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 채팅 버전, 수법 비슷한데 ‘지급정지’ 불가…경찰·은행 소극적, 피해자 모임 접근해 2차 사기도
#연예인도 당한 로맨스스캠
1월 8일 국가정보원(국정원)에 따르면, 국정원 111센터에 접수된 2023년 로맨스스캠 피해 신고 건수는 126건으로 역대 가장 많은 신고건수를 기록했다. 2019년 38건에 비해 4년 사이 4배 가까이 늘어난 셈이다. 2023년 로맨스스캠 피해액은 55억 1200만 원이었다. 피해액은 2019년 8억 3000만 원에서 2020년 3억 7000만 원, 2021년 31억 3000만 원, 2022년 39억 6000만 원으로 해마다 늘어 2023년에는 4년 전보다 7배가량 증가했다.
2023년 12월 27일 부산의 한 아파트에서는 집주인이 여행으로 잠시 집을 비운 사이 로맨스스캠 피해자에 의해 현관 도어락이 바뀌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도어락을 교체했던 여성은 “로맨스스캠을 당했고, 외국인 남자친구가 같이 살 집이라고 해서 도어락을 바꿨다”고 주장했다. 이 여성은 아파트 안내데스크 출입 대장에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도 적은 것으로 알려졌다.
클릭비 출신 방송인 김상혁(40)도 로맨스스캠을 당해 금전 피해를 입었다고 털어놨다. 김상혁은 1월 8일 유튜브 채널 ‘남다리맥’을 통해 공개된 영상에서 “어느 날 누군가 주기적으로 메시지를 보내더라. 펜팔하는 느낌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면서 “그러다 자기 지갑 주소에 미국 달러를 보내면 배당을 준다고 하더라. 그래서 100만 원을 넣었다. 이후 실제로 내 계좌로 6시간마다 배당금이 떨어졌다. 총 2억 원 규모의 자산을 돌리고 있다는 그 친구의 말에 돈을 추가로 넣었다. 그렇게 2000만 원을 날렸다”고 말했다.
로맨스스캠은 주로 해외 서버에 기반을 두고 피해자에게 연락을 취하기 때문에 용의자 특정이 어렵다. 추적이 힘든 암호화폐(가상화폐) 등이 해외로 유출되는 경우가 많아 피해 금액 환수불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게다가 피해자들의 신고가 저조해 피해 규모를 정확히 가늠하기 어렵다. ‘로맨스스캠 피해자 모임’ 카페 한 회원은 “주위에 알리기 상당히 껄끄럽다. 억대 사기 피해를 입으신 분도 ‘금액이 문제가 아니라 창피해서’ 집에 알리지 못하더라”라고 말했다.
로맨스스캠 피해자 모임 카페에는 몇 백만 원, 몇 천만 원대부터 많게는 몇 억 원의 피해를 입은 이들이 존재했다. 흔히 알려진 ‘몸캠 피싱’이나 ‘코인 사기’ 외에도 ‘물류 통관 사기’ ‘돼지 도살’ ‘채팅 환전 사기’ ‘가상부동산 사기’ ‘페이크 쇼핑몰’ 등의 다양한 피해 유형이 존재한다.
#암호화폐 사기로 공황장애까지…
서울 강서구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는 40대 초반 남성 A 씨는 2023년 6월 페이스북을 통해 접근한 일본인 여성 스캐머에게 로맨스스캠 피해를 당했다. A 씨의 경우 로맨스스캠 하위 범주에 있는 암호화폐 사기 피해자로 분류된다.
