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횡령ㆍ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김승연 회장이 16일 서울 마포 서부지방법원에서 열린 선고공판에 출석했다. 연합뉴스 |
# 재벌회장 이례적인 실형 선고
한화그룹과 재계 일부에서 기대했던 ‘관용’은 없었다. ‘설마 실형까지야’라는 기대도 무너져 내렸다. 런던올림픽에서 사격이 큰 성과를 거둔 것을 틈타 김승연 회장이 그동안 사격에 쏟아부은 정성과 지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에 대한 선전도 정상참작되지 않았다. 징역 4년에 벌금 51억 원, 게다가 법정구속까지… 재판부의 선고가 내려지는 순간 김승연 회장은 고개를 떨구었다. 유난히 검찰이나 법정과 악연이 깊었던 김 회장은 결국 재벌 회장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되는 무거운 처벌을 받았다.
판결 직후 한화그룹과 김 회장 측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즉각 항소할 뜻을 밝혔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경제도 어려운데 법정구속한 것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비록 경제단체들이 즐겨 쓰는 ‘경제가 어려운데…’라는 말이 되풀이되긴 했지만 이전과 달리 형식적인 반응이라는 인상이 짙었다.
재계 한 고위 관계자는 “요즘 때가 때이니만큼 큰 소리 내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말했다. 정치권과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불고 있는 ‘경제민주화’, ‘재벌개혁’ 바람을 맞받아치기 힘든 때라는 얘기다. 이 관계자는 “최근 분위기가 반영돼 김 회장의 재판 결과가 좋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전했다.
실제로 재계에서 한화그룹의 조직문화는 김승연 회장을 정점으로 상명하복이 지배하고 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김승연 회장 역시 ‘보스기질’이 풍부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같은 평가로 미뤄본다면 지난 16일 재판부의 판단은 맞는 셈이다. 재판부는 “이러한 환경(김 회장 중심의 상명하복)에서 홍동옥 여천NCC 대표가 김 회장 소유의 방대한 차명 재산을 보고도 없이 함부로 처리하고, 계열사에서 차출한 3000억 원의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위장계열사의 부채 처리를 단독으로 감행했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올해는 김승연 회장이 환갑을 맞이한 해인 동시에 한화그룹도 환갑을 맞이하는 해다. 운명적으로 한 몸인 듯 김승연 회장과 한화그룹은 같은 해 태어나 함께 환갑을 맞이했다. 그러나 이처럼 뜻 깊은 해에 둘 다 철퇴를 맞고 흔들리고 있다.
# 20대에 나이 들어 보이려 ‘올백머리’
1952년 2월 충남 천안에서 태어난 김승연 회장은 경기고와 미 멘로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드폴대대학원 국제정치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천안에서 태어난 김승연 회장은 어릴 적 서울로 올라와 서울장충초등학교를 다녔다. 장충초 동기동창으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경선 후보,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 등이 있다. 당시 대통령의 딸인 박 후보와 친분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정몽준 의원과는 서로 집에도 놀러가고 자전거도 같이 탈 만큼 친했다. ‘초등학생 김승연’은 옷을 매일 갈아입고 다니는 ‘깔끔한’ 아이였다.
김 회장은 경기고 재학시절이던 1968년 16세 나이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일찍부터 부모와 떨어져 지낸 것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재계에서는 김 회장이 일찍부터 가족과 떨어졌고 아버지를 일찍 여읜 탓에 자식사랑이 남다르다는 얘기가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김승연 회장은 아들 삼형제를 늘 자랑스러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버드대 출신인 장남 김동관 한화솔라원 기획실장, 예일대 출신인 차남 김동원 씨,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과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2회 연속 승마종목에서 금메달을 딴 삼남 김동선 씨는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한 자식들이다.
1977년 태평양건설(현 한화건설) 해외수주담당 이사, 1980년 한국화약관리본부장 등 후계자수업을 받던 김 회장은 1981년 아버지 김종회 선대회장이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갑작스레 타계하자 29세 나이에 그룹 회장직에 올랐다.
김승연 회장이 29세의 나이에 그룹 회장직에 오른 사실은 재계에서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어린(?) 나이에 그룹 회장직에 오른다는 것은 누가 봐도 우려스러운 점이었다. 당시엔 고 정주영 현대 회장, 고 이병철 삼성 회장도 한창 활동하고 있던 때다. 20대 어린 회장이 이처럼 쟁쟁한 재벌 총수들과 어떻게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며 선대회장과 함께했던 임원들을 어떻게 이끌고 나갈지 걱정이었다. 김승연 회장은 지금의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등보다 10년 이상 어린 나이에 회장직에 오른 것.
