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 가격 인하 유도 및 수입 주류와의 형평성 도모…임대료·물가 상승 탓 소비자가격 안 내릴 수도
#‘역차별 논란’ 해소에는 도움 될 듯
김창기 국세청장은 11월 20일 국세청 본청에서 열린 ‘K-SUUL 정책 세미나’에 앞서 기자들과 만나 “수입차와 국산차의 세금 역차별을 기준판매비율 제도를 통해 시정했던 것처럼, 국산 증류주와 수입 증류주도 똑같은 문제가 있다”며 “우리 주류의 가격 경쟁력을 높일 수 있게 기획재정부의 세제 검토에 적극 협조할 것”이라고 말했다.
10여 일이 지난 12월 1일, 김병환 기획재정부 제1차관은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34차 비상경제차관회의 겸 제4차 물가관계차관회의에서 “내년부터 국내제조 주류에 대한 기준판매비율제도를 도입해 주류가격 안정을 유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김 차관은 “수입주류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국산주류에 대한 세 부담을 경감할 것”이라며 “이를 위해 오늘부터 관련 법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하고, 연내 필요한 조치를 완료해 내년 1월 1일 출고분부터 적용할 것”이라 설명했다.
기준판매비율은 국내 제조주류의 주종별 원가, 유통구조 등을 고려해 국내 유통 관련 판매관리비 등이 차지하는 비율을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12월 14일부터 국세청에 마련된 기준판매비율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결정된다. 국세청은 연내에 기준판매비율을 결정·고시한다는 방침이다.
업계 등에 따르면 당초 기준판매비율 40%가 적용될 것이란 관측이 제기됐지만, 유통구조 등을 감안해 30% 수준이 유력하게 언급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기준판매비율 30% 적용 시 현재 하이트진로의 참이슬 기준으로 1247원인 소주 1병의 출고가는 1066.9원으로 약 180원(14.5%)가량 낮아지게 된다.
기준판매비율 도입은 업계에서 끊임없이 제기돼왔던 ‘역차별 논란’을 해소하는 데도 도움을 줄 전망이다. 해외에서 수입되는 주류는 ‘수입신고가’를 과세표준으로 하지만 국내에서 생산되는 주류는 ‘제조장 반출가’를 기준으로 해 판매관리비 등이 과세표준에 포함됐다. 때문에 똑같은 위스키라 하더라도 수입산이 국내산보다 세금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어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계속돼왔다.
주류업계 한 관계자는 “수입산 주류에 비해 국산 주류가 상대적으로 세금 구조 자체가 불합리한 측면이 있다. 이러한 문제를 완화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기준판매비율 도입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소비자가 느낄 실효성은 “글쎄”
다만, 정부의 기준판매비율 도입이 소비자 가격을 실제로 낮출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대형마트나 슈퍼, 편의점 등 유통채널은 공장 출고가격에 일정 물류비와 마진, 부가세가 반영돼 소비자 가격이 결정되는 구조이기 때문에 공장 출고가격 인하분이 자연스럽게 반영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 대형마트 관계자는 “대형마트는 주류사에서 공급하는 가격이 낮아질 때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가격이 낮아질 수 있는 구조다. 갖고 있는 재고가 소진되면 바뀐 제도에 따른 가격으로 공급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결국 소매업장이 정부의 뜻을 따라주는지 여부가 정책 성패를 판가름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식당이나 주점 등 소매업장 내 주류 소비자 가격에 반영될지는 미지수다. 주세법상 주류 유통은 반드시 면허를 발급받은 주류도매업자를 거쳐야 한다. 이에 따라 주류 유통은 ‘주류제조사→주류도매상→소매점→소비자’의 과정을 거친다. 유통 단계마다 마진이 붙으면서 소비자에게까지 오면 가격 인상 폭이 훨씬 커지는 것이다. 통상 식당에서 판매되는 업소용 주류의 마진율이 일반 소비자가 구매하는 대형마트보다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여파로 농산물 가격이 크게 오르는 등 각종 원부자재 비용이 인상되고 인건비나 공공요금, 임대료 등도 올라 주류 판매 가격에 이를 반영하려는 점주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즉, 소비자가 술집에서 술값으로 내야 하는 비용이 줄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서울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한 자영업자는 “정부에서 세금 신경 써주는 건 반길 만하다. 하지만 지금 아시다시피 경기가 안 좋다. 물가는 오르고 임대료도 그대로인데 장사는 안 된다. 술값을 내리지 않겠냐고 하는데 잘되는 일부 가게를 제외하고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소주와 맥주를 7000원에 판매하고 있는 서울 강남구 한 자영업자 역시 “술값이 비싸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저희도 어쩔 수가 없다. 압구정 일대 임대료 수준이 말이 안 된다. 음식값과 술값이라도 (다른 지역보다) 높게 받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서 “소주 가격을 인하할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세 부담이 줄어들기 때문에 주류업계 입장에서는 두 손 들고 환영할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업계에서는 이로 인해 발생할 파장을 예의주시하면서 말을 아끼고 있다. 주류업계는 연초에 동결했던 가격을 최근 인상한 바 있다. 앞서 하이트진로는 11월 9일부터 참이슬 출고가를 6.9%, 진로는 9.3% 올렸고, 지역 소주인 좋은데이·대선시원·잎새주 등도 모두 가격을 6% 이상 올리며 출고가 인상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
하이트진로 관계자는 “아직 기재부에서 입법예고만 한 상태고, 국세청에서 심의를 거쳐 최종적인 기준판매비율을 결정해줘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정확한 수치와 관련해서 아무 것도 나온 게 없다. 심지어 아직 주종도 제대로 결정되지 않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회사 측에서 입장을 내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롯데칠성음료 관계자 역시 “정부에서 어떤 제도를 바꾸는 것에 대해서 제조사들은 따라갈 뿐 말씀드릴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자영업자 입장에서도 강제하지 않는 이상 자발적으로 주류 가격을 내리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기준판매비율을 적용했을 때 대형할인점 등에서 소주 가격 하락이 점쳐지고 있지만 그것조차 확신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어 “정책을 만들 때 소비자에게 혜택이 갈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해야 하는데 그런 부분이 아쉽다. 세수도 부족한 마당에 주류 기업들에게 세금 혜택까지 주는데 정작 소비자가 소줏값 인하 혜택을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면서 “유통 과정 전반에 대한 밀착 점검 등을 통해 마진 구조를 정확히 파악하고 술값 부담의 원인을 정책에 잘 녹여내야 한다”고 말했다.
이은희 교수는 기준판매비율 도입 영향에 대해 “코로나19로 인해 ‘홈술 문화’가 늘어났는데, 대형할인점 등에서 술을 구입하는 비용과 식당에서 술을 마시는 비용이 차이가 커지면 홈술 문화가 더욱 굳어질 것이다. 또한 국내 위스키 업계의 경우 혜택을 볼 확률이 높다고 본다. 최근 위스키 문화가 약간 주춤한 이유는 결국 가격이다. 국산 위스키가 가격 경쟁력까지 확보한다면 이미 위스키 맛을 알아버린 소비자들의 좋은 대안으로 부상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분석했다.
손우현 기자 woohyeon1996@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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