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씨 일가와 지분경쟁 최윤범 회장보다 우호 업체들 지분 더 많아…사업영역 겹쳐 난감, 충돌 땐 이탈 가능성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
영풍그룹의 모태는 고 장병희 명예회장과 고 최기호 명예회장이 1949년 공동으로 창업한 영풍기업사다. 이후 장 씨 일가와 최 씨 일가는 70년 넘게 동업 형태로 영풍그룹을 이끌고 있다. 장 씨 일가가 영풍전자·코리아써키트·테라닉스 등 전자 계열사를 맡고 있고, 최 씨 일가는 고려아연·영풍정밀 등의 경영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장씨 일가와 최씨 일가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 양측은 최근 몇 년간 경쟁하다시피 고려아연 지분을 매입하고 있다. 최윤범 회장은 지난 9월 5일과 6일에도 고려아연 지분을 매입했다. 재계 일각에서는 고려아연 경영권을 두고 두 가문의 분쟁설이 나돌고 있다.
9월 13일 기준으로 고려아연 지분 구조를 살펴보면 장씨 일가가 33.23%, 최씨 일가가 16.00%를 각각 갖고 있다. 이는 (주)영풍이 보유한 고려아연 지분 27.49%를 장씨 일가 지분으로 계산한 것이다. 장씨 일가가 보유한 (주)영풍 지분은 30%가 넘지만 최씨 일가의 보유 지분은 10%를 겨우 넘는 수준이다. 언뜻 보면 최씨 일가가 지분 싸움에서 장씨 일가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최씨 일가가 불리하지만은 않다는 평가다. 최윤범 회장은 고려아연 경영을 맡으면서 수차례 유상증자 및 자사주 매각, 상호지분투자 등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한화그룹이 지난해 고려아연 지분 8.08%를 확보했고, LG화학과 트라피구라도 각각 1.97%, 1.55%를 보유하게 됐다. 또 한국투자증권과 모건스탠리도 각각 고려아연 지분 0.8%, 0.5%가량을 갖고 있다. 이들은 모두 최씨 일가의 우호 세력으로 분류된다. 이를 토대로 계산하면 고려아연 내 최씨 일가 우호 지분은 28.90%가 된다.
고려아연이 지난해 한화그룹과 파트너십을 맺을 당시 장형진 회장은 고려아연 이사회에 불참했다. 장 회장은 고려아연 기타비상무이사를 맡고 있다. 이를 놓고 재계에서는 장씨 일가와 최씨 일가의 갈등이 표면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국내 증권사 한 연구원은 “LG화학과 한화가 최씨 일가가 이끄는 고려아연을 중장기적 사업 파트너로서 지원한다는 의도로 해석된다”며 “최씨 일가가 독자적 신사업 추진과 안정적인 경영권을 위해 지분을 추가로 매입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우군은 늘었지만…
고려아연은 지난 8월 30일 현대자동차그룹과 사업제휴를 맺었다고 밝혔다. 제휴의 주요 내용은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관련한 것으로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충족하는 핵심소재원료 확보를 위한 공동 광산투자 및 개발 프로젝트 추진 △전기차 배터리 핵심전략소재인 니켈 공급망 구축 △폐배터리 재활용 협력 등 사업 기회 검토 및 필요 기술 공동개발 등이다.
재계에서는 고려아연과 현대차의 제휴 내용보다 투자 내용에 더 주목했다. 현대차의 미국 계열사 HMG Global LLC는 고려아연 유상증자에 참여해 5272억 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유상증자가 완료되면 HMG Global LLC는 고려아연 지분 5%를 확보하게 된다. 고려아연은 2차전지 소재 사업 등 신사업을 위한 투자재원 활용을 위해 유상증자를 실시했다고 밝혔다. 유상증자 신주는 오는 10월 6일 상장될 예정이다.
