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쟈니스가 명단에서 사라진 이유
2023년 홍백가합전의 테마는 ‘보더리스’로 알려졌다. 국경과 언어, 세대, 그리고 현실과 인터넷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채로운 활약을 펼친 출연자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NHK의 야마나 히로오 미디어 총국장은 “올해 활약도와 여론의 지지, 그리고 프로그램의 기획 및 연출에 부합되는가를 선정 기준으로 삼았다”고 전했다.
창업자의 성착취 사실이 드러난 일본의 유명 연예기획사 ‘쟈니스’ 소속 연예인은 단 한 명도 초대받지 못했다. 쟈니스 소속이 출연하지 않는 것은 1979년 이후 44년 만이다. 지난 3월 영국 BBC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일본 ‘아이돌 왕국’을 건설했다는 평가를 받는 ‘쟈니스 사무소’ 전 대표, 고(故) 쟈니 기타가와가 생전 10대 소년들을 성적으로 학대했다”고 폭로했다. 데뷔를 미끼로 이른바 연습생이라 불리는 10대 소년들을 성추행하고, 성적 학대를 이어왔다는 것. 일본 방송계가 쟈니스의 보복이 두려워 기타가와의 만행을 눈감아준 정황도 밝혀졌다.
변호사 기타무라 하루오는 ‘쟈니의 최대 공범자는 일본 언론’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다. 그는 “일본 방송사가 돈과 직결되는 시청률 때문에 다수의 소년에게 성적 학대를 가한 이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요지의 주장을 폈다. “특히 공영방송 NHK는 프로그램 스폰서에 의지할 필요가 없는 만큼 도의적 책임이 크다”는 지적이다. 일간 겐다이에 따르면 “쟈니스의 입김으로 매년 소속 연예인 5~6팀이 홍백가합전에 출연했다”고 한다. 작년 홍백가합전의 경우 ‘스페셜 내비게이터’를 맡은 사쿠라이 쇼 이외에도 6팀이 쟈니스였다.
#K팝을 향한 극과 극 시선
올해 출연자 명단을 보면, 쟈니스 소속 연예인이 제외된 대신 K팝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르세라핌, 세븐틴, 스트레이키즈 등 K팝 관련 그룹은 총 6팀으로 역대 최다 출연을 기록하게 됐다. 5인조 여성그룹 르세라핌은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출전이며, 8인조 남성그룹 스트레이키즈와 13인조 남성그룹 세븐틴, 트와이스 일본인 멤버 3인조 유닛 미사모는 첫 출전이다. JYP엔터테인먼트 소속으로 멤버 전원이 일본인으로 구성된 여성그룹 니쥬가 네 번째, 한일 공동제작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101 재팬’을 통해 탄생한 남성그룹 JO1은 두 번째 출전이다.
일각에서는 “일본 ‘국민 프로그램’ 격인 홍백가합전이 지나치게 K팝에 의존하는 게 아니냐”는 반발도 없진 않다. 이집트 출신 탤런트이자 극우 성향으로 알려진 피피는 자신의 엑스(X·옛 트위터)에 “한류 팬을 끌어들이지 않으면 시청률이 더 추락할 것이라는 현실적 판단이 작용했다”고 분석한 기사를 인용한 후 “K팝 그룹이 역대 최다 출연하는 배경을 한국 언론들이 마음대로 분석하고 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일본인으로부터 수신료를 받아놓고 일본인은 뒷전, 한류를 고집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했다.
관련 글에는 “수신료를 강제 징수하고 있는 NHK가 외국 그룹을 홍보하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 수신료를 해지해달라” “출연자 명단에 처음 듣는 알파벳 그룹들이 주르륵이다. 홍백이 고령자 시청자까지 놓칠 것 같다” 등의 인용답글이 달렸다.
그러나 “한류 열풍이 거센데 K팝 스타들이 빠지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목소리도 작지 않다. 한 음악인은 “젊은 층의 관심을 잡으려는 홍백가합전의 시도”라고 추측하며 “일례로 세븐틴은 일본 젊은이들에게 굉장히 인기가 높아 백팀(남성팀)으로 선정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대중문화 연구자 가키타니 고이치는 “오랜 세월 홍백가합전을 수놓은 쟈니스 아이돌은 없지만, 국경을 초월해 스트레이키즈와 세븐틴이 즐겁게 해줄 것 같다”며 “인기와 실력 모두 더할 나위 없는 스타로 눈을 뗄 수 없다”고 반겼다.
#한일관계 따라 출연진도 달라져
일본 언론에서는 “최근 한일 관계 개선이 영향을 미쳤다”라는 분석도 나온다.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호감도 변화는 여론조사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일본 비영리단체 언론 NPO와 한국 동아시아연구원(EAI)이 2023년 8~9월 실시한 한일 공동여론조사를 발표했다. 그 결과 “한국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지니고 있다”고 응답한 일본인 비율은 지난해 40.3%였으나 올해 32.8%로 떨어졌다.
반면 “좋은 인상을 지니고 있다”는 30.4%에서 37.4%로 상승했다. 11년째 계속된 이 조사에서 처음으로 “좋다”가 “좋지 않다”를 앞질렀다고 한다. 한국에 좋은 인상을 갖는 이유를 복수응답으로 물었더니 “K팝이나 드라마 등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아서(47.1%)”, “한국 음식문화나 쇼핑이 매력적이어서(34.2%)”를 가장 많이 꼽았다.
“한일 관계가 홍백가합전 출연자 선정에 영향을 미친다”라는 지적은 그동안 종종 제기됐다. 2011년 카라, 소녀시대, 동방신기가 홍백가합전에 출전했지만, 2012년에는 세 팀 모두 출연진 명단에서 빠졌다.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일왕 사죄 요구 발언으로 한일 관계가 급격히 얼어붙은 바 있다. 2018년에도 방탄소년단(BTS)의 출전이 내정됐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결국 불발됐다.
한때 8000만 동시 시청 ‘홍백’ 세월이 무상하네…
홍백가합전은 1951년 시작됐다. 역대 최고 시청률은 81.4%로 1963년에 기록, 무려 8000만 명의 일본인이 시청했다. 이후 숫자가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1989년 전후반으로 나눈 2부제를 채택했지만, 오히려 시청률 하락은 가속화됐다. 작년에는 전반 31.2%, 후반 35.3%를 기록했다. “올해는 30%마저도 위험한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일찌감치 나왔으며 “이제 홍백을 살리려면 매년 소문만 무성한 마쓰다 세이코와 나카모리 아키나의 공동 출연밖에 없다”는 의견도 보인다.
특히 올해는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전체 7경기가 40%를 넘었다. 아울러 대회 관련 이야기를 전한 TV 아사히의 ‘새터데이 스테이션’이 38.2%, ‘선데이 스테이션’이 34.0%, ‘보도스테이션’이 43.6%를 기록했다. 이것만으로도 연간 시청률 베스트 10이 채워지게 된다. 홍백가합전으로서는 상당히 어려운 상황임이 분명하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