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를 막고 삶을 기워준 지혜로운 규방 예술
우리나라에서 누비 문화는 고려 말 면화 재배 이후 적극적으로 활성되었다. 이때부터 누비의 주요 소재인 목화솜이 널리 보급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상고시대부터 명주솜이나 동물의 털, 식물성 섬유 등을 이용한 누비 기법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5세기경 조성된 고구려 고분벽화인 감신총 서벽의 무인상에서도 사선과 횡선으로 누벼진 갑주를 찾아볼 수 있다.
‘누비’라는 단어의 유래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해석이 있다. 정약용은 우리말 연구서 ‘아언각비’에서 기워 꿰맨 옷을 가리키는 ‘납의’(衲衣)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글자를 잘못 옮겨 ‘누비’라고 한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납의는 청빈한 삶을 사는 승려들이 산중에서 수도하면 낡고 해진 옷을 오랫동안 기워 입은 것에서 유래하였다. 이처럼 천을 덧대어 바느질하는 방식이 점차 누비 기법으로 발전하였고, 그 방한 효과와 실용성 때문에 일반인 사이에서도 널리 쓰이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누비는 오래전부터 방한용, 호신용, 종교용 등으로 다양하게 응용돼 사용되었다. 동절기에는 방한을 위해 누비옷을 지어 입었고, 추위를 막기 위해 누비 기법으로 침구류를 두툼하게 만들어 쓰기도 했다. 또한 무관들이 착용하는 호신용 갑옷의 심감으로 무명 누비를 두세 겹 받치기도 했다. 중요민속자료인 정충신(조선 인조 때의 무신)의 갑옷을 보면 두정갑(안감에 작은 철판들을 대고 못으로 고정해 누빈 갑옷) 안쪽에 무명을 두세 겹으로 누빈 것을 볼 수 있다.
누비는 복식 이외에도 중요한 물건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됐다. 일례로 벼슬아치들이 예복에 두르는 띠(품대 또는 각대)를 넣어두던 각대집을 들 수 있다. 품대는 금속이나 가죽, 뿔, 종이 등으로 만들어졌는데, 명주에 솜을 넣어 누빈 기다란 각대집을 만들어 품대를 보관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 밖에 음식을 담는 그릇을 보호하고 음식물이 식지 않도록 솜을 넣고 누빈 그릇덮개, 그릇에 담긴 음식물을 덮어 둘 수 있도록 명주와 기름종이를 사용해 누빈 보자기 등도 조상의 지혜가 엿보이는 생활용품이라 할 수 있다. 장식용으로 누비가 활용된 사례도 적지 않다. 첫돌에 아기가 착용하는 타래버선(돌 전후의 아기가 신는 수가 놓인 누비버선), 다채로운 색상으로 다양한 무늬를 표현한 누비주머니 등은 특유의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누비의 색다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오래전 누비옷이 각광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실용성이 높다는 데 있었다. 우리 민족은 사계절의 기후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모시나 삼베, 광목, 명주나 비단 등 여러 가지 소재로 솜옷, 누비옷, 겹옷, 홑옷 등을 다양하게 만들어 입었다. 그런데 겹옷이나 솜옷 등은 세척할 때마다 다시 재단 상태로 뜯어서 빨고 꿰매서 입어야 했다. 반면 얇은 누비옷이나 누비이불 등은 완성된 상태로 세척할 수 있기 때문에, 여성들이 반복되는 번거로움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숙달된 장인도 누비옷 한 벌을 만드는 데 20여 일이 걸릴 정도로, 누비는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지만, 실용성 덕분에 수많은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그 기법이 전해질 수 있었다.
누비는 누비는 간격에 따라 잔누비(0.3cm), 세누비(0.5cm), 중누비(1cm 이상)로 나뉘며, 형태에 따라 오목누비·볼록누비·납작누비로 구분된다. 옷감 2겹만을 누벼주어 겉모양이 오목오목하면 오목누비라 하고, 솜을 여유 있게 두고 누벼주어 겉모양이 볼록한 입체적인 효과를 나타내면 볼록누비라 한다. 또 옷감만으로 누벼주어 평면적이면 납작누비라 구분하였다. 누비용 실은 먼저 길이를 일정하게 잘라 초를 먹인 다음 다려 놓고 썼는데, 이는 바느질 과정에서 솜이 묻어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한 생활의 지혜이기도 했다.
우리 선조들은 단순한 기법의 누비를 점차 다양한 형태로 발전시키고 미적 감각을 더해 예술의 경지에 오르게 했다. 조선 순조 때 사신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문신 김노상의 ‘부연일기’에는 세누비로 만든 옷감이 우수해 청나라에서 공물로 요구하였다는 기록도 발견된다. 우리 전통 누비는 세계에서 유일한 재봉 기법으로 그 정교함과 작품성이 자수에 비견되는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20세기 초 재봉틀이 보급되면서 옷을 만드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사라져갔다.
명맥이 거의 끊긴 전통 누비를 되살린 이는 초대 누비장이자 현 누비장인 김해자이다. 그는 박물관을 찾아다니며 유물을 스승 삼아 누비를 공부하고, 구전으로 전해진 전통 기법을 아는 이들을 찾아가 배우는 각고의 노력 끝에 전통 누비옷을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1996년 누비장 기능보유자로 선정된 그는 자신이 복원한 전통 누비 기법을 후학들에게 전수하는 한편 누비에 현대적 감각을 접목시킨 다양한 누비옷을 만들어 누비의 생활화에 기여하고 있다.
자료 협조=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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