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9년 3월 7일 첫 공판에 출석한 김현희가 죄책감에 사로잡힌 듯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
양심수 가족협의회 회원들이 경찰관들과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김현희도 이 모습을 보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도 유가족들의 모습에 그들의 슬픔이 피부에 와 닿으며 가슴에서 뭔가 울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면서 ‘나도 만약 내 가족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죽는다면 저렇게 하겠지’라는 생각을 하였다.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긴장감으로 법원에 팽팽한 공기가 감돌았다.
“우리가 옆에 있으니까 당황하지 마, 유가족들이 저러는 것을 네가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해.”
수사관들은 김현희를 안정시키면서 그녀의 양 팔을 끼고 법정 뒤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에는 우리 수사관들과 의사, 간호사들이 함께 있었는데 거기서도 김현희는 계속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재판은 대법정에서 열렸다. 재판에 앞서 우리는 긴장감을 풀어주기 위해 김현희에게 청심환을 주었다. 잠시 후 재판이 시작되는 소리가 들리고 김현희에게 입장하라고 했으나 그녀는 주저하며 선뜻 들어가지 못했다. 나는 착잡한 시선으로 그녀를 살폈다. 그녀는 한 손에 손수건을 움켜쥐고, 다른 한 손엔 주머니에서 꺼낸 조그만 종이쪽지를 들고 있었다. 며칠 전 목사님이 건네 준 성경 구절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으리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라.”
김현희의 손에 쥐어진 쪽지에는 성경 이사야서 41장 10절 말씀이 씌어 있었다.
김현희가 법정에 들어서자마자 유가족들이 다시금 울부짖으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년아, 내 아들 살려내!”
어느 나이든 여인이 외쳤다.
“내 남편 살려내.”
이곳저곳에서 울부짖듯 절규하는 소리가 들렸다. 김현희는 그 소리에 흠칫했다.
“네가 안했으면 안했다고 그래.”
방청석에서 호소와도 같은 외침도 들려왔다. 김현희가 안했다고 그러면 누가 했다는 말인가. 나는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조용히 하세요.”
정상학 판사는 계속 정숙을 요구했고 그래도 유가족들의 외침이 그치지 않았다.
“소란이 계속되면 재판을 진행할 수가 없습니다. 더 이상 소란을 피우면 퇴정시키겠습니다.”
정상학 부장판사가 최후 통고를 하자 겨우 재판정은 진정되었다.
첫 번째 재판은 검사의 공소사실유지 진술과 김현희가 자기의 인적사항을 인정하는 절차와 검사의 직접 심문으로 약 6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김현희는 검사의 진술이 계속되는 동안 고개를 떨어뜨리고 울었다.
“피고는 이름이 무엇입니까?”
검사의 진술이 끝나자 재판부가 김현희에게 물었다. 김현희는 우느라고 대답을 하지 못하다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김현희입니다.”
“나이와 생년월일을 말해주세요.”
“나이는 스물일곱 살이고….”
“출생지는 어디입니까?”
“평양시 동대원구역 동신동….”
김현희는 공소사실을 모두 시인했다. 대답하는 김현희의 목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않자 방청석에서 “크게 말해”라는 외침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중간에 점심시간이 있어 우리는 도시락을 먹었는데 김현희는 국물만 마실 뿐 거의 밥을 먹지 못했다. 판사가 다음 재판 기일을 말하고 재판이 끝나자 다시금 유족들이 웅성거렸다.
김현희가 일어서서 재판정을 나오려고 하자 어디선가 신발이 날아와 김현희의 머리를 스쳤다. 당황하긴 그녀나 우리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그들을 뒤로한 채 재빨리 법원 청사를 빠져나왔다. 우리는 다시 조사실로 돌아온 후 김현희에게 쉬라고 말했다. 그녀는 자기 침대에 커튼을 치고 들어가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그녀가 예민해져있으니 더 철저히 감시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죄를 짓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김현희의 죄는 어떠한 상태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 자신도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KAL기 폭파사건을 저지른 것은 도구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녀는 북한에서 교육을 받았고 모든 일은 김승일이 주도했다. 물론 그가 죽어서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 수 없었으나 진술만으로 따져 보면 폭발물을 설치한 것도 김승일이었고 운반한 것도 김승일이었다. 그녀는 김승일이 의심받지 않게 하기 위해 수행한 보조 공작원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희생자가 너무 많았다. 비행기 테러는 일반 살인사건과 다르다. 보조 공작원이라고 해도 무서운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
1989년 3월 21일에 2차 공판이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재판을 받았던 1차 때와는 달리 유가족들의 울부짖는 모습을 본 그녀로선 다시 재판을 받는 일이 공포였을 것이다.
