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FA 다년계약으로 대형계약 줄어…‘특수 사례’ 오지환 제외 70억 이상 양석환·안치홍 두 명뿐
이번 FA 시장은 예년보다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총액 100억 원이 넘는 '빅딜'은 LG 트윈스 오지환 한 명만 성공했는데, 1년 전 세간에 공개됐던 내용이라 새삼 주목을 받진 못했다. LG는 지난해 1월 오지환과 2024년부터 계약기간 6년 총액 124억 원의 다년 계약에 합의했다고 이미 발표한 바 있다. 팀 전력에 큰 영향을 미칠 만한 '이적생'도 많지 않았다. 총액 50억 원 이상을 받고 팀을 옮긴 선수는 내야수 안치홍(롯데 자이언츠→한화 이글스)과 투수 김재윤(KT 위즈→삼성 라이온즈)뿐이다. 안치홍이 최대 6년(4+2년) 총액 72억 원에 계약했고, 김재윤은 4년 58억 원에 사인했다.
#FA 시장 왜 '대어'가 없었나
갈수록 선수 몸값이 높아지는 추세인데도 별다른 대형 계약 소식이 들리지 않았던 이유가 있다. 2023시즌이 끝난 뒤 FA 자격 선수로 공시된 인원은 총 34명. 그러나 이들 중 FA 자격 행사를 신청한 선수는 19명으로 전체의 56%에 불과하다. 주전급 선수 대다수가 원 소속구단과 이미 비 FA 다년 계약을 해둔 상황이라서다. 시장에 나왔다면 '최대어'가 되고도 남을 오지환, 구자욱(삼성), 박세웅(롯데) 등이 모두 그랬다. 구자욱은 2022년 스프링캠프 시작을 앞두고 삼성과 5년 총액 120억 원(연봉 90억 원, 인센티브 30억 원)에 장기 계약을 했다. 이 때문에 구자욱의 첫 FA 자격 행사는 2년째 미뤄지고 있다.
지난해 말 첫 FA 자격을 얻을 예정이던 박세웅도 2022년 10월 롯데와 5년 총액 90억 원에 계약했다. 90억 원 가운데 보장액은 70억 원이고, 옵션은 20억 원이다. 이 계약은 당시 박세웅이 병역 미필 신분이라 더 화제가 됐다. 박세웅은 군복무를 결심하고 지난해 상무(국군체육부대) 야구단에 지원해 서류 전형에 합격했지만, 고심 끝에 입단 의사를 철회한 뒤 지난해 9월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와일드카드 멤버로 발탁됐다. 그리고 대표팀 소속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어 병역 대체복무 혜택을 얻었다.
SSG 랜더스는 6명으로 FA 자격 공시 선수가 가장 많았지만, 이 중 4명이 이미 다년 계약으로 묶여 있었다. 많은 팀이 탐낼 만한 베테랑 3루수 최정은 2022년 말 세 번째 FA 자격을 얻을 수 있었지만, 2019시즌을 앞두고 두 번째 FA 계약을 하면서 SSG와 6년 총액 106억 원에 사인했다. 올 시즌을 끝으로 최정과 SSG의 6년 계약이 끝나는데, 내년에도 그가 SSG를 떠날 가능성은 크지 않다. SSG 투수 박종훈, 문승원과 외야수 한유섬도 나란히 2022시즌을 앞두고 5년 계약에 합의한 터라 아직 계약기간 3년이 더 남았다. 박종훈은 총액 65억 원, 문승원은 총액 55억 원, 한유섬은 총액 60억 원에 각각 사인했다.
