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감된 R&D 예산 메우려면 민간 용역 절실…경쟁국 용역 맡지 않는다는 불문율 깨질 수도
'일요신문i' 취재를 종합하면 중국의 한 이차전지업체의 한국법인이 2020~2022년 A 교수에게 연구용역을 맡겼다. 이 업체는 2021년 A 교수의 소속 대학교 산학협력단과 공동으로 특허 출원까지 했다. 이 특허의 발명자에는 연구 용역에 참가한 A 교수와 그의 제자들이 포함돼 있다.
문제는 이 업체가 '산업스파이'로 의심받고 있다는 점이다. 이 업체는 우리나라 이차전지 업체 전·현직 임직원 5명을 고용해 기술을 유출한 혐의로 최근 검찰에 송치됐다. 국내 연구진이 산업스파일지 모를 기업과 협업을 진행한 셈이다.
해외 업체의 연구 용역을 받아 기술이나 지식재산권 등 성과를 넘기고 보수를 받는 일은 사실 일반적이다. 다만 우리나라가 ‘이차전지’와 같이 세계 여러 나라와 선두권 경쟁을 해야 하는 산업 분야의 기술이라면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우리 정부는 이차전지 산업을 비롯한 주요 산업을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 꼽고 국내 연구진에 다양한 지원을 하고 있지만 우리 기술이 해외로 넘어가는 사례는 꾸준히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는 반도체·이차전지 등 국내 핵심 산업의 기술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산업기술보호법)’과 ‘국가첨단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및 보호에 관한 특별조치법(국가첨단전략산업법)’을 제정해뒀다. 해외로 유출되면 국가 안전보장 및 국민경제의 발전에 중대한 악영향을 줄 우려가 있는 산업 기술은 ‘국가핵심기술’ 혹은 ‘국가첨단전략기술’로 지정해 보호·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법은 이미 만들어진 기술과 관련돼 있다. 앞의 사례처럼 기술개발을 위한 R&D 단계에서는 적용하기 힘들다. 이차전지업계 한 관계자는 “해외 업체가 국내 업체보다 지원이 크고, 국가 연구·개발(R&D) 사업보다 개발비를 받는 절차가 간단해 해외 업체의 위탁 용역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때에 따라서는 해외 연구 용역이 연구자 본인의 경험이나 자가발전에 더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 현장에서는 우리 연구진의 성과를 해외 기업이 선점하는 일을 줄이려면 연구개발(R&D) 단계부터 우리 정부와 기업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다. 올해 R&D 예산은 국가 채무와 R&D 카르텔 타파를 이유로 삭감됐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지난해 국가 R&D 예산은 약 31조 1000억 원 수준이었지만, 올해는 약 26조 5000억 원 수준으로 낮아졌다. 국가 R&D 예산 삭감은 1991년 이후 33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전문가들은 정부 R&D 예산 삭감으로 부족해진 연구개발비를 경쟁국의 민간 용역으로 조달해 채우는 사례가 늘어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과학기술교육분과의 과학부문 전문위원을 역임한 박철완 서정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정부에서 R&D 카르텔을 적발해 연구비 독점이나 연구비의 비정상적인 사용 등을 막는 등 예산의 효율화가 이뤄졌어야 했는데, 결과는 효율화 없이 예산이 삭감됐다”고 지적했다.
예산 삭감 전 정부 R&D 사업 수주로 외형 확대에 나선 중소기업들이 올해 예산 삭감으로 지난해 투자에 대한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 대학교 산학협력단이나 과학기술연구원 소속 교수들은 해외 이직을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또 학생 신규 채용에도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삭감된 정부 예산을 메우기 위해서는 민간 업체의 연구 용역을 받아야 한다. 민간 용역은 평가 보고서 작성, 연구 개발비 정산 등 페이퍼 워크가 적고, 비록 성과를 내지 못해도 큰 타격을 받지 않는 경우도 있어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정부 R&D 사업보다 민간 용역을 선호하는 경향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주지 않으면 자칫 핵심산업에서 경쟁국 업체의 연구 용역을 받지 않는다는 불문율마저 깨질 수 있다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도 나온다.
다행스럽게도 정부는 R&D 예산을 다시 증액하겠다고 밝혔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월 5일 오전 서울 성북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개최된 ‘2024년 과학기술인‧정보방송통신인 신년 인사회’에서 “재임 중 R&D 예산을 획기적으로 늘리고 혁신적·도전적 R&D와 미래세대 연구자의 성장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고 강조했다.
산업통상자원부도 나섰다. 산업부는 지난 1월 18일 R&D 4대 혁신 방안을 발표했다. 보조금 성격의 R&D 지원을 중단하고, 도전적 R&D에 지원을 집중하며, 100억 원 이상 과제 수를 늘려 대형 과제 중심 사업체계로 개편할 예정이다. 또 프로세스를 수요자 중심으로 바꿔 기업과 연구자가 과제기획을 주도하도록 바꿀 계획이다.
박철완 교수는 “현재 R&D 카르텔에서 발생하는 낭비 요소를 줄이기 위해서 효율화 프로세스를 마련하는 게 먼저”라며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묵묵히 연구하는 연구자들의 피해는 이어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박찬웅 기자 rooney@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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