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뚝 선 아웃사이더 <피에타>는 제69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사진)을 비롯해 4관왕에 올랐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젊은 비평가상’을 수상한 김 감독.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 |
▲ ‘골든 마우스상’.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 |
김기덕 감독은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직후 영화제가 열리던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국내 취재진에게 장문의 이메일을 보냈다. 귀국하자마자 9월 11일에는 서울의 한 극장에서 수상 기념 기자회견을 열고, 그동안 참아온 말들을 한 시간 동안 쉼 없이 쏟아냈다.
두 번의 ‘외부 소통’을 통해 그는 영화제 동안 “거리를 다닐 수 없을 만큼 관심을 받았다”는 ‘자기 자랑’부터 저예산 영화를 홀대하는 거대 투자배급사와 극장 체인을 겨냥해 “돈 탓에 피폐해지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려 나가겠다”는 식지 않는 창작열을 꺼냈다.
심지어 자신의 정치색을 드러내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또한 알고 보니 고가였던 시상식 의상에 얽힌 사연을 반드시 말하고 싶었던 듯 기자회견 도중 “아무도 묻지 않을 것 같아 먼저 말하겠다”며 옷 구입 당시의 ‘정황’도 상세히 밝혔다. 날카로웠지만 유머감각은 놓치지 않았다. 그야말로 거침이 없었다.
<피에타>를 포함해 18편의 영화를 만든 감독이지만 대중이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던’ 김기덕 감독의 ‘현재’를 그의 말을 통해 들여다봤다. 우리는 그를 너무 모르고 있었다.
# ‘호불호’가 극명히 나뉘는 그의 영화
▲ 영화 <피에타> 포스터. |
이 같은 의문은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김 감독이 지금까지 만든 영화 가운데 가장 흥행에 성공한 작품은 70만 관객을 동원한 <나쁜 남자>가 유일하다. 나머지 영화들은 10만 명 안팎이거나 심하면 2만~3만 명만 불러모으는 데 그치고 막을 내렸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미국의 거대 배급사가 그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며 연출 제의를 해오기도 했고,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자신들의 나라로 건너와 영화를 만들라고도 제안했다.
질문을 반복해 받을 때마다 김 감독은 “아니다”고 답했다. “소리 없이 나를 지지해준 나의 영화 관객이 있다. 뿌듯하고 행복하다. 항상 같은 질문을 받았고 이번에 다시 묻는 외신 기자에게 한국에도 내 영화를 지지해주는 팬들이 있다. 진심이다.”
<피에타> 개봉을 앞두고 그는 TV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하며 대중과 적극적인 스킨십을 나눴다. 영화제에서 <피에타>를 두고 ‘김기덕이 대중적으로 변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이런 반응을 접할 때마다 김 감독은 “내가 변했나”라고 스스로 묻는다고 한다. 그는 “어떤 과정으로 변했는지는 일기장을 천천히 들여다봐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2008년 말부터 4년 동안 은둔 생활을 보낸 계기가 된 영화 <비몽> 이야기를 시작했다.
2008년 개봉한 <비몽> 촬영 도중 주인공 이나영은 목을 매는 장면에서 생사를 오가는 위험한 순간을 겪었다. 이 사건으로 김 감독은 “영화가 사람의 목숨보다 중요한 것인가”라는 근원적 의문에 시달렸다. 때마침 제자였던 장훈 감독이 <영화는 영화다> 연출을 끝내고 거대 투자배급사 ‘쇼박스’와 계약을 맺고 <의형제> 연출을 맡으면서 그의 곁을 떠났다. 김 감독의 산중 칩거 생활이 4년이나 이어진 이유다.
지난해 칸 국제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 상’을 받은 <아리랑>은 김 감독이 처한 상황과 고민을 고스란히 담은 다큐멘터리다. 그는 <아리랑>을 통해 제자 장훈 감독을 향해 안타깝지만 실망할 수밖에 없던 속내를 털어놓아 논쟁을 일으켰고, 거대 자본으로 이뤄지는 한국영화 시스템을 신랄하게 고발했다. 그는 모든 문제의 불씨는 ‘돈’ 때문이라고 했다.