FA 시장에 '특급 매물'이 사라지는 추세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각 구단 단장들은 "전력을 단기간에 가장 확실하게 보강할 수 있는 방법이 외부 FA 영입인데, 눈여겨 보던 대어급 선수들에게 채 손을 뻗기도 전에 문이 닫혀 버린다"며 아쉬워하고 있다. 특히 가뜩이나 귀한 '국가대표급 선발 투수 FA'는 예전보다 더 찾기 어려워졌다. 롯데가 20대 선발 투수 중 선두주자로 꼽히던 박세웅과 이미 장기 계약을 했고, NC 다이노스는 '예비 FA'도 아닌 왼손 에이스 구창모와 2022년 말 최대 7년 132억 원에 장기 계약을 성사시켰다. 올 시즌 이후 FA 시장에 나올 투수들 중 아직 비FA 다년 계약을 하지 않은 A급 투수는 KT 잠수함 에이스 고영표가 전부다. A급 야수들 중에서도 국가대표 2루수 박민우가 이미 소속팀 NC와 최대 8년 140억 원에 다년 계약을 마쳐 일찌감치 타 구단의 영입 가능성을 차단했다. 내야진 보강에 지갑을 열 준비가 된 구단들은 '그림의 떡' 앞에서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다.
결국 FA 시장의 과열이 이런 현상을 불러왔다. A구단 관계자는 "일찍 선수를 단속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면 몸값이 더 올라갈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했다"며 "예전에는 원 소속구단 우선 협상기한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시장이 열리는 순간 '자유경쟁' 체제다. 100억 원 이상 계약이 쏟아지는 FA 영입전에 참전했다가 '패자'로 남느니, 독점 협상을 할 수 있을 때 원 소속구단의 메리트를 이용해 내부에서 선점하는 게 여러모로 유리하다"고 했다. B구단 관계자는 "프랜차이즈 스타가 FA로 이적하면 구단이 겪는 후폭풍이 만만치 않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서 구단들도 새로운 비책을 찾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지환이 FA 신청을 했다고?
공식적으로 이번 FA 시장 최고액 계약은 앞서 언급한 오지환의 6년 124억 원이다. 그러나 1년 전 계약에 합의한 사실을 알리고도 오지환이 FA 권리 행사를 신청하고 시장에 나오면서 적잖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올해 부활한 2차 드래프트에서 LG가 보호 선수를 한 명이리도 더 묶어놓기 위한 '꼼수'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2차 드래프트는 각 구단이 35명을 보호 선수로 지정할 수 있는데, FA 신청 선수는 이 명단에서 자동으로 제외된다. 비FA 다년 계약을 한 선수를 타 팀에 빼앗기지 않으려면 35인 보호 선수 명단에 넣어야 하지만, FA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LG와 오지환이 이미 6년 동행을 약속한 상황에서 보호 선수를 한 명 더 묶을 수 있는 이득까지 얻게 되자 다른 구단들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당연히 다년 계약을 했을 거라고 생각해서 오지환 영입을 검토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며 손가락질했다. 물론 LG는 "절차상 문제될 게 없다"고 해명했다. "오지환과 계약에 '합의'만 하고 실제 계약서에는 사인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KBO에 오지환과의 다년 계약 서류를 제출하지 않았기에 KBO도 문제 삼을 명분이 없다. FA 신청과 계약은 선수의 자유 의지이니 오지환의 선택을 비난하기도 어렵다.
C 구단 관계자는 "LG는 선수층이 두꺼운 팀이라 보호하고 싶을 만한 신예 선수가 많다. LG 구단이 많은 고민을 했겠지만, 선수 유출을 막기 위해 제도의 허점을 잘 파고들었다"고 해석했다. D구단 관계자는 "LG가 투명하지 못한 일처리를 한 점은 아쉽다. 하지만 관련 규정이 상세하게 마련되지 못한 영향도 있다"며 "처음부터 이런 변수를 고려해 규정을 마련해야 했다"고 지적했다.
