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기 중후반으로 넘어오면서 종교, 철학, 왕권, 정치 이념 같은 절대 가치가 무너지고 그 자리에 다양한 가치가 들어앉았다. 그중에서도 시간이 갈수록 힘을 받는 것이 ‘개인의 생각’이다. 이런 시대를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모습이다.
우리는 최첨단 현대문명과 토착 전통문명이 공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유럽의 현대생활 가치와 오지의 원시생활 가치가 함께 존재하며, 서구의 인간 중심 사상과 동양의 자연 중심 사상이 섞여 있는 세상이다.
그런데 이렇게 복잡한 것들을 하나로 묶어낼 끈 같은 연결고리를 찾지 못했다. 누구나 공감할 만한 커다란 가치, 질서 같은 수단이 없다. 그래서 개인의 생각이 가장 소중한 가치로 떠오르고 있다.
우리의 문화예술에서는 어떤 모습일까. 한마디로 퓨전문화다. 서양 음악과 국악을 섞어서 만든 음악, 고전과 대중 양식이 합쳐진 팝페라나 뮤지컬을 비롯해 무용과 연극, 영화와 미술이 서로 합쳐져 어떤 예술인지 성격이 모호하다. 이런 현상을 탈장르라고도 불렀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미술은 탈장르의 혁신을 통해 튼실한 모습으로 거듭났다. 개성적인 취향에 따른 버라이어티한 내용과 재료의 개방적인 선택에 의한 기법의 확대로 그 어느 시대보다 화려한 시각 세계를 열었다. 현대 미술을 이끌고 있는 회화는 공예, 만화, 건축, 영상, 디자인 등에서 재료와 기법을 받아들여 끊임없는 변모를 시도한다. 최근 회화가 대중적 지지도를 바탕으로 세력을 넓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런 흐름에서 이반디의 작업도 주목 받는다. 그는 전통 도예를 전공한 작가다. 조선 백자의 기법을 바탕으로 담백한 미감을 현대화한다. 백자에서 보이는 미니멀한 분위기를 선으로 담아내는 현대 도자로 인정받고 있다.
이반디는 도자의 한정적인 표현을 넘어서 새로운 작업을 시도한다. ‘세라믹 페인팅’이라고 부르는 그의 작업은 현대 회화의 새로운 영토로 관심을 끌고 있다.
그동안 도자 기법을 바탕으로 현대 회화 작업을 선보였던 작가들은 심심치 않게 있었다. 대부분이 도판으로 번역된 회화 작업으로 구성적 요소와 도자의 재료적 특성을 부각하는 데 그쳤다.
이에 비해 이반디의 작업은 도자 기법과 재료에서 오는 개별성을 바탕으로 회화적 표현방식을 보여준다. 그래서 회화적 요소가 강하게 보인다.
담기는 내용도 미니멀한 분위기의 추상성과 장식적 요소가 보이는 꽃 등 다양하다. 특히 유약의 성질을 이용한 번짐 효과와 붓질의 역동성이 돋보이는 작업도 있어 회화성이 두드러진다.
이반디는 전통 도예의 재료와 기법, 제작 공정에다 회화적 방법을 결합해 새로운 도자 회화를 창출하고 있다. 흙과 물, 불로 빚는 회화인 셈이다. 그의 작업을 ‘세라믹 페인팅’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다.
비즈한국 아트에디터인 전준엽은 개인전 33회를 비롯해 국내외에서 400여 회의 전시회를 열었다. <학원>, <일요신문>, <문화일보> 기자와 성곡미술관 학예실장을 역임했다. <화가의 숨은 그림 읽기> 등 저서 4권을 출간했다. |
전준엽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