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쇼핑몰 광고·방송 예능·정치권도 남발…사기 피의자 가볍게 소비한다는 비판도
특정 시기의 트렌드를 읽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유행어’를 찾아보는 것이다. 과거에는 텔레비전 방송이 유행어의 산실이었다. ‘개그 콘서트’가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월요일이 되면 간밤에 방송된 ‘개그 콘서트’에서 내뱉은 대사가 유행어가 돼 있었다. 그리고 그 유행어가 다양한 형식으로 차용됐다. 뉴미디어 시대인 요즘은 ‘유행어’ 대신 ‘밈’(Meme·온라인상에서 유행하는 최신 콘텐츠)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요즘은 단연 ‘전청조 밈’의 사용 빈도가 높다.
펜싱 전 국가대표 남현희(42)의 재혼 상대로 알려졌던 전청조(27)가 사기 행각을 벌이던 중 보낸 문자메시지 속에 담긴 표현이 입에서 입으로, 문자에서 문자로, 영상에서 영상으로 전파되고 있다. ‘뉴욕 출생’으로 한국어 구사가 서툴고 영어에 익숙한 척하던 그는 “I am 신뢰에요”라는 표현을 썼다. 사실 이는 접근 자체가 틀렸다. 정말 영어권 사람이라면 “나는 trust(신뢰)해요”라고 썼을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신뢰’가 어려운 단어일 테니. 결국 전청조는 부적절한 어법을 통해 ‘나는 영어 잘하는 척하고 싶은 한국인’임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다.
이런 전청조를 향한 대중의 조소와 조롱은 각종 밈으로 발현됐다. 일반 대중의 대화를 넘어, 기업 광고나 방송가에도 등장했다. 최근 몇몇 증권사들은 기업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하며 ‘I am 신뢰에요’ ‘2개 분기 연속 흑자 I am 기대해요’ 등의 제목을 달았다. 기업들도 그 분위기에 편승했다. 롯데온은 “I am 더블할인이에요”, 위메프는 “I am 특가에요…Next time은 없어요”, 카카오페이도 “I am 알뜰해요”라는 문구를 썼다. 이런 광고 문구들은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계속 화제가 되고 있다.
유행에 민감한 방송가도 이 흐름에 동참했다. 10월 29일 방송된 SBS 예능 ‘런닝맨’에서 방송인 지석진이 “나는 가수 팀으로 가는 게 맞는 것 같다”고 말하자 방송인 유재석은 “형이 가수는 아니지 않냐”고 말했다. 이에 지석진이 “나 가수야”라며 반박하자 ‘I am 가수예요’라는 자막이 삽입됐다. 또 다른 예능 프로그램인 MBC ‘전지적 참견 시점’ 역시 10월 28일 ‘Ok… 그럼 Next time에’, ‘I am 신뢰에요’라는 자막을 붙였다.
심지어 조국 전 법무부 장관도 참여해 논란을 키웠다. 그는 1월 2일 자신의 SNS에 게시물을 올리며 “I am 신뢰. I am 공정. I am 상식. I am 법치. I am 정의. 누가 떠오르나요?”라고 썼다.
이런 밈 현상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현재까지 분위기로는 부정적 반응이 우세한 편이다. 왜일까. 전청조가 사기 사건의 피의자이기 때문이다. 이미 20명에 가까운 이들이 20억 원이 넘는 피해를 입은 것으로 집계됐고, 향후 피해 규모는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즉 ‘I am 신뢰에요’는 범법자가 사칭한 자신의 신분을 공고히 하기 위해 쓴 화법이다. 이를 이토록 가볍게 소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다.
반면 “웃자고 한 일에 죽자고 달려드는 것”이라는 반박도 있다. 사회적 이슈가 된 사건을 현대인들이 소비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너무 정색하면서 반응하는 것이 사태를 키운다는 타박도 있다.
하지만 전청조 밈의 무분별한 사용에 대한 지적을 단순한 도덕률로 치부할 순 없다. 전청조에 대한 희화화가 이번 사건의 본질을 흐리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논란은 명백하게 피해자가 발생한 대규모 사기 사건이다. 피해 복구가 되지 않으면 생계를 위협받을 수 있는 이들도 적잖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청조라는 인물을 가볍게 소비하며 그의 말투를 따르는 것은 피해자들에 대한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
이에 개그우먼 엄지윤은 10월 30일 ‘I am 엄청조’(나는 엄청조)란 글과 함께 한 장의 사진을 게시했다가 삭제했다. 사진 속 엄지윤의 모습은 전청조가 재벌 3세임을 강조하기 위해 경호원을 배경에 두고 찍은 사진과 판박이였다. 이후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게시물을 내렸다. 또한 ‘충주시 홍보맨’으로 유명한 김선태 주무관이 전청조를 패러디한 영상을 게재한 것에 대한 누리꾼의 찬반 의견도 분분했다.
최근 유행하는 밈은 정치·사회를 향한 풍자나 해학과는 다르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풍자나 해학은 부조리한 사건에 대해 일침을 놓으며 교훈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반면, 밈은 주로 ‘재미’에 초점을 맞춘다. 이에 대한 바람직한 가치 판단이 결여됐다는 뜻이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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