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의 페르소나’ 극중 이름 모두 ‘희봉’…‘플란다스의 개’로 충무로 눈도장, 칸까지 동행 재조명
2017년 5월 넷플릭스 영화 ‘옥자’로 처음 칸 레드카펫을 밟은 변희봉이 다음날 기자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벼락 맞은 듯 꿈도 못 꿔온 일을 해냈다는 기쁨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귀국 직후 tvN ‘미스터 션샤인’ 제작진으로부터 출연 제안을 받고 더 왕성하게 활동하려면 건강해야겠다는 생각에 건강검진을 받았다가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초기였고 1년여의 암 치료가 끝나 2019년에는 드라마 ‘동네변호사 조들호 2: 죄와 벌’, 영화 ‘양자물리학’ 등에 출연했다. 그렇지만 췌장암이 재발하면서 연기 활동이 중단됐고 결국 2023년 9월 18일 별세했다. 향년 81세.
배우 변희봉. 본명은 변인철로 데뷔 당시에는 본명을 사용했다. 예명인 ‘희봉’은 어릴 때 집에서 부르던 이름이라고 하는데 김인철, 백인철 등 이름이 같은 배우들의 세금 고지서가 자꾸 자신에게 날라 오곤 해서 예명을 쓰게 됐다고 알려졌다.
항간에선 악역 이미지가 너무 강해 이미지 개선을 위해 예명을 쓰기 시작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만큼 1970년대 배우 변인철은 악역을 참 많이 소화한 배우였다. 1965년 MBC 공채로 성우 활동을 시작한 변희봉은 1960년대 중반 연출가 차범석의 극단 산하에서 연극을 시작했다. 본격적인 탤런트 활동은 1970년 MBC 반공드라마 ‘홍콩 101번지’였다. 당시만 해도 방송사마다 공채 탤런트를 각자 뽑아 드라마에 출연시키던 때라 MBC 공채 성우 출신인 변희봉은 1970~1980년대에는 계속 MBC 드라마에만 출연했다. 주로 조단역의 악역을 많이 맡았는데 당시 인기 드라마이던 ‘수사반장’에서 사기꾼, 잡범에 사이비 교주까지 연기하기도 했다.
소위 말하는 출세작은 1984년에 방송된 ‘조선왕조 500년 설중매’였다. 여기서 유자광 역할을 맡아 “이 손 안에 있소이다”라는 희대의 명대사를 유행시켰다. 그런데 방송가 원로들은 실제 배우 변희봉의 인생을 바꾼 작품은 1979년 방영된 드라마 ‘안국동 아씨’라고 설명한다. 점쟁이 역할을 맡아 기가 막힌 연기를 선보이며 방송관계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 본명 변인철 대신 예명 변희봉을 사용하고 얼마 안 돼 출연한 작품으로 확실한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작품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조금씩 비중 있는 역할에 캐스팅되기 시작해 유자광 역할까지 거머쥔 것이다.
이후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며 연기 활동을 이어갔다. 1980~1990년대 드라마는 지금과 달리 사극과 시대극이 많았다. 또한 드라마 속 가정은 대가족이 대부분이었다. 방송국 소속 공채 탤런트 풀이 풍부하고 출연료도 지금에 비하면 저렴해 출연진이 많은 사극과 시대극, 그리고 대가족이 나오는 드라마의 제작이 수월했다. 변희봉 역시 MBC 소속으로 다양한 사극과 시대극, 그리고 집안의 어른 역할 등으로 꾸준히 활동을 펼쳐왔다.
그렇게 드라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중견 배우 변희봉의 운명을 또 한 번 바꿔 놓은 이는 봉준호 감독이다. 칸에서의 기자간담회에서도 변희봉은 거듭 “봉준호 감독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라고 밝혔을 정도다.
1980년 ‘팔불출’을 시작으로 몇 편의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변희봉의 주무대는 드라마였다. 이런 그가 충무로에서 기틀을 닦게 된 계기는 바로 2000년에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플란다스의 개’였다. 당시 변희봉은 이 영화의 출연을 거절했다고 한다.
‘옥자’의 칸 기자간담회에서 봉준호 감독은 “아파트 경비원 역할로 변희봉 선생님을 캐스팅하고 싶어 당시 마포 가든 호텔에서 출연을 부탁드렸다”며 “변 선생님이 ‘뭐 개를 잡아, 이게 영화감이야’ 하셔서 제가 어떻게든 설득을 하려 했다. 저의 유일한 무기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본 변 선생님의 사극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것으로 그런 것들을 나열하면서 변 선생님의 마음을 녹이려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봉준호 감독과는 ‘살인의 추억’ ‘괴물’ ‘옥자’ 등 4편의 영화를 함께했다. 물론 영화마다 각기 다른 캐릭터를 소화했지만 극중 배역 이름은 모두 ‘희봉’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봉 감독은 ‘플란다스의 개’ 때부터 변희봉의 출연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플란다스의 개’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충무로에 봉준호라는 신인 감독의 존재감을 보여주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그리고 TV에서 자주 만나던 중견 배우 변희봉의 존재감 역시 확실하게 드러났다.
당시 변희봉의 연기에 매료된 것은 봉 감독 한 명이 아니었다. 바로 정해진 차기작은 ‘화산고’다. 변희봉에 대한 충무로의 관심은 ‘플란다스의 개’가 시작점이지만 더 주목해야 할 작품은 2001년에 개봉한 ‘화산고’라고 설명하는 이들도 많다. ‘화산고’는 훗날 톱스타가 된 장혁, 신민아, 김수로, 권상우, 공효진 등 당시 영화계에서 주목받던 신예 배우들이 대거 출연해 화제가 된 영화다. 그렇지만 교감 역할을 맡아 강인하고 개성 넘치는 연기를 보여준 변희봉의 존재감도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렇게 변희봉은 바로 충무로에서 캐스팅 최우선 순위 배우 가운데 한 명이 됐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가 2000년 이후 영화계에서 보여준 다양한 작품 속의 모습을 기억하게 됐다.
변희봉의 발인은 9월 20일 오후 12시 30분 서울 강남구 서울삼성병원 장례식장 17호에서 엄수됐다. 고인의 장지는 서울추모공원이며, 흑석동 달마사 봉안당에 봉안됐다.
김은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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