A 씨는 “처음에는 한국말을 배우고 싶다며 접근을 했다. 몇 번 거절을 했지만 계속 말을 걸어 오길래 말동무나 해보자는 마음으로 대화를 시작했다”면서 “(스캐머는) 자기 삼촌이 암호화폐로 돈을 벌었다면서 소액으로 투자해 볼 것을 권유했다. 코인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계좌 개설부터 모든 것을 스캐머가 차근차근 알려줬다. 잃는 셈 치고 3만 원을 넣었더니 뜻밖의 수익이 생겼다. 점점 투자금액을 올리다가 중간에 30만 원 정도의 수익금을 받기도 했다. 그때부터 완전히 믿었고 결국 대출을 받아 투자한 피해금액이 7000만 원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가상자산거래소 빗썸을 통해 가짜 사이트로 돈을 송금했던 A 씨는 “스캐머들은 투자금액 단위가 커지면 돈을 인출 못 하게 하려고 가짜 링크를 보내준다. 링크에 접속하면 ‘이벤트’란을 누르게 돼있는데, 스캐머는 ‘왜 클릭했냐. 그걸 누르면 무조건 1억 원 이상 채워야 수익금이 발생한다’면서 협박했다”고 말했다. 마음이 급해진 A 씨는 가게를 담보로 대출을 받아 돈을 입금했고 나중에서야 인터넷을 통해 사기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약 6개월 전 사이버수사대에 신고했던 A 씨는 경찰로부터 전화 한 통 받지 못한 채 사건이 종결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A 씨는 경찰의 소극적인 태도를 지적하면서 “스캐머의 IP 주소까지 확인했지만 경찰은 확인한 방법이 불법이라면서 손을 떼려 했다. 스캐머 조직이 해외에 있어 국제 공조가 되지 않으면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을 안다. 하지만 (경찰이) 이렇다 할 노력을 하지도 않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A 씨는 “피해 직후 공황장애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가 현재는 약을 끊고 운동을 시작한 상태”라면서 “돈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허무하다. 어떻게 살아야 될지 막막한 상태이며 너무 힘들어서 자포자기하는 심정이다. 매달 나가는 이자 부담이 심해 담보물이었던 가게를 내놨다”고 말했다.
#'관련 업계 이력이 독으로' 물류통관 사기
30대 여성 B 씨는 소개팅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접근한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주장하는 남성으로부터 로맨스스캠 피해를 당했다. B 씨의 경우 ‘물류통관 사기’ 피해자로 분류된다.
B 씨는 “지난해 9월 말 친구로부터 소개팅 앱 ‘틴더’를 권유 받아 시작했다. 틴더에서 만난 스캐머는 자신이 한국계 미국인이며 국내 대기업 엔지니어라고 주장했다”면서 “비록 만나지는 못했지만 약속도 잡았고 (스캐머와) 영상 통화까지 했다. 그는 오만 바다 한가운데라면서 전화가 빨리 끊기는 것처럼 연기를 했다. 사진인지 영상이 깨지는 건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해당 지역 네트워크가 안 좋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스캐머는 B 씨를 속이기 위해 여권도 보내줬다. 알파벳 순서도 틀린 가짜 여권이었다. B 씨는 “당시에는 휴대전화로 대충 봐서 구별이 안 됐다. 오히려 여권도 보여주니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B 씨는 쉬운 부탁에서 점점 어려운 부탁을 요구하는 사기꾼들의 전형적인 수법에 속았다고 자책했다. 또한 다급해하는 스캐머를 보면서 불쌍한 감정이 들어 돕게 됐다고 말했다. B 씨는 “처음에는 ‘네트워크가 안 좋으니 이메일을 보내달라’는 등 쉬운 부탁부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은행 업무까지 돕게 됐다. 내가 부탁을 안 들어주면 15억 원짜리 계약을 날린다고 죽을 것 같다고 하니 불쌍했다”면서 “심지어 예전에 통관 관련 업체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스캐머가 말하는 프로세스가 경험했던 것과 비슷하다보니 더 믿게 됐다”고 말했다.
스캐머는 약 15억~20억 원이 들어있는 ‘이스트 포르테 은행’ 계좌를 보여주면서 B 씨에게 40% 이자율로 돈을 갚겠다면서 급전을 요구했다. B 씨는 해당 은행을 포털에 검색해봤지만 검색 결과가 많아 진위 여부를 판단할 수 없었다. 당연히 은행 사이트는 가짜였다.
B 씨는 “스캐머는 ‘대금을 송금을 해야 되는데 은행에 접근이 안 된다. 상대측이 너무 압박해 숨이 막힌다. 도와달라’는 식으로 말했다. 속는 셈 치고 300만 원을 대금으로 송금했다. 이어 브리짓 익스프레스라는 업체에서 문자가 왔는데 이 업체에서 트래킹 코드를 검색하면 물건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나온다. 상당히 정교했지만 이 사이트 역시 가짜다. 그렇게 통관 비용을 이것저것 도와주다 보니 최종 5000만 원의 사기 피해를 당했다”고 말했다.
