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말 한마디에 5년 치 25조 날아가…총선 앞두고 증액 가능성 띄웠지만 ‘반기’ 쉽지 않을 듯
#윤 대통령 말 한마디에?
지난 6월 22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2024년 R&D 예산안’을 올해보다 2%(5000억 원) 증가한 25조 4000억 원 규모로 편성했다. 그런데 6월 28일 윤석열 대통령이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원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R&D 예산에 대한 재검토를 주문했다. 윤 대통령의 발언 다음날 감사원은 과기정통부를 비롯한 11개 기관에 감사관을 보내 R&D 사업이 적정하게 운영되는지 현장감사(실지감사)를 실시했다.
그렇게 IMF 외환위기 당시에도 줄어들지 않았던 R&D 예산이 1991년 이후 33년 만에 처음으로 삭감됐다. 지난 8월 29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내년도 예산안에 따르면 2024년도 R&D 예산안은 전년 대비 16.6%(5조 1626억 원) 감소한 25조 9152억 원으로 편성됐다. R&D 예산이 총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23년 4.9%에서 2024년 3.9%로 1.0%포인트(p) 감소했다.
그러다보니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R&D 예산 삭감 관련 질문이 쏟아졌다. 이에 대해 과기정통부에서 제대로 된 해명과 합리적 자료를 내놓아야 했지만, 설명 및 자료 제출이 미흡해 오히려 불신만 키웠다는 지적이 나온다.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에서도 질책이 나왔다. 허은아 국민의힘 의원은 10월 11일 과방위 국감에서 “R&D 예산을 두고 과기정통부가 계속 선택과 집중을 말하고 비효율을 효율화하겠다고 하겠다 하는데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며 “개념부터 명확히 정리하고 확실한 사례를 들어서 국민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해야 한다”고 질타했다.
같은 날 야당에선 윤석열 대통령이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을 표현하기 힘든 거친 언어들로 비난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아울러 R&D 예산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대통령 말 한마디에 증액에서 감액으로 방향이 급선회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이 장관은 “그냥 회의에 참석해서 의견들을, 여러분들의 의견들을 잘 들었다”며 답변을 회피했다.
#R&D 예산 삭감 후폭풍 거세져
윤석열 정부의 R&D 예산 삭감을 두고 후폭풍이 점차 거세지고 있다. 국회예산정책처가 10월 31일 발간한 ‘2024년도 예산안 총괄 분석’ 보고서에서 R&D 예산 삭감에 대해 정면 비판했다. 보고서는 “정부의 2024년 R&D 예산 합리화는 그간 정부가 수립한 중장기적 지출 방향과 일관성이 부족하고, 불명확한 기준에 근거하여 편성된 예산안”이라며 “그간 투입된 정부의 R&D 지출 성과에 차질을 빚을 수 있으며 R&D 정책 신뢰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고 분석했다.
윤석열 정부가 불과 6개월 만에 향후 5년간 R&D 분야 재정지출 총규모를 24조 8000억 원으로 줄인 계획을 발표한 걸 한 예로 들었다. 앞서 지난 3월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심의 회의에서 의결한 ‘제1차 국가연구개발 중장기 투자전략(2023~2027)’에 따라 정부는 R&D 투자를 지속적으로 확대하되, 어려운 재정 여건과 그간의 투자 확대 추세 등을 고려해 정부 총지출의 5% 수준을 유지하며 2023년부터 2027년까지 5년간 170조 원을 투자할 계획임을 발표했다. 그런데 9월 국회에 제출된 ‘2023~2027년 국가재정운용계획’에는 R&D 분야 재정지출을 5년간 총 145조 7000억 원 규모로 축소하는 계획이 담겼다.
이어 보고서는 ‘2023~2027년 국가재정운용계획’의 12대 분야 중 R&D 분야는 유일하게 세부 분야 또는 부문별 재정투입 계획이 포함되지 않은 채 발표된 점도 지적했다. 국회예산정책처가 기재부에 관련 자료를 요청했으나, 기재부는 자료 제출을 거부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결국 2025~2027년 R&D 분야는 전체 규모만 설정됐을 뿐, 세부 분야별 규모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계획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 국회예산정책처 지적이다.
그러다보니 과학계에서도 반발하며 행동에 나서고 있다. 서울대·포스텍 등 11개 대학 총학생회는 ‘R&D 예산 삭감 대응을 위한 대학생 공동행동’을 결성하고 R&D 예산 삭감 백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대학생 공동행동은 10월 30일 성명을 통해 “예산 삭감 과정에서 연구 현장과의 소통이 없었다는 점과 면밀한 검토 없이 삭감이 이뤄졌다는 현장 증언은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과 함께 학우들의 공분을 이끌었다”며 “이번 정책 결정으로 인해 수많은 인재들이 연구와 학문을 향한 꿈을 접거나 해외로 떠나갈 준비를 시작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현직 연구원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98%가 ‘예산 삭감 바람직하지 않다’고 답변했다. 민형배 의원과 국가 과학기술 바로 세우기 과학기술계 연대회의가 10월 6일부터 9일까지 현직 연구원을 대상으로 ‘정부 R&D 예산 삭감 관련 설문조사’를 공동 실시했다. 내년도 R&D 예산 삭감의 바람직함을 묻는 질문에 ‘매우 바람직하지 않다’는 응답 비율이 91.9%, ‘바람직하지 않은 편이다’라는 응답이 6.3%였다.
#‘예산 전쟁’ 돌입
이런 가운데 여야는 11월 1일 공청회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예산 전쟁에 돌입한다. R&D 예산을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이 벌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10월 30일 민주당은 ‘R&D 예산점검 TF’를 띄우며 예산 정국 주도권을 잡겠다는 분위기다.
여당 역시 내년 총선을 앞두고 R&D 예산을 둘러싼 논란이 지속되자 증액 가능성을 시사했다. 특히 최근 당 지도부에 합류한 유의동 정책위의장이 예산안 수정에 강한 의지를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재옥 원내대표는 10월 31일 원내대책회의 이후 ‘R&D 예산 증액을 국회 심의 과정에서 고려하나’라는 질문에 “정책위의장이 과학기술인들 의견 수렴 과정을 거치고 정부 R&D 예산 편성안을 세밀하게 검토하고 있는 걸로 안다”며 “증액이 필요한 부분은 당 입장에서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10월 31일 2024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R&D 예산 삭감 기조를 고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국민의힘이 윤 대통령 결정에 반기를 들고 R&D 예산 증액 주장을 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제기된다.
국민의힘 정책위 관계자는 “윤 대통령 시정연설에서 유효적절하게 재배분하는 것으로 (정부안이) 나왔다. 당에서도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정부안대로 갈 것”이라면서도 “정부안과 다르게 국회에서 어떤 부분에 있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런 부분에 대해선 증액 요구를 할 수 있을 것이고, 정부와 합의를 봐야 할 것이다. 국회가 일방적으로 증액 요구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라고 전했다.
야권의 한 관계자는 “과학계의 경우 정치에 관심이 적고 정치색이 대체로 보수적인 성향이 많다. 그런데 윤 대통령의 이번 R&D 예산 삭감 추진에 반발하고 있다. 당장 본인들의 먹고사는 일이 달렸기 때문”이라며 “이들이 내년 총선에서 돌아서면 국민의힘으로서는 더욱 어려워진다. 하지만 윤 대통령과 대통령실이 차기 총선 공천을 주도할 것으로 보이는 만큼 다른 목소리를 내기 부담스러울 것으로 보인다”고 귀띔했다.
허일권 기자 onebook@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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