김승연 회장은 나이를 극복하기 위해 애썼다. 먼저 헤어스타일에 변화를 줬다. 머리를 모두 뒤로 넘기는, 이른바 ‘올백머리’를 했다. 나이 들어 보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또 스스로 약해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강력한 업무추진력을 보였다. 회장 취임 1년 만인 1982년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양화학(현 한화석유화학)을 인수, 그룹의 핵심계열사로 성장시켰다. 선대회장들과 함께해온 사람들도 반대한 한양화학 인수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후 경인에너지, 한양유통 등을 잇달아 인수하며 사업적 결단과 수완을 보여 주변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다이너마이트 김’이라는 아버지 김종회 선대회장의 별명을 이어받아 ‘다이너마이트 주니어’란 별명이 생겼다.
안으로는 내부 조직을 장악하기 위해 보스기질을 발휘했다. 경향신문사를 계열사로 두던 시절, 김 회장은 밤늦게 불콰해진 얼굴로 불쑥 신문사를 방문해 느닷없이 간부들을 소집하기도 했고, 회식자리에서는 직원들에게 일일이 소주를 따라주며 호기롭게 ‘원샷’을 외치기도 했다는 것이 당시 김 회장과 함께 한 직원들의 회상이다. 일각에서는 지난 16일 재판부가 내린 ‘김승연 회장 중심의 상명하복 체제’라는 조직문화는 어린 나이에 회장에 오른 것을 극복하기 위해 김 회장이 의식적으로 형성해나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김 회장은 1982년 서울대 약대 3학년에 재학 중인 아홉 살 어린 신부 서영민 씨와 결혼했다. 서 씨는 당시 서정화 내무부 장관의 장녀였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김승연 회장이 잇달아 M&A에 성공하고 회사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배경에 처가가 있었다는 해석도 하고 있다.
훗날 김승연 회장은 아들 삼형제에게 “내가 회장이 될 때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너희는 내가 지킬 테니 걱정할 것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회장직에 오를 당시 외로웠던 심정을 대변하는 말이다.
부정을 그리워했던 김 회장은 거꾸로 자식들에게 과한 부정을 쏟았고 이것이 화근이 돼 스스로 “후회스럽다” 고 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차남 동원 씨를 폭행한 술집 종업원에 대한 보복폭행 사건이 그것이다.
# 그룹 50배 성장시켰으나 잦은 오너리스크 오점
김승연 회장이 회장으로 취임할 당시 한화의 계열사는 21개, 매출액은 7642억 원, 자산은 5846억 원으로 재계순위 20위권 밖이었다. 그러나 지난 4월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2012년 상호출자 및 채무보증제한기업집단 지정현황’이라는 자료에 따르면 한화의 계열사는 53개, 매출액은 35조 원, 자산은 34조 3000억 원으로 재계순위 10위(공기업 제외)에 올라 있다. 김승연 회장이 그룹을 이끈 지 31년이 지난 지금 계열사는 32개 증가했고 자산은 50배가량 늘면서 회사 규모가 커진 것이다.
삼성을 비롯해 현재 재계순위 상위에 올라 있는 기업이 대부분 계열사와 자산이 늘긴 했지만 30년이 지나면서 사라진 기업도 많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김 회장의 경영능력은 평가받을 만하다.
