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를 봤는지. 노량, 죽음의 바다는 부활의 바다다. 영화가 감독의 예술일진대 김한민 감독은 누구보다도 전쟁의 신을 알아본 사제 같다. ‘명량’에서는 용장 이순신을, ‘한산’에서는 지장 이순신을 그려내더니 지금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는 덕장을 넘어 현자 이순신을 그려내며, 시끄러운 일은 많지만 신나는 일은 별로 없는 여기 한반도 이 땅, 이 바다가 기억하는 빛나는 정신을 노래하고 있다.
김한민 감독은 힘들 때마다 ‘난중일기’를 본단다. 그날의 사실들을 가감 없이 또박또박 써내려가면서도 고독했던 이순신의 기품을 느낄 수 있는 실존적 일기가 그의 등대였던 것이다. 이순신에 대한 그의 열정은 차고 넘쳐 벌써 10년을 탐구하고도 또 탐구한다고 하니 이순신이야말로 그에게 삶의 길을 일러주는 스승이고 사랑인 것 같다.
김한민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삶의 고비마다 자기를 비춰줄 등불을 가진 사람, 그 힘으로 자기 촉을 믿는 사람이.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는 선진국에 속해 있다. 빈부 차이는 어마무시해서 경제 때문에 삶이 붕괴된 사람들은 늘어나는데 화면에서 주로 보이는 것은 맛을 찾아 팔도를 넘어 세계 곳곳을 헤매는 먹방과, 없는 것 없이 다 갖춰 놓고 사는 사람들의 집, 그리고 명품들이다. 몸매 혹은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면서도 패션에 신경 쓰는 사람들이 이 사회 주류의 풍경이다.
저렇게 매일매일 맛있는 것을 찾으면 무미한 맛이 최고의 맛이라는 것을 잊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그러나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은 우리 일상은 각종 기념일을 명품으로, 맛으로 챙기고, 다 갖춰진 스위트 홈을 꿈꾸며, 그것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시간과 노력을 당연시하며 쳇바퀴처럼 굴러간다. 자본주의를 누리기 위해 자본주의의 전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순리일까, 역설일까.
그런데 이상하다. 모두들 열심히 사는데 웃음을 잃고 있다는 것, 신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이. 스펙으로 열심을 증명하지만 신이 나지는 않는 일, 신이 나지 않는 만남, 거기 무슨 영혼이 깃들까. 신난다는 것은 시끄럽게 논다는 것이 아니라 넘친다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태양처럼. 차라투스트라는 태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너 위대한 천체여. 네가 비춰줄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너의 행복이겠느냐. 너는 지난 10년 동안 여기 내 동굴을 찾아올라와 비추었다. 내가, 그리고 나의 독수리와 뱀이 없었더라면 너는 필경, 너의 빛과 그 빛의 여정에 지쳐 있으리라. 우리는 아침마다 너를 기다렸고, 너의 그 넘치는 풍요를 받아들이고는 그에 감사하여 너를 축복해왔다.”
니체의 시각이 오묘하다. 태양은 빛을 갈구하며 모으는 존재가 아니라 넘쳐흘러 나눠주는 존재라는 인식이다. 신나는 일은 흘러넘치는 일이다. 넘치기 위해서는 영혼이 집중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노량’에서 인상적인 것 중에 북소리가 있다. 심장 뛰는 소리를 외화하면 북소리가 되지 않을까. 북소리는 심장이 반응하는 생명의 소리다. 모두가 지쳐가고 있을 즈음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웅장한 소리, 그 소리는 이순신을 닮았다. 돌아가려 하는 일본군을 끝까지 쫓으며 자기를 제물로 던지면서까지 다시는 조선 침략의 꿈을 꾸지 못하게 하겠다는 장군의 의지는 숭고하기까지 해서, 지금까지도 김한민의 열정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새해에는 부디부디 흘러넘치는 일로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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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