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스트라 활동의 가치는 주로 무대 위에서 보이는 탁월한 연주력과 연주 레퍼토리로 가늠된다. 그 기준이 되는 결과가 보여주는 선명함 때문에 연주 무대가 종종 ‘음악하기’의 가치를 증명하기도 하고, 아동들에게 성취감을 주기도 하고, 지속할 동기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과에 무게중심을 지나치게 두면 과정은 부속의 자리에 위치한다. 즉, 효율성 논리로 다뤄지는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연주력을 기준으로 선택되는 소수의 아동·청소년들만이 누리는 특별한 기회로 존재해 온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엘 시스테마(베네수엘라 빈민층 아이들을 위한 무상 음악 교육 프로그램)형 오케스트라 활동은 특히 오케스트라단의 관행적 운영 논리를 깼다. 개인적 차원의 음악하기와 공동의 음악 만들기를 병행하며, 무게중심을 결과에서 과정으로 이동시켜왔다. 오케스트라 단원 활동의 기회를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공동의 성장과정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서울시의 ‘우리동네오케스트라’, 함께걷는아이들의 ‘올키즈트라’, 세종문화회관의 ‘꿈나무오케스트라’ 등은 문화부가 지원하는 ‘꿈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소위 엘 시스테마형으로 차별화해 운영하는 아동·청소년오케스트라 프로그램이다. 이들은 ‘과정 중심의 음악만들기의 장’의 도전적인 미션을 활동으로 구체화시킨 각자의 궤적을 보여준다.
이들의 프로그램은 공통적으로 오케스트라 활동이 아우르는 음악하기의 과정을 아동·청소년들의 문화적 삶의 시공간으로 인식하고 구성한다. 오케스트라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음악과 동등한 위치에 아동·청소년의 시공간으로서의 삶을 두고 악기 교육부터 합주에 이르는 음악교육 활동과 문화를 형성해 간다. 교육을 맡은 음악가는 기성세대의 위계가 분명한 톱다운 방식의 교육체계와는 다른 방식을 찾아간다. 아이들을 중심에 두고, 이끌기보다는 상호작용을 하면서 관계를 맺어간다. 아이들의 주도성과 협업을 촉매하며 음악과의 관계를 깊이하고, 오케스트라로 인해 형성된 관계를 인지하고 공동체를 이루며, 관계와 감응의 폭을 지역사회로 넓혀가게도 한다.
이 시대가 낳은 개인적 소외감, 경쟁 일변도로 인한 협업과 공동의 성취 경험의 결핍, 신뢰와 관계 맺기의 어려움을 오케스트라가 치유하고 있다. 오케스트라가 지닌 복합적인 자원과 구조의 역할을 기대했던 바가 각각의 교육 현장에서 현실로 실천되며, 그 영향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정책 단위에서부터 음악가, 행정가, 연구자 등 다양한 이들의 ‘사회적 상상’의 힘은 참여 아동·청소년들의 변화를 만들기도 하지만, 사업에 관계하는 자신들 역시 아동·청소년들로 인해 변화하고 성장했음을 고백한다. 특히, 자신이 거쳐온 음악의 페다고지(교육론)와 과정으로서의 음악하기를 현장에서 실천하고 아동들과 긴밀하게 감응해온 음악가들은, 음악가로 존재하고 살아가는 길을 새롭게 정의하고 찾아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교육자로서의 음악가가 아동·청소년들의 위에 존재하기보다 수평적 대화자로서의 위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아동이 청소년으로 성장하는 여정에 예술의 중요성이나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가치를 얼마간 해보는 체험으로 충분한 정도로 구획 짓는다. “이 정도면 된 것 같아요. 이제 학원을 보내야 할 것 같아요.” “그 정도 경험했으면 됐지.” 부모, 사업운영기관의 의사결정자, 정책결정자 등 이해관계자들에게 종종 이러한 입장을 듣는 경우가 있다. 어른들의 가치판단으로 아동·청소년들에게 예술과 예술가와의 관계가 제한되는 것이다. 인생의 안녕을 보장해주라 믿는 대학 진학을 위한 궤적에 예술의 역할은 모호한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인생의 안녕은 대학 이전에 주체로서 스스로를 인지하고, 선택하고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인 행위주체성(Agency)에 기반을 두어야 함이 미래교육의 핵심과제라는 목소리가 모아지고 있다. OECD 교육 2030 보고서에서 미래의 웰빙은 주체성을 갖춰줌으로써 스스로의 어떤 예견과 선택, 행동, 성찰의 과정을 거치면서 책임을 지고, 변화에 적응하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고 긴장과 딜레마를 다뤄야 가능할 수 있다고 예측한다. 특히 개인의 주체성과 더불어 동료와 선생님, 부모, 지역사회와의 공동의 주체성이 동반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이제는 경쟁우위를 확보하는 역량보다 점점 더 예측 불가하고 복잡하며 도전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자기중심을 잡고 자신의 역량을 파악하며 가능성을 상상하고 예측하며 행동을 선택해 실천해갈 수 있는 과정에 필요한 역량을 갖춰야한다는 것이다.
