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진무장’ 출마 유력했으나 배임 논란 휩싸여, 3대 협회장 얽힌 관계도 주목…정희균 “협회 정상화 위해 사임”
정치권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에게 정희균 회장은 유명 인사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를 측근에서 보좌하며 그림자 역할을 해왔다. ‘대통령 빼고 다 해본 정치인’이라 불리는 정 전 총리 정치 인생에서 ‘언성 히어로(숨은 주역)’ 역할을 한 셈이었다. 외부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정계 입문을 미뤄만 왔던 정 회장이다.
정 회장에게도 타이밍이 찾아왔다. 제20대 대선을 기점으로 정 전 총리는 은퇴한 정치인으로 분류됐다. 그림자처럼 모시던 ‘거물 형님’이 은퇴하자 정 회장 출마설이 지역 정치권을 중심으로 제기됐다. ‘완진무장’ 지역구에서 정 회장 출마설이 나왔다. 정 전 총리와 정 회장은 전북 진안 태생이다. 진안은 완주, 무주, 장수와 한 지역구로 묶여 있다.
‘완진무장’ 지역구 현역은 안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총선을 앞두고 조정되는 선거구 안에 따라 이 지역구는 재편될 수 있다. 전북 지역 정치권 관계자는 “정 회장이 선거구에 변동이 생길 경우 ‘무진장’보다 완주에 무게중심을 두고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귀띔했다.
2023년 8월 정 회장이 지역 매체와 인터뷰한 내용에 따르면, 정 전 총리가 정 회장에게 늘 당부했던 말이 있었다고 한다. “나서지 말라”는 지침이었다. 정 회장은 “솔직히 (정계입문) 기회가 박탈된 측면이 있다”면서 “1994년부터 지금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를 보좌했다면 이제는 양지로 나와 목소리를 낼 것”이라면서 총선 출마를 공식화했다. 그림자 생활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출사표와 다름없었다.
그런데 정 회장에게 문제가 생겼다. 정 회장이 대한테니스협회 수장으로 취임한 뒤 만든 외곽조직이 배임 논란에 휩싸였다. 정 회장은 2021년 3월 취임한 뒤 한국주니어테니스육성후원회(후원회)라는 사단법인을 설립했다. 협회 임원들이 후원회 이사를 맡았다.
이후 대한테니스협회 명의로 맺은 각종 계약 후원금 및 국제대회 광고 수익금 일부가 협회가 아닌 후원회 통장으로 입금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정 대행사를 둘러싼 특혜 의혹, 정 회장 아들의 ‘아빠찬스’ 의혹 등이 줄줄이 제기됐다. 정 회장은 자신을 둘러싼 배임 의혹 등에 “협회가 풍전등화의 상황”이라면서 “협회가 정상화되기 위해서는 내가 사임을 하는 것이 가장 첫 번째 수순이라고 판단해 결단을 내렸다”고 사임 이유를 밝혔다.
대한테니스협회 통장은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2015년 대한테니스협회 수장은 제26대 주원홍 전 회장이었다. 주 전 회장은 박원순 전 서울시장, 안민석 의원 등 유력 정치인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주 전 회장 재임 당시 대한테니스협회는 2015년 육군사관학교 테니스장 리모델링 사업을 맡았다. 리모델링 공사비용으로 30억 원이 필요했다. 협회는 벼룩시장, 알바천국, 다방, 딘타이펑코리아, 모스버거코리아, W쇼핑 등을 계열사로 거느리고 있는 미디어윌로부터 30억 원을 빌렸다.
미디어윌을 이끄는 주원석 회장은 주원홍 전 회장 동생이었다. 당시 테니스협회는 원금상환 대신 육사 테니스장 운영권을 확보해 넘겨주기로 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2016년 대한테니스협회장 선거에서 주 전 회장이 재선에 실패했다. 곽용운 전 회장이 제27대 회장으로 취임한 뒤 육사 테니스장을 협회가 직접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미디어윌이라는 회사에 운영권을 주는 것이 배임죄에 해당할 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미디어윌은 대한테니스협회에 30억 원 반환 관련 소를 제기했다. 1심과 2심에서 미디어윌이 승소했다. 대한테니스협회는 상고심을 포기했다. 미디어윌이 최종 승소하면서 대한테니스협회 통장은 모두 압류됐다. 협회는 원금 30억 원에 그동안 불어난 이자 30억 원까지 총 60억 원 채무를 감당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한 체육계 관계자는 “주 전 회장과 곽 전 회장 사이 미묘한 입장 차이가 대한테니스협회 통장 압류로 이어진 것”이라고 했다.