취임한 지 1년 만에 한양화학을 인수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동을 건 김승연 회장의 M&A는 2002년 대한생명 인수로 화룡점정했다. 2008년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에서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면서도 인수에 실패하긴 했지만 김 회장은 M&A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해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우그룹이 쓰러질 정도로 혹독했던 외환위기 시절에는 살아남기 위해 일부 계열사와 부동산 등을 매각하면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특히 선대회장 때부터 내려온 한화에너지, 한화기계 등 알짜 계열사를 매각한 것을 김승연 회장은 가장 가슴 아팠던 것으로 떠올리고 있다. 선친의 사업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구조조정을 통해 외환위기를 극복해낸 김 회장에게는 ‘구조조정의 마술사’라는 별명이 하나 추가됐다. 국민의 정부 시절 김 회장과 한화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구조조정의 모범’이라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29세의 나이에 갑자기 그룹 회장 자리에 오른 김승연 회장은 주변의 우려를 무색케 할 만큼 한화그룹을 성장시켰다. 화약 회사로 알려져 있던 그룹의 사업구조를 화학, 유통과 레저, 금융 중심으로 변모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그러나 한화그룹은 김승연 회장이 재벌 총수 중에서는 유독 검찰 조사를 많이 받는 등 오너리스크에 자주 휘말린다는 것이 큰 단점으로 꼽힌다. 총수가 번번이 검찰에 출두하고 도덕성 문제로 비난의 도마에 오른다는 것은 기업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기업 이미지는 추락하고 주가는 하락한다. 김 회장에게 실형이 선고된 지난 16일 한화그룹 대표주들은 일제히 추락하며 오너리스크를 다시 한 번 부각시켰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
아들 때린 ‘놈’ 찾아 직접 보복
재벌 총수 중 유난히 검찰 출두가 잦았던 김승연 회장은 1981년 회장에 오른 이후 지금까지 모두 5차례나 검찰조사를 받았다.
첫 번째 검찰 조사를 받은 것은 회사 이름을 한국화약에서 한화로 바꾼 1993년. 외화를 밀반출하고 비자금을 불법으로 실명 전환한 혐의였다. 조사 결과 김 회장은 당시 계열사인 태평양건설의 사우디아라비아 공사대금을 빼돌려 미국에 호화주택을 구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같은 사실은 동생인 김호연 전 의원의 제보에서 발단이 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당시 김승연 회장과 김호연 전 의원은 재판을 30여 차례나 할 만큼 기나긴 상속 분쟁을 벌이고 있었다. 김 회장이 2개월가량 구속수감되면서 ‘제2의 창업’이라는 그룹 차원의 의욕이 가려졌다.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후 2003년,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 과정에서 김승연 회장이 당시 서청원 한나라당 대표에게 불법 정치자금 10억 원을 건넨 사실이 밝혀졌다. 1심에서 집행유예, 2심에서 벌금 3000만 원을 선고받았다.
김승연 회장은 당시 사회적으로 큰 지탄을 받았는데 “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던 입장과 달리 출국금지조치 하루 전에 미국으로 출국, 7개월이 지난 뒤에야 귀국했다. 결국 김 회장에 대한 선고가 이뤄진 것은 이듬해인 2004년. 재벌 회장의 해외 일정이 7~8개월 계속 된다는 것이 설득력이 떨어지는 터라 ‘도피성 출국’이라는 비난을 샀다.
2005년에도 김 회장은 대한생명 인수와 관련, 정·관계 로비 의혹을 받고 검찰 조사를 받은 바 있다. 증거 부족으로 당시 김연배 그룹 부회장만 구속됐다.
김 회장과 관련해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은 2007년 있었던 이른바 ‘보복폭행’ 사건. 김 회장이 직접 “공부 잘하고 똑똑하지만 술버릇이 좋지 않아 걱정”이라던 차남 동원 씨가 ‘나쁜 술버릇’이 말썽이 돼 술집에서 폭행당하자 이에 격분한 김 회장이 직접 경호원 등을 이끌고 가해자들을 청계산으로 끌고 가 폭행한 것이다. 재벌 회장이 직접 폭행에 가담했고 보복성이라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
김 회장은 공개적으로 “후회스럽다”며 반성했지만 이 사건은 김 회장에게 ‘조폭회장’이라는 낙인을 찍을 만큼 명예를 크게 실추시켰다.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 사회봉사 200시간을 받았다. 김 회장의 사회봉사 현장이 일부 언론을 통해 공개되기도 했지만 따뜻한 시선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리고 배임·횡령, 비자금 조성 등의 혐으로 다섯 번째 검찰 조사를 받은 이번 사건으로 김 회장은 마침내 징역 4년이라는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전 네 차례에서는 집행유예나 불기소 처분을 받아 ‘재벌 총수 봐주기’ 논란을 일으켰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다른 재벌 총수에 비해 지인들의 제보에 따라 검찰 수사가 이뤄진 경우가 많다는 점은 김 회장으로서는 아픈 부분이다. 밀반출한 외화로 해외 호화주택을 구입했다는 사실은 친동생의 제보가 계기가 돼 밝혀졌으며, 실형으로 이어진 이번 사건은 한화증권 퇴직자의 제보가 발단이 됐다. 비록 김 회장이 보스기질은 다분할지 모르지만 사람 관리에는 문제가 있다는 증거다. [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