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는 청과 지는 명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조선 중심의 외교를 펼쳐갔던 고독한 광해군이 그렇게 허무하게 폐위되지만 않았어도 호란으로 한반도가 처참하게 짓밟히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친구가 드라마 ‘연인’을 권해주었다. 병자호란이 배경이란 말을 듣고 우선 든 생각은 그 시대를 소환하는 드라마를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영화 ‘남한산성’도 보기 싫었으니. 그러자 친구가 말을 자른다. 그냥 배경이야, 역사는 별 의미가 없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한반도판!
그랬다. 명을 위협한 청의 영웅들이 직접 참전한 전쟁에서 우리가 늘 지기만 하겠냐며 큰소리 땅땅 쳤던 인조는 강화도로도 도망가지 못한다. 너무나 빠른 속도로 진군하며 며칠 만에 한양 입성을 해버린 청군 때문에 강화도행 길이 막힌 것이다. 한반도를 전장으로 만들어버리고도 세상은 물론 자기 한 몸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지배층의 허세를 보고 있노라면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건 왜일까.
급히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린 인조가 남한산성에 갇힌 46일, 13세기 몽고항쟁 때도 38년이나 버틴 강화도를 하루 만에 내준 인조 정권, 그나마 우리의 자존심을 세운 광교산 전투, 의심 많은 아버지 때문에 기를 펴지 못한 소현세자와 강빈, 홍타이지, 천연두 마마, 그리고 실제로는 거의 40만~50만 명에 달했다는 심양 포로들의 생활까지. 우리가 아는 병자호란의 소재들이 잘 배치되긴 했는데, 그 모든 것이 몹시 그리워하며 치열하게 사랑한 연인의 사랑의 무대, 그리움의 무대일 뿐이었다.
열정적이지만 자기가 누구를 좋아하는지도 몰랐던 철없는 길채가 현실의 벽을 넘어 미친 듯 자기 사랑을 지켜가는 의지의 존재가 되기까지 존재한 것은 역관 이장현의 사랑이다. 이장현은 대의명분을 걸어놓고 그것이 감옥이 되어 허우적대는 그 당시 양반들과 대비된다. 그는 무엇이 소중한지를 스스로 판단하며 그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던질 줄 아는 사내다. 사랑 때문에 상처받지만 상처로 무너지지 않고 상처가 알려주는 진실의 힘으로 없는 길을 만드는 남자다. 이장현의 사랑, 길채의 독백에 애별리고(愛別離苦)를 거치고 다시 만났음직한 사랑의 환상적인 힘이 들어있다.
“‘내가 미웠던 적이 있으시오’ 하고 물으니 답하셨지요. 그대가 죽도록 미워 한참을 보았네. 헌데 아무리 보아도 미운 마음이 들지 않아 외려 내가 미웠소. 야속한 사람, 내 마음을 짐작이나 하였소. 이제 말하지만 차마 짐작치 못했습니다. 내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 부서져 님만은 나 같지 마시라 간절히 바랄 뿐.”
생의 의지가 충만해서 얌전하지도, 수동적이지도 않은 길채, 상황을 살펴 길을 찾는 길채, 그녀는 지옥을 방불케 하는 포로시장에서도, 그녀를 사가지고 간 황녀 앞에서도 결코 기죽지 않는다. 나는, 자기를 구하려다 화살을 맞은 이장현의 안부를 감히 황녀에게 따져 묻고 뺨을 맞는, 사랑의 광기를 보여주는 길채에게 반했다. 안은진이라는 배우의 매력이 가장 빛났던 장면이 아니었을까.
“이 역관은 어찌 됐어. 만약 이 역관이 죽었다면 너도 무사하지 못해, 살아선 네 년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저주하고, 죽어선 네 년 꿈마다 나타나서 저주할 거야. 그러니 이 역관은 살아있어야 해. 말해. 이 역관이 어딨는지 말해.”
길채와 이장현은 서로를 통해 배운다. 사랑은 삶에 존엄을 부여하는 생의 선물이라는 것을. 그 존엄을 아는 자에게는 거친 운명조차 그들의 배경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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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