“<비몽> 이후 다양한 일이 있었는데 대부분 관계에 관한 일이었다. 사람에 대한 애정의 불씨가 나에게 실험을 한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약이 됐고 <피에타>를 만든 소재도 됐다. <피에타>는 극단적 자본주의에 관한 이야기다.”
그의 얘기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유럽의 많은 사람들은 <피에타>의 주인공이 조민수, 이정진 말고도 하나 더 있다고 말한다. 그건 돈이다. 그렇다. 돈 때문에 나온 파멸과 균열이다. 돈의 가치, 우리가 어떻게 돈에 집착하는지 여러 공부를 했다. 그렇게 결론을 얻었다. 결국 돈은 잘 쓰면 약, 못 쓰면 악이 된다.”
▲ 베니스영화제 폐막식과 기자회견에 참석한 <피에타> 김 감독과 주연배우 조민수, 이정진. |
# 돈, 자본, 거대 기업을 향한 ‘맹공’
김 감독은 그동안 기회가 될 때마다 기업이 운영하는 극장 체인의 독점적 시스템을 공격해왔다. ‘불공정한 싸움’이라는 게 이유다.
수상 직후에는 평소보다 발언 수위를 더 높였다. <피에타>가 개봉 초 전국 100여 개 스크린에서만 상영한 데다 수상 소식이 알려졌는데도 대부분의 극장에서 다른 영화와 교차로 상영하는 ‘퐁당퐁당’ 신세에 처했기 때문이다. 대기업 자본의 영화는 기업 계열인 멀티플렉스의 스크린 대부분을 차지하는 ‘물량공세’ 혜택을 받고 있다는 주장이다. 김 감독은 수상을 기념해 마련된 기자회견에서도 맹공의 수위를 낮추지 않았고 ‘도둑들’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피에타>의 좌석 점유율이 가장 높은데 고작 100개의 스크린에 그친다. 정상적인 상도에 비춰보면 말이 안 된다. 어떤 영화는 1000만 관객 올리기 위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게 ‘도둑들’ 아니겠느냐. 일 대 일로 싸워서 지면 괜찮다. 그런데 무수한 편법과 마케팅으로 불리한 싸움이다. 극장 한 관에서만이라도 퐁당퐁당이 아닌 제대로 상영하길 바라는 것이다.”
황금사자상을 계기로 제작비 마련이 좀 더 수월해지지 않을까. 그런데 김 감독은 오히려 수십억 원의 거대한 제작비 투자가 부담스러울 뿐이라는 입장이다.
“영화를 만들어 온 내내 아무도 제작비를 대주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그때를 대비하자는 마음이다. 중요한 건 대기업 돈보다 시나리오와 세상을 보는 작가의 시선 아닐까. 세계 여러 자본 투자 제의도 많이 받지만 어느 돈이든 그 돈의 가치를 객관화할 수 없다면 받으면 안 된다.”
돈으로 이야기가 흐르자 그는 이번 영화제에서 입었던 고가의 생활 한복에 관해서도 직접 해명하겠다고 나섰다. 김 감독은 영화제 레드카펫에서 입은 낡은 감색 의상과 구겨 신어 굳은살이 붙은 발뒤꿈치가 드러난 닳아빠진 운동화로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 의상은 상·하의를 합해 200만 원 상당이라고 한다. 구겨 신은 운동화 가격 역시 40만 원 정도다. 김 감독은 이 옷을 산 건 최근 출연한 KBS 2TV <이야기쇼 두드림> 때문이었다고 돌이켰다.
“녹화하는 날 보니 아무리 봐도 적당한 옷이 없었다. 인사동 옷 가게에 무작정 들어갔다. 한 20만 원쯤 할 것 같아 당연히 살 것처럼 당당하게 굴었다(웃음). 그땐 여자 옷인지도 몰랐다. 다른 손님이 들어와 가격을 묻는데 150만 원이라고 하더라. 덜컥 ‘큰일 났다’ 싶었지만 녹화 시간이 다가와 있었고 너무 당당히 군 것도 있어 살 수밖에 없었다. 이 옷 입고 1년 내내 많은 영화제에 다닐 계획이니 용서해달라.”
