정규시즌 MVP 자리도 사실상 예약할 수 있다.
페디는 개막 전 기대감부터 남달랐던 투수다. 2014년 메이저리그(MLB) 신인 드래프트에서 워싱턴 내셔널스의 1라운드 지명을 받은 특급 유망주 출신이다. 2019년 선발과 불펜을 오가면서 워싱턴의 월드시리즈 우승에 힘을 보탰다. 2021년과 지난해에도 2년 연속 27경기에 선발로 출전했다. 화려한 이력을 보유한 선수가 KBO리그를 만만하게 보다 조기 퇴장한 경우도 많았지만, 페디는 그 반대다. 첫 시즌인 올해 다른 투수들을 압도하는 성적을 내면서 승승장구했다. 8월 중순까지 10개 구단 투수 중 유일하게 1점대 평균자책점을 유지하면서 2010년의 류현진 이후 13년 만의 새 이정표에 다가가기도 했다.
다만 도중에 두 차례 고비를 맞았다. 지난 6월 팔꿈치 통증이 찾아와 2주 넘게 이탈했다. 페디는 충분한 휴식 후 마운드로 돌아와 다시 무실점 호투로 팀의 연패를 끊었다. 그 다음 위기는 지난 달이었다. 8월 월간 평균자책점이 4.50에 달했다. 첫 경기였던 2일 롯데전에서 4이닝 5실점, 마지막 경기였던 31일 KIA전에서 3이닝 7실점으로 부진한 탓이다. 그 사이 평균자책점도 2.39까지 치솟았다. 꾸준히 지켜 온 1점대 평균자책점 지지선이 무너졌다.
그러나 페디는 오래 흔들리지 않았다. 이달 첫 경기였던 9월 5일 키움전에서 7이닝 11탈삼진 무실점으로 역투해 팀의 2-1 승리를 이끌었다. 5강 안에서 치열한 순위 싸움을 하는 NC를 다시 안심시키고, 외국인 최초의 트리플 크라운을 가시권에 뒀다. 강인권 NC 감독은 "페디는 늘 공격적인 투구로 상대 타자를 당황하게 한다"며 "내가 본 외국인 선수 중 톱클래스다. 특히 마운드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페디가 최고인 것 같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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