경찰과 은행의 ‘서로 떠넘기기’ 역시 B 씨에겐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B 씨는 사기 피해를 인지한 직후 경찰에 송금 받은 계좌의 지급정지를 요청했다. B 씨에 따르면 해당 계좌는 경찰이 다른 여러 범죄에도 연루된 것으로 확인한 상태였다. 경찰 측은 “계좌 주인의 범죄 관여 사실이 아직 명확하지 않아 지급정지가 불가능하다”면서 은행에 연락해볼 것을 권유했다. 은행 측은 “계좌 주인의 허락 없이 지급정지를 할 수 없다. 사기사건에 연락됐다는 증거를 보여달라”면서 서류를 요구했다. 결국 B 씨는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한편 B 씨와 같은 물류통관 사기 피해자는 계속 나오는 상태다. B 씨는 “보이스피싱의 경우 대포통장 의심 계좌가 즉각 지급정지 되는데 로맨스스캠은 그렇지 않다. 피해자들이 가장 당황하는 것이 이 부분”이라면서 “앞으로도 비슷한 유형의 피해자가 계속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1월 26일 B 씨에 따르면 스캐머는 본인이 사용하던 카카오톡 계정을 그대로 업데이트해서 돌아왔다고 한다. 또 다른 피해가 유발될 수 있는 상황이다.
현재 B 씨 역시 A 씨와 마찬가지로 경찰로부터 수사가 종결될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B 씨는 “추석 연휴가 껴 있어 수사관 배정도 늦었는데 수사 종결은 너무 빠른 것 아닌가 싶다. 담당 수사관에게 ‘앞으로도 스캐머를 잡을 수 없다는 게 절망적이다’라고 말했더니 ‘드릴 말씀이 없다’는 반응이 끝이었다”고 말했다.
B 씨는 “창피해서 가족들한테도 금액은 말을 못 했다. 처음에는 진짜 너무 스트레스 받았다. 차도 없고 엄마 해외여행 한 번을 못 보내드렸는데 큰돈을 날렸으니까. 게다가 (범죄) 이름이 로맨스스캠이다. 로맨스가 전혀 아니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외로웠나?’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았다. 피해 생각 자체를 안 하려고 노력 중이다”라고 말했다.
#'돼지도살'이 뭐길래
38세 여성 C 씨는 스스로를 돼지도살(Pig Butchering) 사기 피해자라고 지칭했다. 돼지도살이란 폰지 사기의 일종으로서 로맨스스캠과 암호화폐 투자 스캠이 섞인 신종 사기 방식이다. 사기꾼들이 돼지를 도살하기 전 살을 찌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기를 치기 전 1~3개월 동안 꾸준히 피해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피해 금액을 부풀리는 행위를 묘사하는 용어다.
평소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의 팬이었던 C 씨는 2023년 7월 17일 일론 머스크의 인스타그램 계정이 본인 계정을 팔로했다고 밝혔다. 물론 사칭 계정이었다. C 씨는 “처음에는 일상 대화로 시작했다. 그러다 (스캐머) 본인이 팬들의 자산을 불려주는 것을 좋아한다며 비트코인 투자를 권유했다. 평소 암호화폐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 거절했지만 끊임없는 설득에 결국 10만 원 정도를 투자하게 됐다”고 말했다.
C 씨는 “테슬라 회사 지갑 주소를 보내면서 ‘코인을 보내면 투자를 해서 불려주겠다’고 했다. 이어 은행계좌를 보내면서 한국인 테슬라 직원의 계좌라고 소개했다. 해당 계좌와 코인 지갑으로 50%씩 총 7000만 원 정도를 보냈다”면서 한국 거래소인 업비트와 코인원을 이용하라고 했던 점에 대해 “평소 일론 머스크가 암호화폐에 관심이 많다 보니 한국 거래소도 아는 줄 알았다”고 설명했다.
스캐머는 본인을 일론 머스크라고 믿게 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미국 시간 기준으로 오전에 테슬라와 스페이스X 출근 인증샷을 보내는 것부터 위조로 만든 본인의 명함, 여권 등을 보여줬다. 다른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영상 통화도 했다. C 씨는 “분명 일론 머스크가 맞긴 했다. 딥페이크 기술을 사용한 것 같다. 몇 초가량 흰색 티셔츠를 입은 채 ‘How are you’라며 인사를 하고 끊겼다가 이내 또 전화를 걸곤 했다”고 말했다
스캐머가 C 씨를 인출책으로 이용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스캐머는 C 씨에게 5~10% 정도 수수료를 줄테니 1억 원을 비트코인으로 바꿔서 본인의 지갑으로 보내 달라고 했다. 이어 테슬라 직원으로 채용하겠다는 조건도 내걸었다. C 씨가 이체 한도에 걸린다고 하자 한도를 늘리는 방법까지 얘기해줬다. 관련 내용을 검색해본 C 씨가 “인출책이 될 수 있어 위험한 것 같다”고 거절하자 스캐머는 “투자는 멈추지 말아 달라.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며칠 뒤 C 씨가 “여기서 그냥 끝내겠다”고 하자 스캐머는 “얼마나 더 증명해야 믿어줄 거냐”라면서 본인을 믿어주지 않는 C 씨에게 속상한 심정을 호소했다. C 씨 역시 남편과 상의 없이 돈을 입금했다는 죄책감에 마음이 급해졌다. 돈을 찾으려면 더 입금하라는 말에 속아 피해 금액은 점점 커졌다. 피해자가 급한 마음에 피해 금액을 키워나가는 돼지도살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흔히 말하는 가스라이팅 수법도 교묘하게 활용했다. 스캐머는 주변에 일론 머스크를 만난 사실을 자랑하고 싶다는 C 씨에게 “당신은 입이 무거운 사람이다. 당신을 신뢰한다”면서 “남편한테 아프다고 거짓말을 해 돈을 투자해라. 대신 투자에 성공하면 그때 놀라게 하면 되지 않느냐”고 설득했다.
