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8월 한반도미래인구연구원에서 실시한 조사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국의 만 15~59세 남녀 2300명을 대상으로 결혼⸳출산과 관련해 설문조사를 한 결과 20~39세 미혼 청년 10명 중 4명은 결혼할 의향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미혼남성의 비혼 응답률은 36.4%, 미혼여성은 50.2%로 성별에 따라 13.8%p의 격차를 보였다.
#결혼을 하느냐 못 하느냐, 그것이 문제
현실의 청춘 남녀가 이처럼 연애도 결혼도 외면하고 있는 것과 달리 발레 작품 속 청춘 남녀에게는 인생에서 연애와 결혼만큼 중요한 일도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연애담은 이야기의 왕좌를 차지해왔지만 발레 속 연애담은 반드시 결혼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구조가 상당히 단순하고 플롯 또한 좀 더 경직된 편이다.
낭만발레와 고전발레 시대를 거치며 오늘날까지 레퍼토리로 살아남은 작품들은 거의 대부분 ‘결혼각본’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작품의 분류는 의외로 간단하다. 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지 못해 파국을 맞이하는 비극과 우여곡절 끝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에 성공하는 희극, 이 두 가지로 나뉜다. 햄릿 스타일로 말해본다면 ‘결혼을 하느냐 못 하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인 것이다.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과 이들의 결혼을 반대하는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있다. 아버지 혹은 어머니는 딸을 마을의 부자와 결혼시키려 하지만 마음을 돌려 두 연인의 결혼을 허락한다. 마침내 결혼할 수 있게 된 연인들을 축하하며 잔치가 벌어진다…. 발레 ‘돈키호테’와 ‘고집쟁이 딸’은 인물들의 이름을 지우고 보면 동일한 작품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유사한 줄거리를 지니고 있다.
왕자와 공주, 마법과 정령이 단골로 등장하는 발레의 초현실적 세계에서 벗어나 스페인의 열정 가득한 바르셀로나 광장과 프랑스의 활기 넘치는 농가를 배경으로 젊은 연인들의 결혼을 둘러싼 유쾌한 소동극을 보여주는 두 편의 발레가 한 달여의 시차를 두고 차례로 공연되었다. 유니버설발레단은 10월 6일부터 8일까지 ‘돈키호테’를, 국립발레단은 11월 8일부터 12일까지 ‘고집쟁이 딸’을 선보였다. 비극이 우세한 발레 무대에서 오랜만에 희극 두 편을 나란히 비교하며 감상할 수 있게 된 관객들의 얼굴에도 웃음이 넘쳤다.
#주객전도? 조연이 된 돈키호테
소설 ‘돈키호테’는 주인공 돈키호테가 종자인 산초 판자를 데리고 여러 지방을 편력하며 겪은 이야기들을 옴니버스처럼 엮은 버디물 형식을 띠고 있으며, 전편과 후편을 합쳐 총 126개의 에피소드가 실려 있는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이 가운데 발레 ‘돈키호테’는 2부의 ‘부자 카마초의 결혼식과 불쌍한 바실리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하여’와 ‘카마초의 결혼식이 계속되며 다른 재미있는 일들이 다루어지다’에서 다뤄진 키트리(원작명 키테리아)와 바질(원작명 바실리오)의 결혼을 기둥 줄거리로 삼고 있다.
주인공 키트리는 이발사 바질과 연인 사이로 둘은 결혼을 원하지만 키트리의 아버지 로렌조는 가난한 바질이 탐탁지 않아 딸을 부자 가마슈(원작명 카마초)와 결혼시키려 한다. 바질은 키트리와 결혼하기 위해 거짓으로 자살 소동을 벌이고, 마침 마을을 지나던 돈키호테가 두 연인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결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발레 ‘돈키호테’는 키트리와 바질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면서 원작의 주인공인 돈키호테가 조연으로 밀려나고, 원작에서 가장 유명한 풍차 에피소드나 이상의 여인 둘시네아 같은, 정작 돈키호테와 관련된 이야기는 양념처럼 덧붙여지며 주객전도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객전도의 문제는 키트리와 둘시네아가 1인 2역으로 설정됨으로써 해결된다.
