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가운데 관정재단 이사회의 사문서 위조 의혹이 불거졌다. 이사장이 자리를 떠난 사이 직인이 무단 활용돼 회의 소집 및 안건 의결 등이 이뤄졌다는 게 핵심이다. 당장 수사까지 예고된 상황이지만, 의혹의 당사자들은 물론 재단 관계자들이 인정도 부인도 않은 채 침묵을 지키고 있어 의문을 키우고 있다.
#신 이사장 행방 미스터리
일요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중앙지검은 최근 관정재단 사무국장 예 아무개 씨(59)를 '사문서 위조' 등의 혐의로 수사해 달라는 고발장을 접수해 형사 제5부에 사건을 배당했다. 신동렬 관정재단 이사장(64)이 잠시 재단을 떠난 2023년 7~8월 무렵, 예 국장이 신 이사장의 직인을 무단 도용해 이사회의 소집 및 의결 등을 처리했다는 의혹이다.
구체적으로 관정재단은 8월 11일 '이사 연임의 건', 8월 30일 '정관변경의 건' 등으로 이사회를 개최해 전부 의결했다. 각각 정관에 따라 회의 일주일 전 이사진에 소집통지서를 발송하는 등 절차도 거쳤다. 서울특별시교육청에 제출된 관련 문서들에는 모두 '이사장 신동렬' 도장이 찍혀 있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신 이사장이 재단에 없었던 정황이 파악돼 의혹이 지펴졌다. 이 시기 신 이사장이 사의를 밝히고 이사회를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관정재단이 올 8월 3일 만든 '역대 이사장' 표에도 신 이사장의 사임 일자는 8월 10일로 기재됐다. 비고란에는 '실제 7월 20일'이라고 쓰였다. 이때 사실상 관정재단을 관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신 이사장이 당시 재단을 비운 흔적은 더 있다. 그는 사임 후 한 달이 지나서도 관정재단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인사들에게 본인이 관둔 사실을 공연히 알려 왔다. 한 인사가 9월 7일 신 이사장한테 받은 메시지에는 "저는 7월 하순 이사장 사직서를 정식 제출하고 사임해 8월 급여도 받지 않았다"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이런 문자가 여러 개다.
9월에는 이 전 회장의 가족 등이 '8월 이사회 활동 여부' 등을 묻는 내용증명에도 신 이사장은 입을 닫았다. 7일 안에 답이 없으면 관뒀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는 전제를 달아도 마찬가지였다. 관정재단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이제 수사를 지켜봐야 한다"며 "8월 이사회 당일 신 이사장의 휴대폰 위치만 확인하면 돼 어려운 절차는 아닐 것"이라고 내다봤다.
단, 신 이사장이 등기부상에선 사라지지 않았었다. 애초 관정재단은 2023년 9월 8일 이사회에서 새 이사장을 선임해 등기할 계획이었으나 상황이 꼬였다. 이종환 전 삼영화학그룹 회장의 유훈대로 권영걸 현 대통령 직속 국가건축정책위원장을 내정한 상태였는데 신 이사장을 포함한 이사 3명이 돌연 불참해 정족수 미달로 등기에 남은 신 이사장이 복귀했다고 한다.
특이한 대목은 신 이사장 입장에선 고발 내용의 사실 여부에 따라 자신이 피해자일 수도, 재단 관계자가 억울한 수사를 받아야 할 수도 있지만 극도로 말을 아끼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일요신문의 관련 질문에 "의혹은 사실이 아니"라면서도 "그 이상은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피소된 예 국장도 반론 및 해명을 요구하는 기자의 통화·메시지 등을 외면했다.
#이사회 소집 통보 날짜 두고도 논란
이번 사안에 관심이 모이는 이유는 의혹이 사실일 때 미치는 파장 때문이다. 사문서 위조 등 범죄를 수반한 이사회는 무효가 될 수도 있다. 특히 3명의 이사 연임을 의결한 8월 11일 회의가 백지화되면 현 이사진 자격 자체가 부적격하다는 해석으로 이어진다. 이 경우 그 뒤로 진행된 이사회도 줄줄이 적법성을 의심 받을 소지가 있다.
관정재단으로서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관정재단은 2023년 9월 19일 임시이사회에서 '가족은 관여할 수 없다'는 정관 20조를 삭제했다. 이 전 회장이 '가족은 재단 운영에 관여해선 안 된다'는 유훈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지 엿새 만의 결정이다. 일각에선 장남 이석준 삼영화학그룹 회장(69)의 재단 운영을 위한 포석으로도 해석한다.
관정재단의 규모나 상징성 등에 비춰 엄정한 조사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국민의힘 소속 정지웅 서울시의원은 "교육청부터 팔 걷고 나서 실태조사 등 모든 권한을 동원해 진상을 파악해야 한다"며 "수사든 자체 조사든 뒤늦게라도 위법 사항이 발견된다면 교육청이 과연 이사회 취소 등 엄정한 결정을 내릴지 엄격히 감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시교육청도 조만간 서면 혹은 실사를 통해 사실관계를 규명할 것으로 보인다. 교육청은 정관을 위반한 교육재단 이사회에 대해 설립취소 등 중징계를 내리도록 돼 있다. 자연히 실정법 위법 혹은 기타 절차적 하자를 발견한 때에도 의결 무효나 수사의뢰 등의 조치를 할 수 있다.