C 씨는 “보이스피싱과 같은 마찬가지로 사람을 굉장히 불안하게 한다. 즉시 시키는 일을 해야 되는 분위기를 만든다. 사람이 불안하고 초조하면 판단력이 더 흐려진다. 사기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약 한 달이 지난 8월 말쯤 C 씨는 사기 피해 사실을 인지하고 경찰을 찾았다. C 씨의 주장에 따르면 경찰은 암호화폐 투자 사기라는 말에 “그건 좀 힘든데요”라면서 아쉬운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실제 전문가에 따르면 암호화폐 사기의 경우 피해액을 되찾을 확률이 매우 낮다고 한다.
C 씨는 “10년 정도 사고 싶은 것 아껴가면서 모은 돈이다. ‘차라리 그 돈으로 하고 싶은 걸 할걸’ 하고 후회한다. 만져보지 못한 돈을 사기 당하니까 허무하다”라면서 “그러다 보니 극단적인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7000만 원에 연연하면 건강 해친다. 밥 많이 먹고 건강관리 잘하라’는 엄마의 말에 남아 있는 인생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버티고 있다”고 심정을 토로했다.
#기타 신종 사기 유형들
현재 로맨스스캠 피해자 모임 카페의 운영진인 40대 여성 D 씨는 2020년 6월 로맨스스캠 피해를 당했다. 그녀가 당한 사기 유형은 ‘페이크 은행’이다. 현재 페이크 은행은 고도로 발전해 다른 사기 방식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D 씨는 카페 회원 중 드물게 소송에서 승소해 피해 금액 일부를 돌려받은 피해자다.
D 씨는 “(스캐머가) 가짜 은행 사이트를 만든 뒤 자신의 계좌와 아이디를 알려고 이체를 부탁했다. 이미 친분이 쌓인 단계여서 의심을 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이체를 했다. 당시에는 ‘나에게는 피해가 없지’라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곧 계좌가 잠긴다. 스캐머는 피해자 탓을 하며 신분증과 개인정보를 은행에 제출해 계좌를 풀어 달라고 요구한다. 당황한 피해자들은 요구를 들어주게 되고 이때부터 돈을 송금하는 등 사기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당황하지 않는 피해자들을 겨냥해 은행에서 수수료를 받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스캐머 계좌에 있는 가짜 돈의 10% 정도를 수수료로 내야 된다고 몰아가는 방식이다. 물론 이 돈들은 모두 허상이며 피해자들이 보내는 돈은 진짜 은행 계좌로 흘러 들어간다. D 씨는 “저의 경우 수수료 요구를 하지 않았지만 페이크 은행 계좌 자체가 가짜이기 때문에 받기로 했던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4~5번 송금을 하고 7000만 원 정도의 피해를 봤다”고 말했다.
D 씨는 “사실 신원 미상의 괴물들을 상대로 소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신 계좌주를 상대로 소송하는 것은 가능하다. 물론 계좌주가 한국인이어야 한다. 외국인 계좌주의 경우 잡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D 씨는 1심 패소 이후 항소심에서 한국인 계좌주 상대로 일부 승소를 했다. 1심에서 피고가 주장했던 논리가 기각됐기 때문이다. 당시 계좌주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했지만 돈을 이곳저곳에 이체하는 과정에서 차액이 발생했고 이를 계좌 대여 수수료로 볼 여지가 생겼다. D 씨는 로맨스스캠 피해자 모임 카페에서 돈을 돌려받은 첫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계좌주는 본인이 편취한 400만 원을 반환하는 의무 외에 형사처벌 없이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D 씨는 “신고한 날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서 여러 생각을 했다. 정말 많이 힘들었다. 돈 때문에 죽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포기했다. 가해자를 용서치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
로맨스스캠 피해자 모임 카페 운영진인 D 씨로부터 외부에 드러나지 않은 비극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D 씨는 “극단적 선택을 하신 분들도 있다. 가족이 피해자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카페 일부 회원들만 알게 되는 경우다.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 2023년 11월 로맨스스캠 가운데 ‘채팅 환전 사기’로 20대 후반 피해자가 마포경찰서 옥상서 투신해 사망한 사례가 있다.