결국 KBO는 1월 11일 열린 이사회에서 관련 논의를 진행해 비FA 선수와의 다년 계약 규정을 개정했다. 다년 계약 선수는 계약 기간 중 FA 자격을 취득할 수 없도록 하고, 계약이 당해 년도에 종료될 예정인 선수에 한해 FA 자격을 승인하도록 했다. 또 구단은 비 FA 선수의 다년 계약 체결 시 언제든 계약 승인을 신청할 수 있고, 발표 다음 날까지 KBO에 계약서를 제출하면 KBO는 그다음 날 계약 사실을 공시하도록 했다. 여기에 '기한 내 계약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징계를 명시한 규약 제176조를 준용해 계약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로 간주해 상벌위원회에서 제재 심의를 한다'는 내용을 추가했다.
이뿐만 아니다. LG는 이른바 '오지환 법'이 된 이 추가 규정 외에 또 다른 규약 개정에도 일조(?)했다. 현 규약에서 정해둔 범위를 벗어나는 메리트(보너스) 지급을 제한하고, 이에 따라 구단이 아닌 감독이 사비를 털어 선수에게 보너스를 주는 행위를 금지한 것이다.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MVP) 별도 시상에 한해서만 시즌 전 KBO에 운영계획서를 제출해 승인받으면 가능하도록 규정을 손질했다. 지난해 염경엽 LG 감독은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자체 선정한 시리즈 MVP에게 사비를 털어 1000만원의 상금을 주겠다고 공언했고, 실제로 우승 후 박동원과 유영찬에게 1000만원씩 보너스를 안겼다. 올해부터는 감독이 임의로 이런 '한 턱'을 낼 수 없게 됐다.
#78억 원에 잔류하고 주장 된 양석환
'특수 사례'였던 오지환을 제외하면, 이번 FA 시장에 나온 선수 중 총액 70억 원이 넘는 FA 계약에 성공한 선수는 단 두 명뿐이다. 두산 베어스 출신 내야수 양석환(6년 78억 원)과 롯데에서 한화로 이적한 안치홍이다. 둘 다 4+2년으로 계약기간은 같고, 금액은 양석환이 6억 원 더 많다. 양석환은 오지환 다음으로 많은 금액에 사인해 사실상 올해 스토브리그의 일인자가 됐다.
양석환은 2014년 '옆집' LG에 입단했지만, 2021년 3월 투수 함덕주와 트레이드돼 두산으로 이적했다. 그 후 자신의 잠재력을 폭발했고, 어느덧 두산 유니폼이 더 익숙할 만큼 확실한 팀 간판타자 중 한 명으로 자리잡았다. 이승엽 두산 감독은 1월 15일 열린 창단 42주년 기념식에서 양석환을 신임 주장으로 선임하기도 했다. 이 감독은 "양석환은 밝은 선수이면서 선배들은 물론이고 나에게도 할 말은 하는 선수다. 또한 프로 선수에게 중요한 여러 규율을 잘 지켜 후배들에게 프로 모범이 된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양석환과 함께 중심타선을 책임지는 김재환도 "양석환이 팀에 남은 건 나뿐만 아니라 두산 전체에 엄청난 플러스다. 그런 타자가 있다는 것만으로 나 포함 모든 선수가 에너지를 받는다. 양석환을 잡아 준 구단주님께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후배 투수 곽빈도 "때론 무섭기도 하지만, 책임감이 강한 형"이라며 "하는 행동이 주장답다. 팀에 잘 맞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고 반겼다.
양석환은 "FA 계약을 마치고 감독님께 전화 드렸더니 주장을 맡아 달라고 말씀하시더라"면서 "주장은 원래 프랜차이즈 스타가 하는 거라 이제 두산에서 4년 차인 내가 주장을 하기는 어려울 거라 생각했었다. 이렇게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또 "이제 FA 계약도 했으니, 앞으로 더 편하게 이런저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전임 주장인) 허경민 형은 따뜻한 스타일인데, 나는 그 반대 성격이다. 후배들이 어떻게 느낄지 조금 걱정된다"고 웃어 보였다.
