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 부재 장기화에 투자 계획 차질 전망…태광그룹 “최근 상황과 별개로 투자 진행”
이호진 전 회장은 2012년 횡령·배임 혐의 관련 1심 판결을 앞두고 회사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태광그룹 회장 자리는 10년 이상 공백 상태다. 그러는 사이 태광그룹은 변화하는 경영 환경에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받고 있다. 태광그룹의 실적도 꾸준히 하락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 8월 이호진 전 회장을 특별사면했다. 일각에서는 이 전 회장이 사면 후 경영에 복귀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 전 회장은 사면 결정 직후 “지속적인 투자와 청년 일자리 창출로 국가 발전에 힘을 보태고 경제 활성화 이바지로 국민 여러분과 정부의 기대에 보답하겠다”며 “함께 잘사는 국민의 나라를 위해 사회와 같이 나누고 더불어 성장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호진 전 회장은 아직까지 경영에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이 전 회장과 같은 시기 사면된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과 박찬구 금호석유화학그룹 명예회장이 최근 경영에 복귀한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재계에서는 이 전 회장의 사법 리스크가 끝나지 않아 당분간 경영 복귀는 어려울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경찰은 최근 세 차례에 걸쳐 태광산업 사무실과 태광산업 임원 자택 등을 압수수색했다. 이 전 회장은 태광산업 등을 통해 수십억 원의 불법 비자금을 조성하고, 태광컨트리클럽(CC)를 통해 계열사를 부당하게 지원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전 회장을 대리할 수 있는 가족이나 친인척도 없다. 이 전 회장의 장남 이현준 씨나 조카 이원준 씨도 태광그룹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이원준 씨는 태광산업 지분 7.49%, 흥국생명 지분 14.65% 등 태광그룹 주요 계열사의 지분을 갖고 있다.
대신 태광그룹은 계열사별 독립경영 체제를 구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태광산업은 지난 10월 이사회 내 ‘미래위원회’를 설치했다. 태광산업은 미래위원회가 속도감 있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추진을 위해 그룹의 비전과 사업전략 수립을 담당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태광그룹 다른 계열사인 대한화섬, 흥국생명, 흥국화재 등도 ESG위원회를 설치했다. 대외적으로는 ESG 경영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재계에서는 이사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오너 일가의 영향력을 축소하기 위한 의도로 풀이한다. 태광그룹 관계자도 당시 “지배구조 선진화를 위한 이사회 중심의 독립경영 체제를 구축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태광산업 지분 5.89%를 보유한 2대주주인 트러스톤자산운용은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았다. 이성원 트러스톤자산운용 ESG운용부문 대표는 “태광그룹을 둘러싼 대내·외 경영환경이 결코 녹록지 않은 만큼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제3창업 수준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한다”며 “ESG 경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인 상생과 동반성장을 통한 사회적 책임 이행을 강조한 점 역시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사회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다는 평가도 만만치 않다. 이사회가 오너의 승인 없이 독자적으로 대규모 투자를 집행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태광그룹은 지난해 12월 향후 10년 동안 총 12조 원 규모의 대규모 투자를 집행하겠다고 밝혔다. 태광그룹은 태광산업이 신사업 육성 및 공장 설비 개선 등에 10조 원을 투자하고, 흥국생명 등 금융 계열사가 신사업 및 계열사 통합 DB관리 센터 신규 구축 등에 약 2조 원을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태광그룹의 투자 발표 1년이 지나도록 투자는 진행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태광산업과 LG화학의 합작법인 티엘케미칼이 기존에 계획했던 투자도 재검토 중에 있다(관련기사 [단독] 아직 착공도 안했다고? 태광산업 티엘케미칼 투자 재검토 내막).
재계 한 관계자는 “오너 입장에서 회사의 명운이 걸려있는 대규모 투자를 이사회에 전적으로 맡기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이사회 입장에서도 오너 승인 없이 투자했다가 투자가 잘못되면 그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런 위험을 굳이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고 전했다.
태광산업의 현 상황을 감안했을 때 투자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회사의 전반적인 재무 구조가 무너질 수 있는 수준이다. 분기보고서에 따르면 태광산업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지난 9월 말 기준 4805억 원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태광산업은 최근 몇 년간 적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고, 매출도 하락세에 있다. 태광산업의 매출은 지난해 1~3분기 2조 845억 원에서 올해 1~3분기 1조 7658억 원으로 15.29% 감소했다.
태광산업의 주요 사업인 석유화학 사업의 전망이 밝지 않다는 것도 우려 요인이다. 김호섭 한국신용평가 연구위원은 “석유화학 제품 전반의 공급과잉 기조 및 수요 약세 등으로 2024년에도 부진한 업황이 이어질 전망”이라며 “수요 측면에서는 글로벌 경기 부진에 따른 수요 약세가 지속될 전망이고, 중국 석유화학 업체들의 공격적인 설비 증설과 이에 따른 자급률 상승 등을 감안하면 국내 석유화학 업체들의 수혜는 과거 대비 낮은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태광산업은 석유화학 부문에만 4조 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금융 계열사의 최근 실적도 좋지 않다. 흥국생명의 영업이익은 지난해 1~3분기 3192억 원에서 올해 1~3분기 1220억 원으로 61.77% 줄었고, 같은 기간 흥국화재의 영업이익은 2652억 원에서 2351억 원으로 11.35% 하락했다. 두 회사가 보유한 현금 및 현금성 자산도 수천억 원 수준으로 2조 원의 투자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태광그룹이 약속대로 투자를 집행하기 위해서는 이호진 전 회장의 권한을 확실하게 위임 받은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계열사마다 자율성을 부여하면 현 분위기에서 이사회가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 전 회장이 이사회에 전권을 내줄지는 장담할 수 없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다른 대기업을 살펴봐도 친인척이 아닌 임원이 회장을 대리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태광그룹 관계자는 “이호진 전 회장은 최대주주로의 역할만 수행하고 있고, 이사회 의견을 충실하게 반영해서 합리적으로 경영을 해보자는 의미에서 미래위원회가 출범한 것”이라며 “(투자와 관련해서는) 10년을 보고 하는 것으로 방향성 자체는 지난해에 충분한 논의를 거쳐 확정됐고, 최근 상황과 별개로 투자는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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