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리시마는 히로시마현 출신으로 메이지가쿠인대학 재학 중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에 합류했다.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은 일본에서 이른바 ‘신좌익’이라 불리는 과격무장단체다. 1974년부터 1975년 사이 11건이나 되는 연쇄 기업 폭파 사건을 일으켰다. 이들은 제국주의 일본을 ‘악’으로 간주하고 주로 전범기업을 폭파 테러의 타깃으로 삼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미쓰비시중공업 빌딩 폭파 사건’으로 직원과 행인 8명이 사망하고, 380명이 중경상을 입은 대참사가 됐다.
NHK에 따르면 “기리시마는 1975년 4월 도쿄 긴자에 있던 한국산업경제연구소를 사제폭탄으로 터뜨렸다는 혐의로 지명 수배됐다”고 한다. 경시청은 당시 기리시마가 과격무장단체에서 폭탄 제조 및 현장 사전답사 등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일련의 폭파 사건을 둘러싸고 단체의 주요 인물들이 일제히 체포됐지만, 기리시마 용의자만 행방이 묘연했다. 조직원 중 유일하게 단 한 번도 체포되지 않은 인물이다. 사건 발생 5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의 열차역이나 파출소 등에는 기리시마의 수배 전단이 붙어 있었다. 장발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웃고 있는 모습이 낯익은 일본인도 많을 것이다.
그러던 중 올해 1월 오랜 수사가 전환점을 맞았다. 기리시마라고 자처하는 인물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당초 남성은 우치다 히로시라는 이름으로 응급실에 이송됐다. 말기 위암으로 몸이 바짝 마르고 위중한 상태였다. 병세가 악화되자 남성은 “최후는 본명으로 맞이하고 싶다”며 자신이 기리시마 사토시라고 털어놨다. 현장에 출동한 수사원에 의하면 “당시 폭파 사건 가담자가 아니었다면 알 수 없는 상황을 진술했다”고 한다.
남성은 우치다 히로시라는 가명을 쓰고 후지사와시의 토목회사에서 일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금융계좌가 없어 월급은 현금으로 받았다. 1년 전부터 위암을 앓아왔으며 건강보험증을 소지하지 않아 자비로 치료 중이었다. 하지만, 신원을 밝히고 며칠 되지 않아 남성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증언을 바탕으로 해외 도피 중인 공범자의 행방을 쫓으려던 수사당국의 계획도 무너졌다.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은 1975년 기리시마 용의자를 제외하고 전원 검거됐지만, 다이도지 아야코와 사사키 노리오는 또 다른 일본의 과격무장단체였던 ‘일본적군’이 해외에서 벌인 인질극과 항공기 납치사건으로 석방을 요구해 풀려났다. 이후 지금까지 도피해 국제지명수배 중이다. 기리시마의 공소시효는 공범자 다이도지 아야코 등이 해외 도피함에 따라 정지된 상태다.
미쓰비시중공업 폭파 사건의 피해자 가족은 “기리시마로 추정되는 남성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보도되자, “만약 진짜 본인이었다면 ‘사건을 사과하기 위해 신원을 밝혔다’고 말해 줬으면 했다. 그 한마디를 들으면 조금은 구원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낙담했다.
일본 소셜미디어(SNS)에서는 “결국 체포되지 않았으므로 경시청 공안부의 완전한 패배”라는 목소리가 잇따랐다. “죽기 전 스스로 신원을 밝혔으나 잡을 수도 조사할 수도 형벌을 줄 수도 없게 됐다”면서 “수사 관계자로서는 가장 억울한 상황”이라는 의견이다.
자칭 ‘기리시마’ 남성이 거주하던 방은 다다미 6장(약 3평) 정도의 크기로, 빈 도시락과 골판지 상자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한다. 기리시마의 친족들은 시신 인수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독한 최후였다. 한 친족은 교도통신에 “(지명수배) 포스터를 볼 때마다 괴로웠다. 50년이나 도망쳤으면, 가명 그대로였다면 어땠을까”라고 복잡한 심경을 말했다.
남성은 사망 전 경시청의 임의 청취에서 일련의 사건에 대해 “후회하고 있다”는 취지로 이야기한 사실이 확인됐다. 만약 도망치지 않고 죗값을 치렀다면 다른 삶이었을까. 한 변호사는 “기리시마가 지명수배된 직접적인 혐의인 ‘폭발물 단속 벌칙 위반’의 경우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 혹은 금고로 규정돼 있다”면서 “기리시마와 함께 행동한 것으로 여겨지는 인물 중 한 명은 무기징역, 또 다른 한 명은 징역 18년을 받았다”고 전했다. 징역 18년이 확정됐던 인물은 이미 출소했다.
수사 관계자에 의하면 “기리시마 용의자는 과거에 체포된 적이 없어 지문이나 DNA가 등록돼 있지 않다”고 한다. 이에 일본 경찰은 사망한 남성과 기리시마 친척의 DNA를 대조해 기리시마 용의자가 맞는지 확인하는 절차를 진행 중이다. 기리시마로 특정될 경우 ‘용의자 사망’으로 서류를 송치할 방침이다.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이란? 전범기업 등 대상 12건 폭탄 테러
일본 경찰백서에 따르면 “베트남전쟁을 계기로 1970년대 일본에서는 반전 반미 기운과 함께 반체제 분위기가 고조됐다”고 한다.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은 1970년 다이도지 마사시 전 사형수를 중심으로 결성된 무장투쟁단체다. 이들은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일용직 노동자의 가장 큰 적은 대기업이며, 특히 해외에 진출한 일본 기업에 의해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궁민(窮民)’이 되어가고 있다고 여겨 적대시했다.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를 내세웠다.
1974년 미쓰비시중공업 빌딩 폭파 사건을 시작으로 미쓰이물산, 하자마구미 등 전범기업이 표적이 됐다. 폭파 미수를 포함해 12건의 폭탄 사건을 일으켰는데, 도쿄에 있던 한국산업경제연구소에도 사제 시한폭탄을 설치했다. 일본 전범기업에게 한국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등 아시아 침략 봉사 활동의 거점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반자본주의 극좌 폭력집단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표방한 한국도 투쟁 전선의 대상으로 본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경찰백서는 “극좌 폭력집단의 활동이 날로 과격하게 치닫자 비난 여론이 거세졌고, 동조하던 학생들과 노동자 지지층이 급속히 이탈하면서 이들 단체가 사회적으로 고립돼 갔다”고 밝혔다. 일본 작가 아소 이쿠는 당시의 사회정세에 대해 “어떻게 보면 젊은이들이 순수하게 ‘일본 정부가 잘못했다’ ‘세계를 평화롭게 하자’라는 일종의 정의감으로부터 시작했을 테지만, 수단이 극단적·폭력적으로 변하면서 왜곡돼 갔다”고 평했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