곽 전 회장은 2018년 10월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화제 인물로 떠오르기도 했다. 당시 문체위원장이었던 안민석 의원과 설전을 벌인 까닭이었다. 안 의원은 곽 전 회장이 주 전 회장으로부터 회장직을 인수받을 당시 인수위원장으로 친인척을 앉혔다는 대한체육회 감사 결과를 거론하며 2017년 국감 당시 곽 전 회장이 위증을 했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곽 전 회장은 “설명할 기회를 좀 달라”고 했다. 안 의원은 “여긴 해명을 듣는 자리가 아니”라면서 “지난 국감에서 증인(곽 전 회장)이 위증을 했는데 무슨 해명을 하려느냐”고 했다. 이어 안 의원은 “규정과 감사 결과를 이야기하려는 것이고, 협회 회장 해명을 듣는 자리가 아니”라면서 “테니스계 듣보잡 곽용운이라는 사람이”라고 곽 전 회장을 직격했다. ‘듣보잡 발언’에 곽 전 회장은 큰 소리로 반발했다. 이 장면은 2018년 국정감사 하이라이트 필름이 됐다.
2021년 테니스협회장 선거가 열렸다. 주원홍 전 회장과 곽용운 전 회장이 다시 선거에 출마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전·현직 회장들을 꺾은 인물이 있었다. 정희균 대한테니스협회장이었다.
2022년 정 회장은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고 미디어윌과 합의서를 작성한 것으로 파악됐다. 해마다 5억 원씩 부채를 분할 납부하고, 더 이상 이자를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알려졌다. 이와 더불어 곽용운 전 회장 집행부 문제점을 적시하는 조사 보고서를 협회 홈페이지에 2022년 6월까지 게시하는 조건에도 합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 회장이 압류된 통장 대신 활용할 별도 통장을 개설하려는 목적으로 한국주니어테니스육성후원회를 설립했다는 지적이 고개를 들었다. 또 협회와 미디어윌 간 합의는 사실상 주원홍 전 회장과 정희균 회장이 손을 맞잡은 것으로 분석되며 ‘정치 성향에 따른 이합집산’이라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익명을 원한 체육계 관계자는 “정희균 회장과 미디어윌 사이 이뤄진 합의 중 곽용운 집행부에 대한 조사 내용 게시 관련 부분이 이행되지 않았다”면서 “이 합의가 지켜지지 않은 것이 정 회장 리더십에 타격을 입히는 발단이 됐다는 지적도 나온다”고 했다.
정 회장이 다음 총선 출마 의사를 시사하기 시작한 2023년 8월, 미디어윌은 대한테니스협회가 합의서 조건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판단했고 채권 압류 행사에 돌입했다. 대한테니스협회 행정은 사실상 마비 수순에 돌입했다. 정 회장은 당초 스포츠윤리센터 감사가 끝난 뒤 사임서를 제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리더십이 상실된 상태에서 직무대행 체제로 전환이 협회 정상화를 위한 길이라는 판단으로 사임 시기를 앞당긴 것으로 전해진다.
정 회장이 대한테니스협회에서 불명예스럽게 사임하면서 내년 총선 출마 전선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일각에선 정 회장이 사실상 불출마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대한테니스협회는 한국주니어테니스육성후원회를 둘러싼 의혹과 관련해 2023년 8월 23일 입장을 밝혔다. 협회는 “압류로 인해 협회 계좌를 사용할 수 없었던 시절에 주니어육성위원회 이름 계좌 두 개를 협회 출납용 계좌로 만든 적이 있다”면서 “2022년 4월 미디어윌과 합의서를 작성한 뒤 모든 돈을 이관했고 2022년 5월 1일부터 사용하지 않았다”고 했다. 협회는 “압류로 인해 명의만 다른 협회 계좌를 통해 받은 후원금”이라면서 “기부금 영수증도 협회 이름으로 발급됐다”고 했다.
체육계 또 다른 관계자는 “사실상 3대에 걸친 집행부 회장들 사이 이해관계가 얽힌 상황에서 테니스협회가 사고단체로 곪아가고 있다”면서 “주원홍, 곽용운, 정희균 회장 사이에 얽히고설킨 삼각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형국”이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이런 묘한 상황에서 촉발된 의혹이 정 회장 총선 출마 꿈을 저지한 데 결정적인 한방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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