청소년의 주체성을 세우는 데에 크게 중요하다고 학자들이 제시하는 스킬 세 가지인 인지, 선택, 행동을 ‘예술하기’는 유려하게 연습시키고 체화시키는 방법과 매개성을 가지고 있다. 엘 시스테마형 오케스트라 현장에서 살펴보면, 아이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시각을 넓혀주어 자신을 관계 지어 인지하는 데에 선택지가 늘어난다. 알게 되는 것, 알게 되는 사람, 인지하는 눈이 오케스트라의 사람들과 환경으로 인해 확대된다.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세워진 일정과 목표에 기초해 자신의 의지를 세우고 실행하는 일련의 음악적 과정과 그에 따라오는 크고 작은 결과들은 성취와 성찰의 경험을 쌓아 선택의 힘을 키워줄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데 필요한 권한부여(Empowerment)의 경험을 강사들이 제공하는 수평적 관계망 안에서 누적해간다.
오케스트라 활동의 근간은 분명 음악이다. 언어가 매개하지 못하는 심미적, 정서적 표현과 감응의 시간이 아동·청소년 개개인에게 남길 풍요로운 족적은 논할 필요도 없이 공감할 것이다. 더불어 공동체를 이뤄 오케스트라단의 단원으로 경험해가는 일상적이고, 특별하기도 한 일련의 과정은 미래교육에서 기대하는 바를 이미 자연스레 체화시키고 있다. 자신의 성장은 물론 옆 동료 단원들의 공동 성장 역시 남의 문제가 아닌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행동하는 경험(피어티칭),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멋진 어른들과의 조우와 관계맺기(특히 음악가), 연주하는 순간에는 오롯이 자신과 옆 동료들을 믿고 함께 음악 만들기를 성공적으로 마치는 데에 집중할 수 있는 힘과 성취, 동네에 우리의 음악을 나누고 싶은 마음과 실천 등 일일이 손꼽기에 모자랄 정도다.
약 15년 전 이 새로운 오케스트라 교육의 가능성을 함께 그렸을 때 미처 생각지 못한 모습들도 조우한다. 오케스트라단의 한 음악가로 인해, 혹은 한 아동으로 인해 사회에서 피상적으로 들어온 문제를 나의 문제로 인식하고 함께할 수 있는 실천을 모색하는 사회적 에이전시가 개인뿐 아니라 단체 차원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한 오케스트라단에서는 환경문제에 대해 각자의 문제 인식을 표현하고 공감하는 연주로 이어보았다. 또 다른 단체에서는 장애로 인해 종종 수업에 지장을 초래해, 한때 동행 여부를 고민하게 했던 동료 단원을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타악주자로 세우고, 전체 오케스트라가 그의 박자에 맞춰가며 연주를 완성해 뇌리에 깊이 남기기도 했다.
청소년의 미래, 잘사는 삶을 위해 많은 고민과 준비들을 마련해가는 과정에 예술과 예술가가 수려하고 흥미로운 방식으로 함께할 수 있는 방법들은 무궁무진하다. 엘 시스테마형 오케스트라는 단지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예술, 교육, 복지, 사회의 영역의 경계를 넘어 그 흥미로운 방식을 위한 시도들이 과감하게 이뤄질 수 있는 중간지대로서의 공간과 시간들의 기회가 더 많은 사람들의 이해와 지지 속에서 더욱 확대되고 지속되길 기대해본다.
서지혜 인컬쳐컨설팅 대표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는 예술경영과 예술교육, 문화정책 분야에서 연구와 사업 기획, 컨설팅, 인재양성 활동을 통해 예술과 시민의 삶 사이 간극을 좁히고, 의미 있는 접점과 관련성을 형성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음악가들의 사회에서의 존재에 대한 인식과 실천적 활동을 넓히기 위해 ‘사회참여적음악가네트워크’를 발족했으며, 저서로는 ‘한국형 엘시테마: 아동청소년오케스트라 일궈가기’가 있다.
서지혜 인컬쳐컨설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