현재 관정재단 이사는 총 5명이다. 성균관대 총장을 지낸 신 이사장과 박근혜 정부 초대 내각인 서남수 전 교육부 장관(71), 기업인 봉 아무개 씨(55), 대학교수 권 아무개 씨(64), 공기업 직원 권 아무개 씨(53) 등이다. 일요신문은 이들 모두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입장을 듣진 못했다. 서 전 장관은 기자 신분을 밝히자 "할 말이 없다"며 인터뷰를 사양했다. 두 명의 권 이사도 통화를 거부했다.
봉 이사의 경우 "가족의 재단 관여를 가능토록 한 정관 개정은 이사회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면서 "신 이사장이 7월에 사의를 밝힌 건 사실이지만 사표가 수리되진 않았었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신 이사장이 8월에 직접 이사회 활동을 했는지' 등의 질문에는 "그건 노코멘트하겠다"며 말을 피했다.
한편 관정재단 안팎에서는 '이 전 회장 가족의 재단 운영도 가능하다'는 취지의 정관 개정을 의결한 9월 19일 이사회를 두고도 논란이 일고 있다. 개정 자체도 뜻밖이지만, 소집 통보 날짜인 9월 12일에 주목한다. 이 전 회장 가족과 측근들이 임종을 예상하고 한데 모인 날이었다. 이 전 회장은 이날 자정을 갓 넘긴 13일 새벽 1시쯤 눈을 감았다.
기부금 사용 내역 '비공개'…관정재단 운영 의혹 또 나오나
관정재단은 이종환 전 회장이 한국의 노벨상 수상자 육성을 목표로 2000년 설립했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재단에 사재 약 1조 7000억 원을 쾌척하며 '기부왕'으로 불렸다. 아시아 최대 장학재단으로 성장하며 현재까지 누적 1만 2000명에게 장학금을 수여했다. 지급한 장학금액은 2700억 원으로 추산된다.
관정재단의 2022년 기준 총자산은 6401억 1822만 원이다. 이 가운데 약 5700억 원이 토지와 건물 등 부동산 재산이다. 장부가액일 뿐 각각의 시장가치를 평가하면 1조 원이 넘는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서울 중구의 크라운파크호텔 부지를 비롯해 서초와 부산·제주 등지의 약 30곳에서 빌딩·호텔·토지·골프장 등을 보유하고 있다.
그만큼 표면상으론 비영리 재단법인을 내세우지만 일반 기업과 유사한 속성도 띤다. 기부금 단체로 지정됐음에도 10년 전인 2013년 이후 공시 대상인 2000만 원 이상 출연자는 이 전 회장과 가족 외에는 거의 없었다. 2022년 골프장과 임대료 수익만 각각 187억 원, 370억 원으로 총 사업수익이 약 572억 원을 기록했다.
영리기업 기준으로 바라보면 알짜 사업체다. 이 같은 관정재단의 2022년 총 사업수익은 삼영화학그룹이 기록한 매출 1477억 원의 약 3분의 1 수준에 불과한데, 순이익은 재단이 301억 원으로 삼영화학 27억 원의 10배를 웃돈다. 특히 관정재단의 사업수익은 줄곧 300억 원대를 기록하다 3년 전부터 매년 100억여 원씩 증가하는 성장세다.
목적사업인 장학금 지급액은 대개 100억 원 안팎을 유지하고 있다. 2018년 105억 원, 2019년 124억 원, 2020년 99억 원, 2021년 102억 원, 2022년 120억 원씩 사용했다. 다만 구체적인 사용처는 감춰져 있다. 기부금 사용 내역 공개 등 공익법인 회계 원칙에 부합한 회계 처리가 미흡한 탓이다.
공교롭게도 기부금 사용 내역은 설립자의 장남인 이석준 삼영화학그룹 현 회장이 이사장이던 2013년부터 비공개로 바뀌었다. 그 전까지 이종환 전 회장 등이 이사장을 역임한 기간에는 고향인 경남 의령의 고등학교와 서울 지역 교육기관 등에 지출한 내역을 상세하게 공개했었다.
관정재단은 최근 중국 유학 장학생을 늘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주로 영미권 유학생들에 장학금을 지급해왔으나 수혜 폭을 넓히기로 했다. 한국의 노벨상 수상자를 육성한다는 취지에 따라 베이징대·칭화대·상하이자오퉁대·푸단대·저장대 등 현지 명문대학 유학생을 중심으로 장학금을 수여할 방침이다.
[반론보도] ‘관정 이종환교육재단 설립자 유훈’ 기사 관련
본 언론사는 2023년 9월 26일자 “‘가족은 관여하지 말랬거늘’ 삼영 이종환 ‘1조 기부왕’의 버려진 유훈”이라는 기사, 2023년 10월 5일자 제1639호 “누가 왜 이사장 직인 찍었나… ‘1조 기부왕’의 관정재단 수사 임박”이라는 기사를 보도한 바 있습니다.
위와 같은 기사에 대하여 관정이종환교육재단은 “이종환 회장께서 작고하기 5일 전 장남인 이석준이 명예이사장(이사)으로 자신의 사후 재단법인에 참여하라는 새로운 유훈을 남겼다”라고 알려 왔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