#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 공개 지지
김 감독은 황금사자상 수상 직후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를 공개 지지했다. 수상 기념 기자회견에서도 같은 입장을 취하면서 ‘내 영화에 영감을 주는 인물’로 문 후보와 더불어 두 명을 더 거론했다. 손석희 성신여대 교수와 이창동 감독이다.
“그분(문재인)과 나는 공수부대와 해병대의 관계? 하하. 공수부대와 해병대는 치열한 경쟁관계다. 하지만 그분과 이번에는 절대 싸우고 싶지 않다. 만약 그분의 (대선)캠프까지 간다면 나의 건강하지 못한 삶이 영향을 주기 때문에 내 역할은 여기까지다.”
김 감독이 수상 직후 트로피를 들고 민요 ‘아리랑’을 부른 데도 이유가 있다. “중국이 ‘아리랑’의 유네스코 등재를 신청했는데 기회가 될 때 부른다면 ‘아리랑’은 나의 것이 된다. 해외 영화제에서도 계속 부를 생각이고 그렇게 한다면 ‘아리랑’은 부른 사람의 것이 되지 않을까.”
김 감독은 이미 다음 연출 영화의 시나리오 집필을 시작했다. 사회 저명인사들이 주인공인 이야기다. 대중적이지만 오락적인 영화는 아니라고 김 감독은 설명했다. 영화 제작에도 나선다. 예정된 작품은 <신의 선물>과 <붉은 가족>이다. 그가 준비하는 차기작은 곧 관객들을 향한 새로운 약속이기도 하다.
“사회가 거대한 배라고 한다면 배가 바다 위를 떠가며 겪는 거친 느낌처럼, 우리 사회의 침몰 위기를 영화에 담겠다.”
이해리 스포츠동아 기자
공룡들과 전쟁 쭈욱~
한국 영화 감독으로는 처음으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받았지만 앞으로 김기덕 감독의 작품 환경이나 영화 상영 조건이 개선될지 여부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정적인 시각이 많다.
지난 1996년 영화 <악어>로 데뷔한 김 감독은 16년 동안 영화계와 교류하며 작품 폭을 넓히는 대신 자신만의 독창적인 개성을 유지하며 독자적인 활동을 펼쳐왔다. 기업의 도움 없이 직접 마련한 제작비로 개성 짙은 저예산 영화를 만들었다.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까닭에 ‘할 말은 하는’ 연출자로도 유명하다. 거대 투자배급사, 대기업이 운영하는 극장 체인의 특정 영화 독점 관행을 향해 끊임없이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는 탓에 ‘적’도 많다.
김 감독이 영화에서 자주 택하는 가학적인 표현에 따른 일각의 부정적 평가도 유효하다. 폭압적인 주인공이 극중 여성을 향해 가하는 폭력의 정당성 여부는 그가 내놓는 영화마다 늘 따라붙었던 논쟁이다.
영화계 한 관계자는 “최근 김기덕 감독의 작품이 조금 대중적인 성향으로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그가 영화에서 택하는 방식은 처절하다”면서 “작품의 개성이 유지되는 한 그는 영화계의 비주류로 평가받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그런 평가가 김기덕 감독이 지금까지 취해온 위치이고 자의와 타의가 맞물린 결과”라고 평가했다.
영화는 많은 대중이 선택해야 탄탄한 파급력을 갖는다. 이를 좌우하는 건 거대 투자 배급사와 극장의 자본 논리다. 대기업 자본의 상업영화에 계열사인 극장들이 많은 스크린을 몰아주는 건 관례로 통한다. 공정한 거래를 위해선 개선이 필요하지만 좀처럼 바뀌지 않는 견고한 벽이기도 하다.
김 감독 역시 이 문제를 두고 ‘불공정 싸움’이라고 지적하고 있지만 거대 시장 논리에서 자본 독립을 외치는 그의 영화는 시장에서는 소외받을 수밖에 없다.
황금사자상까지 받은 <피에타>가 처한 상황도 예외는 아니다. <피에타>는 상영관에서 다른 영화와 교차로 상영되는 ‘퐁당퐁당’ 신세다. 좌석 점유율은 높지만 극장들은 스크린 수를 늘리는 데 소극적이다.
대중 선택의 기회가 적은 탓에 김 감독의 영화는 “대중성을 확보한 주류 영화로 도약하기는 어렵다”는 의견에 힘이 실리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