D 씨에 따르면 미군이나 의사를 사칭하는 방식은 이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오히려 가짜 사이트를 만들고 대본을 짜서 치밀하게 피해자들을 속이는 범죄 유형이 기승을 부린다. 또한 교묘한 사기 수법에 당한 피해자들 가운데 일부는 신고를 하면서도 스캐머를 믿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일종의 인지부조화 상태다.
D 씨가 소개한 신종 사기 유형에는 채팅 환전 사기, 가상부동산 사기, 페이크 쇼핑몰 등이 있다. 채팅 환전 사기의 경우 아프리카TV와 같은 플랫폼에서 돈으로 활용되는 별풍선 등을 공짜로 환전해 가라는 미끼를 던진 뒤 가짜 사이트에 접속하도록 유도해 환전 수수료를 편취하는 방식이다.
가상부동산은 최근 유행하는 사기 유형으로 암호화폐 사기와 비슷하다. 가상부동산은 개발자가 만들어둔 3차원의 가상 세계에서 땅을 거래하는 투자 방식을 말하는데 얼마든지 새로운 땅을 만들어 낼 수 있어 폰지 사기에 가깝다. 페이크 쇼핑몰은 판매자가 상품 재고를 마련해두지 않은 채 주문을 처리하는 유통 방식을 뜻하는 드랍쉬핑(Dropshipping)을 주로 악용하는 사기 범죄다. 드랍쉬핑 방식으로 운영되는 쇼핑몰에 투자를 유도한 뒤 투자금을 편취하는 방식이다.
로맨스스캠 피해자 모임 카페 회원들을 노린 2차 사기 유형도 있다. D 씨는 “카페에 기자를 사칭하고 접근한 경우가 두 번이나 있었다. 취재를 하는 것처럼 접근해 도와주는 척하다가 돈을 요구해 두 계정을 강제로 탈퇴 시켰다. 카페 규정이 엄격해진 것도 이러한 사건들이 계기로 작용했다. 이미 돈을 잃고 괴로워하는 피해자들을 상대로 2차 사기를 벌이는 것은 극악무도한 짓”이라고 말했다.
43세 남성 E 씨는 암호화폐 사기 피해자로서 2차 사기에 당할 뻔했던 경험을 공유했다. 한 인스타그램 계정은 DM을 통해 E 씨에게 “로맨스스캠 피해자를 도운 경험이 있다. 수수료를 조금 받고 돈을 받아내 주겠다”면서 돈을 요구했다. 시간은 2~3일이 걸린다고 말했지만 문제 해결을 대가로 선입금을 받는 전형적인 2차 사기 수법이다.
#"보이스피싱과 뭐가 다른가"
로맨스스캠 피해자들은 보이스피싱과 비슷한 수준의 제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A 씨는 “로맨스스캠과 보이스피싱이 다를 바가 없는데 왜 대처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경찰과 은행이 서로 손을 못 쓰는 상황이 피해자들에게는 더 큰 고통”이라고 말했다. B 씨는 “(로맨스스캠을) 보이스피싱과 다르게 취급할 필요를 모르겠다. 특히 지급정지 관련해서 돈줄이 막히지 않으면 스캐머들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대포통장 계좌들이 그대로 이용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신고 절차와 관련 법안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D 씨는 “물론 주변에 알려질까 두려워서 신고를 하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피해자들이 신고 절차를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했다. 이어 “지급중지 요청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법안 개정이 필요하다. 보이스피싱의 경우 피해 방지 예방센터도 있고 콜센터도 운영되는데 로맨스스캠은 그런 기관이 아예 없다”고 지적했다.
대중의 인식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C 씨는 “뉴스 댓글을 보면 2차 가해성이 짙은 비난을 한다. 재앙을 겪은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호소했다. D 씨는 “로맨스스캠은 로맨스가 없는 로맨스다. 일부 언론에 묘사되는 것처럼 사랑에 빠져서 불구덩이에 뛰어든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쌍해서 도와줬다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피해자들한테 상처가 되는 말들을 하지 않도록 사회적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손우현 기자 woohyeon1996@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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