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희는 전향 후 신앙 생활을 하며 안기부의 권유에 따라 수기를 썼다. 사진은 95년 4월 24일 <일요신문>과 만난 김현희.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나는 그들의 질문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만약에 김현희가 조작된 여자라면 나는 무엇인가? 나는 바레인까지 가서 그녀를 압송해 왔고, 일본인인 체 위장을 한 그녀를 조사하고 감시하는 일에 참여했다. 압송할 때부터 자그마치 그녀와 6년을 함께 지냈다. 그녀가 조작된 테러범이라면 나도 조작에 참여했다는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소위 안기부가 현장 수사관들조차 모르게 감쪽같이 조작했다는 말인가. 나는 김현희가 아무리 위장에 능하다고 하더라도 6년 동안이나 자신의 정체를 안기부 현장 수사관인 우리들에게 속일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조작설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다.
김현희의 KAL기 폭파사건은 워낙 큰 사건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어 있었다. 그 사건을 안기부에서 조작했다면 누군가는 양심선언을 할 수도 있는데 그런 사람이 전혀 없었다.
조작설이 제기되었을 때 김현희는 침묵하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이러한 조작설이 일어나는 것을 처음에는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조작설이 가라앉지 않자 화를 내기 시작했다. 각 방송사가 다투어 김현희 특집을 다루었고 MBC <PD수첩> 은 그녀가 만나는 것을 거절하자 집으로 들이닥치기까지 했다. 김현희의 집은 북한이나 다른 사람들의 테러 위험성이 있어서 절대 보안에 부쳐야 했다. 안기부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비밀을 생명처럼 생각한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절대로 이름을 공개하지 않고 무엇을 하는지 가족들에게 말하지 않는다.
안기부 직원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나 임무를 가족들에게도 비밀로 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도 공개하지 않는다. 김현희에 대해서 나나 우리 수사관 누구도 그녀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공개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고 조작설이 일어나서면서 누군가 그녀의 주소를 MBC <PD수첩> 측에 가르쳐 준 것이 분명했다.
‘김현희의 주소는 극비여야 하는데 어떻게 공개한다는 말인가?’
나는 김현희의 주소를 공개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김현희는 <PD수첩>이 들이닥친 뒤 아이를 안고 달아났다. 그날 이후 김현희는 공포에 질려서 숨어 다녔다. 그녀는 북한에서 귀순한 이한영이 집 앞에서 괴한에게 피살되었기 때문에 더욱 공포를 느낀 것 같았다. <PD수첩>에 집 주소가 공개되면 북한 공작원에게도 공개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그러한 방송을 보면서 아쉬웠다. 김현희가 전면에 등장하여 조작설에 반박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자 반박하지 못하는 김현희 입장이 이해되기도 했다.
김현희는 한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다. 자식도 낳았고 시댁도 있다. 자신보다 그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기 위해 조용히 살고 싶어 그럴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김현희가 살아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김현희를 사면시킨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적어도 불길처럼 번져 가는 조작설에 대해서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현희는 이 이야기가 연재되기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비로소 모 케이블방송에 출연해 조작설에 대해서 맹렬하게 비난했다. 그녀의 집에 강제로 침입했던 방송국 사람들이 그녀를 협박했던 이야기까지 공개했다. 그 사실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김현희 사건을 재조사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총선거, 올림픽, 대통령선거 등이 이어지면서 곧 잊히고 말았다.
‘정치인들은 정말 한심하구나.’
나는 김현희 사건이 다시 잊히자 어이없었다.
김현희는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다. 안기부에서는 그와 같은 일을 반대하지 않았다. 전향한 공작원들에게 수사관들이 일차적으로 권하는 일이 종교를 갖게 하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신을 부정하고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한 까닭에 전향한 사람들에게 종교를 갖게 하여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게 하고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와 대립하게 한다.
김현희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녀를 안기부에서 평생 동안 보호하고 감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김현희가 사면 받은 후 가끔 안가에서 수사관들이 모여 앞으로 김현희가 어떻게 사는 게 좋을지에 대해 대화를 나눈 일이 있었다.
“김현희도 결혼을 해야 하지 않을까?”
“김현희가 결혼하려고 해도 늘 신변의 위험이 있을까 걱정을 해야 할 텐데 어느 남자가 결혼하려고 하겠어? 결혼은 힘들고 그냥 혼자 사는 게 나을걸.”
“그래도 김현희가 결혼해야 안기부나 경찰의 보호를 벗어나지. 결혼 안하면 평생 보호 속에서 살아야 하잖아?”
“결혼해서 자식 낳으면 그 자식들이 살인범, 폭파범의 자식 소리 들으며 살아야 하는데 그 업보를 자식에게까지 이어주면 좋겠어?”