재계에서는 현대차를 최윤범 회장의 우군으로 분류한다. 고려아연의 유상증자가 완료되면 장씨 일가의 고려아연 지분은 33.23%에서 31.57%로, 최씨 일가와 그 우호 지분은 28.90%에서 27.45%로 각각 감소한다. 하지만 현대차의 지분 5%가 최씨 일가에 힘을 실어주면 최씨 우호 지분은 32.45%가 된다. 최씨 일가가 장씨 일가를 지분율에서 역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대차와 고려아연 모두 이번 유상증자와 경영권 이슈는 무관하다는 입장이다. 고려아연 관계자는 “경영권 등과 관련해 공식적으로 자료를 냈던 적은 없고, 당연히 이와 관련한 입장도 없다”며 “(장씨 일가와 최씨 일가의 지분 매입은) 공시에 나온 내용대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증권가에서는 다르게 해석한다. 현대차는 이번 제휴로 고려아연 기타비상무이사 1명을 추천할 권리도 확보했다. 백재승 삼성증권 연구원은 “지난해 하반기 크게 부각됐던 지분 경쟁 이슈가 이번 유상증자로 인해 재부각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잠재적 위협 요인도 생겨
최윤범 회장 입장에서는 든든한 우군을 둔 셈이지만 한편으로는 잠재적인 위협 요인도 생겼다는 평가다. 경영권 분쟁이 현실화될 경우 현대차, 한화, LG화학 중 어느 한 곳이라도 최 회장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최씨 일가의 주주총회 표대결 승리는 어렵다. 유상증자 후 외부 업체들의 고려아연 지분율은 17%를 넘어선다. 이는 최씨 일가가 직접적으로 보유한 지분보다 더 많은 수치다.
경영권의 영향을 줄 수 있는 주주들의 위치 때문에 고려아연의 입장이 곤란해질 수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분을 가진 회사들 간의 사업영역이 겹치기 때문이다. 실제 고려아연은 현대차와 제휴를 맺으면서 폐배터리 재활용 관련 사업에서 협업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LG화학은 2021년 미국 폐배터리 재활용 업체 라이-사이클에, 지난해에는 국내 폐배터리 업체 재영텍에 지분을 투자하는 등 폐배터리 사업을 가속화하고 있다. LG화학 입장에서는 지분을 가진 회사가 경쟁자와 협업하는 모양새인 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고려아연은 지난해 한화그룹의 블루암모니아 사업에 참여할 예정이라고 밝혔고, 한화그룹도 고려아연이 추진하는 암모니아 탱크터미널과 암모니아 크랙킹설비 건설에 참여할 계획이다. 그런데 현대차도 2020년 호주연방과학산업연구기구(CSIRO)와 ‘혁신적 수소 생산 기술 개발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주요 내용은 암모니아로부터 고순도 수소를 경제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공동 개발한다는 것이다.
지분율이 높진 않지만 모건스탠리와 한국투자증권 등도 고려아연의 기업가치 상승이 필요한 입장이다. 이들이 고려아연 투자를 결정한 지난해 11월 23일 고려아연의 주가는 65만 8000원이었다. 하지만 현재 고려아연의 주가는 50만 원 중반대에 머물고 있다.
고려아연 지분을 보유한 업체들은 모두 “고려아연 경영권이나 의사 결정에 관여하려고 지분을 보유한 것이 아니다”라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실제로는 고려아연에 직간접적으로 사업과 관련된 의견을 전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아연으로서는 이를 마냥 무시할 수도 없다.
고려아연 지분을 보유한 한 업체 관계자는 “비즈니스적인 측면으로 봐주면 좋을 것 같다”면서도 “지분을 갖고 있으면 우리의 의견을 보다 원활하게 전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려아연 지분을 보유한 다른 업체 관계자도 “고려아연도 외부 업체로부터 투자를 받고, 사업하는 데 도움을 받은 셈”이라며 “지분을 갖고 있으면 적어도 무시당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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