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시장 개입하면 차후 제품 가격 한꺼번에 오를 수도…“원부자재 가격 안정화에 더 힘써야”
슈링크플레이션은 ‘줄어들다’라는 슈링크(Shrink)와 ‘지속적인 물가 상승’을 의미하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을 합친 말이다. 기업들이 제품 가격은 그대로 두고, 용량을 줄여 간접적 가격 인상 효과를 거두는 것이다. 최근 식품업계에서는 슈링크플레이션 현상이 잇달아 발생해 논란이 됐다. 풀무원의 핫도그, 동원F&B의 양반김, 해태제과의 고향만두 등이 대표적이다. 동원F&B는 지난 9월부터 ‘양반김’ 중량을 10% 줄였고, 풀무원은 지난 3월 핫도그 제품 가격은 그대로 두되 개수를 5개에서 4개로 줄였다. 해태제과도 고향만두 용량을 기존 415g에서 378g으로 줄였다. 해당 기업들은 원부자재 가격 부담 탓에 이러한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정부 관계자들은 슈링크플레이션을 지적하기도 했다. 추경호 기획재정부 장관은 “가격은 놔둔 채 중량을 줄여 소비자 불신을 자초하는 꼼수 가격 인상은 기업의 정직한 경영이 아니다”라며 “가격뿐 아니라 중량이나 성분 함량 표시 등이 정확하지 않으면 현행 법규에 따라 엄정하게 제재받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병환 기획재정부 1차관도 “용량 축소 등을 통한 편법 인상, 이른바 슈링크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많다”고 질타했다.
정부는 주요 생필품 슈링크플레이션 실태조사에 착수하고 신고센터를 설치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섰다. 공정거래위원회 산하 준정부기관인 한국소비자원은 슈링크플레이션 관련 73개 품목(209개 가공식품)에 대해 11월 말까지 조사를 진행하고, 12월 초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또 조사대상 포함되지 않은 품목의 용량 조정 등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11월 23일부터 한국소비자원 홈페이지에 슈링크플레이션 신고센터를 설치해 대국민 제보를 접수한다. 이 밖에도 소비자원을 중심으로 사업자와 자율협약 체결을 추진해 단위가격, 용량, 규격 등이 변경될 시 사업자가 스스로 소비자에게 정확하게 정보를 제공하도록 유도할 계획이다.
하지만 정부의 이러한 방침이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원가가 올랐을 때 이윤을 내야 하는 기업은 간접적으로나마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는데 정부 제재 당장 가격을 올리지 못하면 나중에 큰 폭으로 가격을 올릴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에서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가 계속 시장에 개입하려면 할수록 당장은 제품 가격이 오르지 않더라도 나중에 한꺼번에 오를 가능성이 높다”며 “정부 제재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소비자들에게도 이익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유시장 경제 체제 하에서는 정부가 기업에 가격압박이나 통제를 영원히 할 수 없다. 당장 정부가 슈링크플레이션 현상에 대해 제재를 한다고 해도 나중에 가격 통제를 풀 때 제재 당시 이윤이 감소한 기업은 못 올린 가격까지 포함해 더 크게 가격 조정을 할 가능성이 크다. 정부가 가격 설정에 개입해서 물가안정에 성공한 사례도 없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물가를 잡기 위해 ‘MB물가지수’를 도입해 52개 품목에 대해 가격을 통제했지만 정책 시행 3년 후 MB물가지수는 20.42%나 올라 같은 기간 12%인 소비자 물가 상승률을 훨씬 앞질렀다.
슈링크플레이션은 법적으로 문제도 없고, 원자재 비용 상승에 따른 기업의 이윤 추구 방식이기 때문에 제재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있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원부자재 비용 등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니까 상승분을 반영해서 가격을 올려야 하는데, 제품에 따라서 가격이 올라갔을 때 수요가 더 크게 감소해서 이윤이 줄어드는 제품도 있다”며 “그런 제품의 경우 가격을 올리는 것보다 슈링크플레이션이나 스킴플레이션을 이용해 대응하는 것이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더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물가 관리를 위해 배추·사과·달걀·쌀 등 농축산물 14개 품목, 햄버거·피자·치킨 등 외식 메뉴 5개 품목, 우유·빵·라면·아이스크림 등 가공식품 9개 품목 등의 가격을 매일 확인하기로 했다. 원부자재 가격, 인건비, 에너지 가격 등이 지속적으로 상승해 기업은 해당 상승분을 가격에 반영해야 하는데 현재 정부의 가격통제로 가격을 쉽사리 올리지 못하니 기업들은 슈링크플레이션 방식을 이용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유통업계 한 관계자는 “고물가 상황에서 제품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 값이 올라가고 있어 이익을 내야 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이를 가격에 반영해야하는데 그러지 못해 슈링크플레이션 같은 현상이 발생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식품업계 한 관계자는 “식품의 경우 원부자재가 차지하는 비중이 70~80%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며 “원자재 가격이 외부 환경 등으로 인해 오르면 가격 인상을 위한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고, 슈링크플레이션도 그 조치 중 하나”라고 말했다.
현행법상으로는 제품의 원료, 용량 등만 표시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소비자의 알권리를 위해 용량 등의 변화를 표시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는 “가격 설정은 기업의 고유권한이 맞지만 소비자의 알권리도 중요하다”며 “소비자가 항상 이용하던 제품을 구매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용량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분명 불편함을 느낄 것이고, 이는 곧 기업의 신뢰도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제재 의지가 나오자 한편에서는 슈링크플레이션 외에 제품 가격이나 용량은 유지하고 값싼 재료를 써서 비용을 줄이는 스킴플레이션이나 대용량 묶음 제품의 개당 가격을 낱개 제품보다 더 비싸게 파는 번들플레이션도 등장했다. 롯데칠성음료의 ‘델몬트 오렌지 주스’는 오렌지 과즙 함량을 100%에서 80%로 줄였다. 치킨 프랜차이즈 제너시스BBQ는 100%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을 튀김기름으로 사용하다가 최근 올리브‧해바라기유 50% 블랜딩 오일을 사용한다고 밝힌 바 있다. 슈링크플레이션을 제재해도 각종 인플레이션으로 기업들이 가격인상을 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고, 용량이 아닌 질적으로 값싼 재료를 이용하는 제품에 대해서는 제재를 하기도 쉽지 않다. 슈링크플레이션 대응 관련 부처인 공정거래위원회 소비자정책국 소비자정책총괄과는 “일단은 슈링크플레이션에 대해서만 조사를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가격 인상의 근본적인 원인인 원부자재 가격 안정화와 통화 정책의 안정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용구 숙명여대 교수는 “정부가 개별 상품 가격까지 통제하려 하는 것은 월권 행위긴 하다”며 “슈링크플레이션 제재보다 원자재 가격을 안정화시켜서 원재료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고 개별 상품 가격은 경쟁 시장에서 기업이 알아서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석병훈 교수는 “기준금리를 올려서 대출금리와 예금금리가 올라야 소비 지출이 줄어들어 물가가 잡힌다”며 “물가 안정은 결국 한국은행에서 기준금리를 인상해 물가를 안정시켜야 하고, 그러려면 통화정책의 메커니즘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슈링크플레이션을 제도를 정해서 대응을 할 것인지, 다른 인플레이션 현상들에 대한 대응을 어떻게 할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실태조사 이후 관련 부처와 더 논의를 해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11월 말까지 슈링크플레이션에 대한 실태조사가 이뤄질 예정이며, 그 결과를 보고 추후 대응들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민주 기자 lij9073@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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