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종영한 MBC 드라마 ‘연인’은 그런 시대에서도 무능하지도, 무지하지도, 무책임하지도 않은 생명력 넘치는 연인을 그리며 환영 받았다. 그중 명장면이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한 이장현이 ‘환향녀’로서 소외된 채 살고 있는 길채를 찾아간 장면이다.
“난 그저 부인으로 족합니다. 가난한 길채, 돈 많은 길채, 발칙한 길채, 유순한 길채, 날 사랑하지 않는 길채, 날 사랑하는 길채, 그 무엇이든 난 길채면 돼.”
길채가 되묻는다.
“좋아요, 허면 오랑캐에게 욕을 당한 길채는?”
주인공의 성품을 생각할 때 길채의 물음은 사족이지만 또한 그것은 그 시대의 콤플렉스를 드러내는 물음이기도 하다. 그리고! 주인공의 반응은 그 콤플렉스를 성장점으로 바꿔낸 것이었다.
“안아줘야지, 괴로웠을 텐데.”
왜 나는 저 장면에서 요한복음이 생각났을까?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 이야기 말이다. 간음은 혼자 했나, 왜 여자만 잡아오나, 언제나 연약한 게 죄지 하며 아는 척하며 더 이상 이야기에 주목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살짝 불편하기도 했다. 그 여인을 모세의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여야 한다는 군중들을 물리쳐준 멋진 예수가 그녀에게 건넨 마지막 말,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는 말이. 예수도 그 여인을 정죄한 거라고 문장만 읽었던 것이다.
이제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의 마음이 보인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그 여인이고, 그 여인은 예수의 지혜를 드러내기 위한 조연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데 도달한 것이다.
얼마나 두려웠을까. 정의의 칼을 들고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성난 군중들 사이에서 기가 죽어 있는데. 두려움에 사로잡혀 안절부절, 기가 죽어서 무조건 돌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의연한 게 아니다.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두려움이라는 망상으로 인해! 그런 여인이 예수를 만난 것이다.
예수는 호들갑을 떨고 있는 군중들에게 휘둘리지 않는다. 답을 정해놓고 미끼를 물고 와서 예수가 자기들의 법의 그물에 걸릴 거라고 확신하며 흥분해 똑똑하게 따져 묻는 사람들에게 흔들리지 않는다. 예수는 고요한 마음으로 바닥에 무언가를 쓰며 그들을 진정시킨다. 그리고 나서 입을 연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다들 돌을 던지지 못하고 떠난다. 단순히 토론 배틀에서 승리한 것이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 것이다. 그것이 정의건 법이건, 시기건 질투건, 아집에 갇혀 자기 감옥에서 나오지 못한 사람들을 자극하여 그들 속의 내재된 영성을 해방시키는 힘이 예수에게 있었던 것이다. 두려움과 수치심에 떨고 있던 여인의 마음에 그런 예수가 선명하게 새겨지지 않았을까.
모두가 떠난 자리에서 예수가 여인을 보내며 말했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을 테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 여인의 죄는 무엇이었을까? 무엇보다도 자기를 학대한 죄, 자기를 죄인이라고 규정하며 기가 죽어 자기로 살지 못한 죄가 아닐까.
이 여인의 생은 그날 경험한 정화의 힘으로 완전히 변했을 것이다. 늘 밖을 보고 두려워하며 불안으로 안절부절 못했던 이 여인은 자기를 안정시킨 따뜻하고 강렬한 힘을 평생 기억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인은 남의 비위나 맞추는 삶을 청산하고 자기 촉으로 자발적으로 마음을 돌보며 살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콤플렉스가 성장점으로 바뀌는 경험, 그것이 생명의 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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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