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하자면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은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공손하고 겸손하고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인 건지, 아니면 나이가 어린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선배들에겐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건지 참 많이 혼란스럽다.
2005년 나는 영화 ‘미녀는 괴로워’를 제작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영화 ‘미녀는 괴로워’는 일본만화 원작으로 뚱뚱하고 못생긴 여성이 전신 성형을 해서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 하는 내용을 담은 영화다. 당시 대한민국 특수분장의 현실은 50킬로그램의 여성을 100킬로그램에 가깝게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어려웠다. 불가피하게 미국 특수분장팀을 초빙해서 제작에 착수했다.
어렵게 모셔온(?) 특수분장팀이라 지극정성으로 그들을 대했다. 어느 날 촬영을 마치고 스태프들과 식사를 겸한 술자리에서 후배들은 내가 따라주는 술을 고개를 돌려서 마시고 또 다른 스태프는 나에게 “대표님 담배 한 대만 피겠습니다”라고 양해를 구했다. 난 당연히 편한 대로 하라고 했고 그리고 항상 술자리에서는 후배들에게 제발 고개 돌리지 말고 그냥 편하게 마시라고 권했다.
그 모습을 본 미국에서 온 특수분장팀 중 한 명은 나에게 “왜 사람들이 담배를 피는데 당신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냐? 그리고 술 마시면서 당신 앞에선 왜 술잔을 돌려서 마시냐?”라면서 의문을 표했다. 난 그 미국 스태프에게 “나도 이런 관행이 언제 어떤 연유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나 그저 한국에선 나이 어린 사람이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과 술자리를 같이 하거나 담배를 피우게 될 때 표하는 예의 같은 것”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내 말을 들은 미국 스태프는 나에게 “난 항상 사람들이 당신에게 담배를 피워도 되느냐고 물어보고 술잔을 돌려서 마시는 걸 보곤 당신을 굉장히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사람으로 오해했다”면서 “그래서 나는 참 당신이 나쁜 사람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둘이 함께 껄껄 웃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어린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에게 담배를 피울 때나, 술을 마실 때 행하는 우리의 이런 관행이 꼭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진정한 예의이고 존중의 의미인지는 동의하기 어렵다.
촬영이 끝나고 현장을 정리하던 어느 날 미국에서 온 스태프가 조명팀과 장비팀을 도우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조명기구를 날라주고 무게가 꽤 나가는 장비를 번쩍 번쩍 들면서 미국에서 온 두 친구가 열심히 다른 스태프들을 돕고 있었다.
정리가 끝나고 난 미국에서 온 두 친구와 맥주를 마시면서 “오늘 너희가 너희 일도 아닌데 우리 조명팀을 도와주는 게 제작자로서는 참으로 고맙게 느껴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요즘 영화 현장에서는 아무리 제작자라고 해도 스태프들에게 자신들의 직능에 맞지 않는 일을 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기에 항상 무거운 장비를 옮겨야 하는 팀들에겐 미안한 감이 있었는데 오늘 너희들이 자발적으로 도와주니 내가 보기에 참 좋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미국 스태프는 “우리는 한 팀 아니냐”고 되물었다. 미국 스태프는 “서로 힘을 모으고 도와야 한다”면서 “그리고 조명감독은 나보다 열 살도 더 많은데 그 친구가 저리 열심히 하니 나이도 어린 우리가 어찌 보고만 있겠냐”고 했다. 그는 기분 좋게 맥주를 마셨다.
미국에서 온 특수분장팀은 나에게도 감독에게도 누구에게도 이름을 불렀다. 모든 스태프가 다 나를 원 대표님이라고 부르지 아무도 내 이름을 부르진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내 이름 동연의 영어 이니셜인 ‘DY’라고 부른다.
그들이 나를 DY라고 부를 때 처음엔 어색했으나 시간이 지나자 전혀 어색하지 않고 나도 그들을 이름으로 편하게 부르게 되었다. 그들은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이름을 불렀고, 그들도 이름으로 불리었다. 어느 날 그들이 나에게 찾아와서는 매우 심각하게 말했다.
“배우에게 실리콘을 덧입혀서 뚱뚱한 분장을 하는데 지금 너의 영화 현장은 권장촬영시간을 초과하고 있다. 이렇게 계속 진행하면 우린 작업에 임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치는 것보다 우리의 작업으로 배우에게나 그 누구에게 피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작품의 성공보다 우리 작업의 완성도, 안전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들은 나이나 지위에 관계없이 자신들의 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진정 프로들이었다. 그 말은 지금도 내가 작업에 임할 때마다 새기는 말이 되었다. 내 작품의 상업적 성공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내 작업에 임하는 모든 이들의 안전과 행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나보다 20년이나 어린 친구들이 일깨워 줬다.
예의를 지키지 말자는 게 아니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공손하지 말자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우리는 나이를 따지며 어린 놈, 건방진 놈, 싸가지 없는 놈을 운운할 것인가. 지금 2023년이고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선진국이다. 그렇다면 작금의 정치인들이 세계 10위권인가. 참으로 안타깝다.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원동연 영화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