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한‧사업내용 등 구체적 기준 없어…사회적참사특별위 권고 불구 희생자 추모식도 불발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특별법 시행령에 따르면 피해자 단체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와 관련된 추모사업, 가습기살균제 피해와 관련된 조사‧연구사업, 그 밖에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활동에 관한 사업을 할 경우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해당 법은 2019년 2월 신설됐지만 지금까지 지원을 받은 단체가 없다. 환경부에 확인 결과 현재까지 접수된 지원 신청은 모두 7건으로, 7건 모두 지원이 이뤄지지 않았다.
채경선 8·31사회적가치연대 대표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추모사업을 위해 지난해 8월 3000만 원의 지원금을 환경부에 신청했지만 환경부는 사업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고 부실하다는 이유로 지원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채경선 대표는 “추모 사업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자금과 공간 대여비, 물품 구매비 등 항목별로 나눠서 예산을 적었다”며 “항목을 하나하나 다 적어서 올렸는데 뭐가 부실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사업 지원 신청을 내고 지원 여부가 결정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도 불편이 크다. 채 대표는 “사업 지원 신청을 8월 말에 냈는데 11월이 돼도 연락이 없어 환경부에 먼저 연락했다”며 “12월 중순이 넘어서야 환경부로부터 처리기한이 연장됐다는 이메일 회신을 받았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은 사업 지원 신청서를 작성하는 단계부터 어려움이 많다고 토로한다. 지원 신청서에는 신청인 정보와 사업내용, 사업기간, 사업예산 등의 내용을 적도록 돼있는데 세부적으로 신청서에 어떤 내용을 포함시켜야 하는지, 지원 사업이 결정되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지, 예산한도나 사업 참여 인원 등에 대한 정보나 기준이 법규정에 담겨 있지 않다는 설명이다. 채 대표는 환경부에 신청서 작성 예시나 상세 기준을 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원하는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 환경부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사업 내용이나 어느 정도의 기한을 잡고 신청을 해야 하는지 등 사업 지원 신청과 관련된 기준이나 예시는 따로 없다”며 “피해자 단체에서 알아서 계획을 써서 신청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원이 거절된 사업 중 피해자 단체들이 가장 용인하기 어려운 것은 추모사업 지원 불발이다. 사회적참사특별위원회가 2022년 9월 정부를 상대로 가습기살균제 참사 희생자 추모식을 열어달라고 권고했는데 아직까지 이행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특별법은 사참위의 권고를 정부기관이 이행하고 이를 국회에 보고하도록 돼있다. 이와 관련해 환경부 관계자는 “추모사업은 피해자 단체 지원 사업에 포함돼 있어서 피해자 단체에서 하는 게 맞다고 본다”라며 “단체간 합의가 이뤄져 추모 사업을 공식적으로 하게 되면 환경부에서 지원하는 것이 맞지만 그냥 한 단체의 입장만으로 사업 지원을 요청하는 것에 대해서는 지원을 해주기 어렵다”고 답했다. 현 법규정으로는 피해자단체들이 서로 중복된 사업으로 지원을 받을 수 없도록 돼있어 추모사업 역시 한 단체가 진행하면 다른 단체는 진행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설명에 대해 김미란 가습기살균제 간질성폐질환 피해유족과 피해자단체 대표는 “아직 아무 단체도 지원 받은 곳이 없으니 추모사업을 하겠다는 단체가 있다면 일단 그 단체에게 지원을 해줘서 사업이 활발해지도록 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며 “단체를 지원해줄 것이 아니라면 사참위의 권고대로 국가가 추모식을 하면 되는데 그것조차 하지 않고 있다”고 불만을 표했다.
김 대표 역시 추모사업과 피해아동격려금 모금사업을 위해 지원금을 신청했지만 받지 못한 경우. 이유는 단체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 대표는 “환경부에서 단체의 대표성이 없다고 해서 대표성 있는 단체를 환경부가 정하거나 만들어 달라고 했더니 이것도 못하겠다고 하더라”라며 “피해자나 유족 5명 이상이면 단체를 만들 수 있도록 법으로 정해 놓고, 단체가 대표성이 없어서 추모를 못하게 하는 게 말이 되냐”고 반문했다. 복수의 피해자 단체 구성이 가능하도록 법을 만들어 놓고, 단체의 대표성을 운운하며 지원을 거절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설명이다. 현행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특별법 시행령' 제14조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유족이 단체를 구성할 때에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피해자의 법정대리인을 포함) 또는 유족을 5명 이상 포함하여야 하며, 그 중 1명 이상을 대표자로 선정해야 한다'는 조건만 두고 있다.
피해자단체들은 각자 피해 정도나 상황이 모두 다른 여러 단체가 의견을 모아서 지원금을 신청하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지적도 내놓는다. 환경부에 따르면 현재 지원금을 신청할 수 있는 피해자 단체는 모두 26곳.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단체 중 하나인 '빅팀스'의 조순미 위원장은 “피해자 단체를 이렇게 늘려 놓은 것도 사실 환경부”라며 “여러 단체가 있기 때문에 피해자 단체 사업 지원을 받는 것도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고, 피해자 단체 대표들이 합심해 사업을 신청하는 것도 아직 마음을 모으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피해자들의 모임 공간 마련을 위해 사업 지원금 신청을 냈던 이광희 가습기살균제 아이 피해자 모임 대표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사건이기에 더욱 피해자단체 활동 지원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이 대표는 “피해자 단체들이 관련 활동을 하면서 정부에 바라는 것을 전달하는데, 피해자들이 모여서 의견을 전달했을 때 더 시너지 효과가 크다고 생각한다”며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게 많은 사건이기 때문에 피해자들이 의논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가습기살균제가 판매되기 시작한지 어느덧 30년, 또 피해가 세상에 알려진 것이 올해로 13년째. 하지만 참사에서 드러난 각종 문제가 해결되기엔 현재 부족한 것이 너무 많다는 게 피해자 단체들의 공통 진단이다. 피해를 입었지만 피해자로 공식 인정 받지 못한 사람, 피해구제급여를 제대로 지원 받지 못하는 피해자가 부지기수라는 설명. 정부가 진상 규명이나 피해 구제에 소극적 태도를 보인 문제도 있지만, 정부의 책임 소재에 대한 법적 인정이 아직 이뤄지지 않은 것도 큰 문제로 지적한다. 가습기살균제를 제조, 판매한 가해기업에 대한 소송은 여전히 진행 중인 상태. 때문에 피해자를 대변하는 단체가 활동을 계속 이어갈 수밖에 없고, 이것이 정부가 피해자 단체를 적극 지원해야 하는 이유라는 호소다.
이에 대해 환경부 관계자는 “의도적으로 피해자단체를 지원하지 않는 것은 전혀 아니며, 지원신청 서류가 미비하거나 계획이 부실해 지원을 하지 않았던 것”이라며 “올해 상반기에 피해자단체 지원 신청에 대한 기준이나 구체적인 지침 마련을 검토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이런 상황에 대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통화에서 “(제도상)지원을 할 수 있음에도 5년 동안 한 번도 지원을 하지 않았다면 행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보인다”며 “국회 차원에서 해당 문제에 대해 한 번 살펴보겠다”고 말했다.
김성주 의료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사업 내용이나 단체 대표성 등에 대해 일정한 기준을 마련하는 것은 환경부 차원에서 얼마든지 정비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본다”며 “환경부에서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피해자단체를 지원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분명히 있다”고 지적했다.
이민주 기자 lij9073@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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