“재판정에 안 나가면 안 돼요? 모든 처벌을 받을 테니 재판을 받지 않게 해주세요.”
김현희는 며칠 전부터 담당수사관에게 애원하듯, 항의하듯 말했다.
“처벌을 받더라도 재판을 받아야 해.”
“그냥 처형을 시켜도 좋다고 했잖아요?”
“이 사건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지 알잖아? 힘들더라도 재판을 받아야 돼.”
수사관들은 재판을 거부하는 김현희를 설득했다. 2차 공판은 변호인의 반대신문과 검사의 보충신문, 재판장의 신문과 증거조사로 진행되었다.
“재판 받으러 온 년이 어떻게 머리를 저렇게 곱게 길러?”
유가족과 양심수가족협의회 등에서는 이날도 김현희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왜 죄수복도 안 입고 수갑도 안찼어?”
“네가 안했다고 양심선언 해!”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나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김현희를 압송할 때부터 1년이 넘게 그녀와 함께 지냈다. 그러면서 한 번도 그녀가 가짜라는 생각을 한 일이 없었다. 그런데 양심수가족협의회나 일부 재야단체들은 KAL사건이 조작이라고 생각을 한다. 자국민 115명을 비행기 폭파로 죽게 하여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안기부가 정권을 위해 우리 국민 115명을 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변호인의 신문에 김현희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 들려, 크게 말해!”
유가족과 방청객들은 그럴 때마다 크게 외쳤다. 그들에겐 김현희의 존재가 미움과 저주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이날도 김현희는 손에 쥔 손수건이 젖도록 눈물을 흘리면서 재판을 마쳤다. 그 후 3차 공판에서는 검찰에서 신청한 증인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KAL기 폭파당시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가 바그다드-아부다비 항공권을 예약하고 바그다드에서 내려 바레인으로 간 것 등 그들의 행적을 추적해 준 김태환 대한항공 아부다비 지점장과 미얀마로 가서 KAL 858기의 잔해 수색을 한 안상혁 대한항공 정비본부 기체점검부 객실정비소장과 한재기 교통부 서울지방항공관리국 검사과장, 폭파된 KAL기가 바그다드에서 아부다비까지 운항했을 때 당시 김현희와 김승일에게 직접 기내 서비스를 담당했던 박은미 대한항공 승무원 등이 증인으로 참석했다. 난 이들을 보면서 김현희가 붙잡힐 수 있고 폭파범이라는 것을 확인해 줄 수 있는 같은 사건에 관계된 사람들인 것에 고마움, 동질감 같은 것을 느꼈다.
▲ 1989년 4월 25일자 <경향신문>. |
김현희는 자신의 심정을 일기에 썼다. 이런 글을 보고 그녀가 얄밉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욕설을 듣고 날아오는 주먹에 머리통을 쥐어 박히고 하면 일순간 그런 생각도 들겠지, 라고 그녀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것도 같았다.
지루한 재판이 끝나고 마침내 김현희에겐 1심 공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김현희는 담담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사형 선고를 받자 당혹스러워하면서 괴로운 표정이었다. 수사관들은 김현희에게 ‘앞으로 사면이 있을 것이니 안심하라’든가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걱정하지 말고 있으라는 말로 대신했을 뿐이다. 사실 이 무렵 재판이 끝나면 김현희에게 사면을 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 재판이 시작될 때부터 신문에서 그와 같은 예측 보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국정부는 KAL기 폭파범 김현희를 오는 3, 4월께 재판에 회부한 후 서울올림픽 개최 전인 금년 6, 7월께 특별사면 석방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김에 대한 사면 조치는 북한의 비열한 테러 행위에 대한 유일한 산증인으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특히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세계 각국에 북한의 범죄를 재확인시킴으로서 테러의 재발 방지에도 효과가 있다는 고도의 정치적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일본의 산케이 신문이 1988년 1월27일 보도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김현희에 대한 재판은 1989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정리=이수광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