바르셀로나의 한 마을을 방문한 돈키호테는 여관집 딸 키트리가 자신이 연모하는 대상인 둘시네아와 똑같이 생긴 데 놀라며 춤을 청한다.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할 위기에 처한 키트리의 안타까운 사연에 관심을 갖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그리고 이 같은 설정은 2막의 하이라이트인 돈키호테의 꿈속 장면(Dream Scene)에서 키트리는 둘시네아가 되어 숲의 요정들과 함께 춤을 추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꿈에서 깨어난 돈키호테는 키트리와 바질을 도와 로렌조에게서 결혼 허락을 받아내고, 둘의 결혼을 축복하며 다시 편력 길에 오른다. 안무가 프티파는 스페인에서 무용수로 활동했던 경험을 살려 스페인의 춤과 음악, 문화를 바탕으로 이 작품을 만들었는데, 고전발레의 형식미 안에서 스페인 민속춤과 클래식 발레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민중발레, 노동하는 무용수들
1869년 초연된 ‘돈키호테’보다 80여 년 앞서 만들어진 ‘고집쟁이 딸’은 현존하는 전막 발레 중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꼽힌다. 1789년 안무가 장 도베르발은 로코코 시대 화가 보두엥의 그림 ‘어머니에게 꾸중 듣는 소녀’를 보고 작품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 그림에는 허름한 헛간을 배경으로 잔뜩 화가 난 표정을 짓고 있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느라 주눅이 든 딸, 두 사람 뒤로 도망치는 남자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다. 도베르발은 이 그림에서 착안해 어머니에게 비밀 연애를 들킨 딸 리즈와 그 연인 콜라스라는 발레의 주인공들을 창조해냈다.
남편 없이 홀로 딸을 키우는 과부인 지주 시몬은 외동딸 리즈를 부유한 포도밭 주인의 아들 알랭과 결혼시키려 한다. 하지만 리즈는 농부 콜라스와 비밀 연애를 하며 결혼할 꿈에 부풀어 있다. 시몬은 리즈와 콜라스 사이를 의심하며 알랭과의 결혼을 서두르지만 결혼 계약을 맺는 날 리즈가 침실에서 콜라스와 함께 있는 것이 들통나며 계약은 무효가 된다. 시몬은 마침내 리즈와 콜라스의 사랑을 허락하고, 마을 사람들 모두 기뻐하며 두 사람을 축복한다.
그러나 도베르발의 원 안무는 소실되어 현재 남아 있지 않고 국립발레단은 영국 로열발레단 예술감독을 지낸 프레데릭 애쉬튼이 안무한 버전을 레퍼토리로 공연하고 있다. ‘돈키호테’가 고전발레의 엄격한 형식을 따르며 키트리와 바질의 결혼식 그랑파드되로 대미를 장식하고 있는 것과 달리 낭만발레 이전 작품인 ‘고집쟁이 딸’은 형식에 있어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그랑파드되나 디베르티스망은 없지만 1막에서 리즈와 콜라스가 추는 리본 파드되, 일명 ‘파니 엘슬러 파드되’와 1막 후반부 마을 축제에서 군무진이 추는 리본춤 등에서 리본은 두 주인공의 사랑을 은유하고 춤의 스펙터클을 더해주며 작품의 시그니처 역할을 하고, 시몬 역의 남자 무용수가 추는 나막신 춤은 애쉬튼 버전을 상징하는 명장면으로 인기가 높다.
또한 ‘고집쟁이 딸’에는 버터를 젓고, 물레로 실을 잣고, 곡식을 수확하는 등 당대 농가에서 행해지던 노동이 마임으로 다수 삽입되어 있다. 공연이 초연된 것은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불과 2주 전으로, 이는 농민과 노동자 계급이 빠르게 부상하고 있던 당대 현실이 무대에도 반영된, 민중발레의 귀중한 단편이다.
윤단우는 주로 사람과 사랑과 삶에 관한 생각의 편린들에 대한 글을 쓰며, 댄서가 반짝이는 무대와 숨찬 마감이 기다리는 데스크를 오갑니다. 쓴 책으로 여성주의 공연비평집 ‘기울어진 무대 위 여성들’과 무용현장 에세이 ‘여성, 신체, 공간, 폭력’ 등이 있으며, 여성주의 공연 뉴스레터 ‘위클리 허시어터’를 매주 발행하고 있습니다.
윤단우 공연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