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고예산 영화 회피 분위기…전반적인 투자 위축과 질적 하락 우려 높아
‘30일’의 관객수는 200만이 채 되지 않지만 이는 극장가 전체 관객이 워낙 줄어든 탓이다. 자체적으론 분명한 흥행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10월 24일 기준 2023년 흥행 랭킹에서 ‘30일’은 17위에 이름을 올렸다. 한국 영화 가운데는 7위다. 6위 ‘교섭’이 172만 1111명, 5위 ‘영웅’이 178만 6329명의 누적 관객수를 기록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5위 자리까지도 욕심을 내볼 수 있어 보인다. 한편 ‘영웅’의 경우 2022년 연말에 개봉해 누적 관객수는 327만 명이지만 2023년에 관람한 관객수 누적은 178만 6329명이다.
사실 ‘30일’은 개봉 초기에 입소문이 날 만큼 관객을 끌어모으지는 못했다. 그러나 20일 넘게 박스오피스 1위를 지켜낸 부분을 언론이 주목하면서 뒤늦게 화제가 집중됐다. 흥행세가 이어지면 4위인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의 190만 7475명까지 바라볼 수 있겠으나, 20만 명이 넘는 격차는 다소 크게 느껴진다.
흥행 여부를 따지는 첫 관문은 손익분기점 돌파 여부다. 적어도 손해는 보지 않고 수익이 나야 흥행이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1000만 관객이 든 영화라 할지라도 제작 및 홍보·마케팅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투입돼 손익 분기점을 넘지 못하면 흥행했다고 보기 힘들다. ‘30일’은 개봉 21일 만인 10월 23일 손익분기점을 돌파했다. 순제작비 약 60억 원, 홍보·마케팅 비용 약 20억 원이 투입된 이 영화의 손익분기점이 누적 관객수 160만 명이기 때문이다.
코로나 19 팬데믹 이전, 그러니까 극장이 호황을 누리고 한국 영화도 잘나가던 그 시절에는 어지간히 흥행한 영화는 대부분 손익분기점을 돌파하곤 했다. 누적 관객수가 500만 명을 넘기면 크게 흥행한 영화, 1000만 명을 넘기면 대박이 난 영화로 분류하는 게 더 일반적이었다. 당시에 ‘30일’처럼 개봉 이후 22일 연속 전체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지킨 영화라면 500만 명 돌파는 기본, 1000만 돌파도 넘볼 수 있었다.
2023년 개봉 한국 영화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지킨 영화는 ‘범죄도시3’로, 24일 동안 1위에 올랐다. ‘30일’과는 고작 이틀 차이다. 그렇지만 ‘범죄도시3’는 1000만 관객 영화가 됐고 이틀 부족한 ‘30일’은 손익분기점인 관객 160만 명을 겨우 넘겼을 뿐이다. 1, 2편의 연이은 성공으로 관객들에게 믿음을 산 ‘범죄도시3’는 예외적으로 코로나19 팬데믹 이전과 비슷한 흥행세를 이어갔다. ‘범죄도시3’가 개봉 2일차에 기록한 누적 관객수가 169만 5088명으로 ‘30일’이 22일 동안 독야청청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지키며 동원한 관객보다 많은 관객을 단 이틀 만에 모아냈다. 그렇지만 ‘30일’의 흥행 성적에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달라진 극장가 상황이 고스란히 반영됐다.
2023년 극장가의 현실은 냉혹하다. 한 해 동안 손익분기점을 돌파한 영화는 ‘범죄도시3’ ‘밀수’ ‘잠’에 이어 ‘30일’이 네 번째다. ‘범죄도시3’는 1068만 2743명의 누적 관객수를 기록하며 1000만 영화 대열에 이름을 올렸고 ‘밀수’는 514만 2479명을 동원해 500만 영화로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잠’은 147만 146명의 누적 관객수를 기록하며 2023년 전체 흥행 순위 19위, 한국 영화 흥행 순위는 ‘30일’에 이어 8위다. 제작비는 48억여 원이었고 손익분기점이 80만 명이었다.
‘30일’과 ‘잠’은 중예산 영화로 개봉도 비수기를 선택했다. ‘잠’은 여름 성수기가 끝난 뒤인 9월 6일, ‘30일’은 추석 성수기 막바지인 10월 3일 개봉했다. 극장가가 비수기인 까닭에 엄청난 흥행세를 이어가기는 어려웠지만 그만큼 경쟁 개봉작이 많지 않았다는 점은 유리하게 작용했다. 참고로 ‘잠’의 남자 주인공은 최근 마약 불법 투약 혐의로 논란을 빚은 이선균이다. 조금만 개봉을 미뤘다면 ‘잠’은 창고 영화가 될 수도 있었다.
예상대로 10월 15일 일일 박스오피스 1위 자리는 평일임에도 무려 25만 5232명의 관객을 동원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몫이 됐다. 그리고 3만 6664명의 관객을 동원한 ‘용감한 시민’이 2위에 오르면서 ‘30일’을 3위로 밀어냈다. ‘용감한 시민’ 역시 제작비가 약 80억 원인 중예산 영화로 손익분기점은 160만 명이다.
‘30일’은 개봉 첫날이 공휴일이라 17만 1976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이후 평일에도 4만~5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했음을 감안하면 3만 6664명의 관객을 동원한 ‘용감한 시민’이 다소 밀리는 분위기다. ‘용감한 시민’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강력한 경쟁작이 있어 ‘30일’에 비해 불리한 상황이지만 영화에 대한 평이 좋아 손익분기점 돌파를 기대해 볼 만하다. 다만 주어진 시간이 2주뿐이다. 11월 8일이면 박서준이 출연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더 마블스’가 개봉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한국 영화계는 100억 원 안팎의 제작비가 투입된 고예산 영화가 흥행을 주도했다. 제작비가 많이 든 만큼 손익분기점도 높아지지만 그만큼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 한국 영화 수익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영화들도 고예산 영화였다. 오히려 참신한 아이디어와 기획력을 바탕으로 한 중예산 영화가 더 투자받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렇지만 극장가가 기나긴 불황에 빠지면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High Risk High Return)’인 고예산 영화보다 중예산 영화가 더 주목받고 있다.
다만 영화계에서는 이런 흐름이 이어지면 한국 영화에 대한 투자가 전반적으로 축소될 수 있다는 부분을 우려하고 있다. 돈이 많이 들더라도 더 좋은 영화를 제작하는 방향이 아니라, 돈을 적게 들이고 적당한 흥행 성적을 기록할 수 있는 영화만 급증할 경우 한국 영화의 전반적인 질적 하락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이호연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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