안기부 수사관들은 김현희의 결혼에 부정적이었다. 누가 생각해도 세계적인 테러리스트가 결혼을 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중이나 수녀가 되어 혼자 조용히 사는 게 좋겠네. 그렇지만 이미 개신교를 믿고 있으니 그냥 종교에 의지해서 혼자 살면서 강연이나 다니든가 대북방송을 하면서 사는 게 나을걸.”
수사관들은 김현희가 혼자 사는 게 낫다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누구도 쉽사리 그녀에게 혼자 살라고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김현희는 자신의 결혼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남한에 와서 사람들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결혼생활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동경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곱상하게 생긴 남자보다 듬직하게 생긴 남자가 좋아요. 계집애처럼 생긴 것보다 듬직한 것이 좋지 않아요?”
김현희는 TV에 남자 연예인이 나오면 비교하면서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김현희의 남자에 대한 생각은 북한 여성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이었다. 나중에 탈북자 출신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녀들도 잘생긴 남자보다 듬직한 남자를 신랑감으로 선호하고 있었다.
“북한에 있을 때 동네에 살던 할머니가 내 손금을 보고는 ‘너는 신랑이 여기에 없고 외국에 있다’고 했는데 내가 남한에 왔으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네. 그렇지 않아요? 내가 북한 사람과 결혼할 수는 없을 거 아니에요?”
김현희가 웃으며 말한 일도 있었다.
“결혼하고 싶어?”
“내가 무슨 결혼을 해요?”
“북한에 있었으면 결혼했을 거 아니야?”
“그야 그랬겠지요. 만약 이번 폭파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북한으로 돌아갔으면 당에서 소개시켜주는 사람과 결혼했을 거예요.”
“또 공작에 동원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았을 거예요. 평양을 출발하기 전 담당 최 과장이 이번 과업이 끝나면 김 선생과 김현희는 비밀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다시는 공작원으로 쓸 수 없다고 했어요.”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김승일은 KAL기 폭파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가면 북한에서 최대의 영예인 인민영웅 칭호를 받게 되었을 것이고 나는 남성공작원과 결혼했을 거예요.”
“왜 하필 남성공작원과 결혼을 해?”
“언니는 그것도 몰라요? 북한은 비밀보장을 위해 집으로는 안 보내고 다른 남자 공작원과 결혼시켜 초대소에 두었을 거예요.”
나는 김현희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공작원들은 임무를 완수한 뒤에도 감시를 받는다. 공작원이나 스파이나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한다고 해도 마지막은 화려하지가 않다. 그런 일은 영화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찾아볼 수 있었다.
김현희의 수기는 2권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었고 제목은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였다. 그 책은 나오자마자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판매를 시작한 지 불과 열흘 만에 7만 부가 팔렸고 1년도 되지 않아 100만 부가 넘게 팔렸다. 아울러 일본에서도 출간되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독자들로부터 편지가 쇄도했다.
김현희의 책이 이렇게 돌풍을 일으킨 것은 그녀의 미모도 일정 부분 작용했으나 그동안 여성 공작원이 쓴 수기가 없었던 탓이다. 독자들은 그녀의 수기를 통해 북한의 실정을 알게 되었고 젊은 나이에 테러리스트가 되어 사형을 선고 받은 그녀에게 많은 안타까움을 느낀 것이다.
“감명 깊게 책을 읽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학생들이 보낸 편지는 대개 비슷하고 가장 많았다. 그러나 성인 남자들이 보낸 편지도 적지 않았다. 그 중에는 무얼 하는 남자인지는 모르겠으나 진지하게 결혼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보다 김현희가 더 낫네.”
우리는 김현희에게 편지가 쇄도하는 것을 보고 웃었다. 편지는 각양각색으로 왔다. 김현희를 점잖게 꾸짖는 것도 있었고,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김현희에게 충고를 하는 편지도 있었다. 약간 정신이 이상한 듯 자신의 입던 겉옷, 속옷 등을 소포로 보낸 남자도 있었다.
“이 사람은 정신이 나갔구먼. 뭐 이런 사람이 있어?”
김현희는 화를 내면서 이맛살을 찌푸렸다. 또 안기부의 아는 사람을 통해 김현희를 사귀고 싶다는 뜻을 전해 온 사람도 있었다. 그는 사회적으로 꽤 성공한 인텔리 남자였다.
“참 한국 남자들 이해 못할 사람들 많네.”
“얼굴 예쁘면 다 용서된다는 말이 맞나봐.”
수사관들은 김현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가지고 한담을 나누고는 했다.
정리=이수광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