#마흔둘 오승환도 FA로 2년 계약
'대어급' 선수가 거의 없었던 만큼, FA 선수 대부분이 원 소속팀에 잔류했다. 한국시리즈 우승에 힘을 보탰던 LG 투수 임찬규(4년 50억 원)와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외야수 전준우(4년 47억 원)를 필두로 LG 투수 함덕주(4년 38억 원), KIA 타이거즈 내야수 김선빈(3년 30억 원)도 이변 없이 소속팀에 남았다. KIA 외야수 고종욱(2년 5억 원), 한화 투수 장민재(3년 8억 원), 삼성 투수 김대우(2년 4억 원), 삼성 내야수 강한울(2년 3억 원)도 원소속구단과 잔류 계약을 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KBO리그 역대 최고 마무리 투수인 오승환이 다시 삼성과 총액 22억 원에 2년 계약을 했다는 점이다. 1982년생인 오승환은 지난해 마지막 등판이었던 10월 14일 대구 SSG전에서 KBO리그 역대 최초로 통산 400번째 세이브 금자탑을 쌓았다. 일생일대의 목표를 이뤘기에 선수 생활 연장 여부에 관심이 쏠렸는데, 삼성과 FA 계약을 완료하면서 앞으로 2년 더 마운드에 서게 됐다.
협상 과정에서 적잖은 진통도 있었다. 삼성을 대표하는 레전드 오승환과의 협상이 해를 넘겨 1월 18일까지 이어진 이유다. 연봉과 계약 기간을 두고 구단과 오승환 측의 이견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이종열 삼성 단장이 오승환을 직접 만나 협상을 마무리 지었다는 후문이다.
단국대를 졸업하고 2005년 삼성에 입단한 오승환은 2년 차였던 2006년 47세이브를 올리면서 전문 마무리 투수로 자리 잡았다. 이후 2013년까지 '삼성 왕조'의 일등공신으로 활약하면서 KBO리그 간판 소방수로 활약했다. 역대 최다 세이브와 한 시즌 최다 세이브 기록 모두 오승환이 보유하고 있다. 일본 한신 타이거스와 메이저리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토론토 블루제이스, 콜로라도 로키스 등에서도 활약했다. 2020년 38세의 나이로 한국에 돌아왔고, "전성기가 지났다"는 평가 속에서도 지난 4년간 123세이브를 쌓아 올려 끝내 400세이브 고지를 밟았다. 오승환은 앞으로 2년간 KBO의 역사인 자신의 세이브 기록을 더 늘려갈 수 있다. 통산 세이브 2위는 은퇴한 손승락의 271세이브로 오승환과 129개나 차이 난다.
이 단장은 "오승환과 재계약하면서 올 시즌 투수진 구성의 화룡점정을 찍게 됐다. 협상 과정에서 시간이 걸렸지만, 최고의 전력 구성을 위해 구단의 입장을 이해해준 오승환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며 "오승환이 최근 합류한 선수들과 함께 불펜에서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내리라고 기대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삼성은 올겨울 취약 포지션으로 꼽히던 불펜진 강화에 집중했다. KT에서 마무리 투수를 맡았던 김재윤을 4년 58억 원에 데려온 데 이어 키움 히어로즈 출신 불펜 투수 임창민과 2년 8억 원에 사인했다. '리빙 레전드' 오승환과의 계약도 마무리해 한숨 돌리게 됐다.
지난해 한국시리즈 우승팀 LG는 올겨울 가장 많은 돈을 썼다. 총 212억 원을 들여 오지환·임찬규·함덕주 등 내부 FA 선수 3명을 잡았다. 외부에서 다른 선수를 영입하지 않고도 만족스러운 겨울을 보냈다. SSG는 포수만 두 명을 잡았다. 내부 FA 김민식과 2년 5억 원에 사인했고, 키움에서 뛰던 베테랑 포수 이지영을 사인 앤드 트레이드(2년 4억 원)로 영입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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