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 라이브즈’ 아시아계 여성 최초 각본상·작품상 후보…낮아진 할리우드 문턱, 김태희·이상희도 진출
한국에서 태어나 캐나다에서 성장한 셀린 송 감독이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로 오는 3월 열리는 제96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에 올랐다. 아시아계 여성 감독이 데뷔작으로 아카데미상에서 가장 중요한 부문인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에 곧바로 오르기는 아카데미 96년 역사상 처음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미국에서 한국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이성진 감독은 1월 8일 열린 제81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성난 사람들(BEEF)’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어 1월 16일 열린 제75회 에미상에서는 작품상과 감독상을 휩쓸었다. 그 작품의 주인공인 한국계 배우 스티븐 연 역시 골든 글로브와 에미상에서 연이어 남우주연상을 싹쓸이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한국계 감독과 배우가 거둔 역대 최고의 성과다.
지금 할리우드에서는 ‘한국 DNA’에 기반한 열풍이 거세가 일어나고 있다. 이전에 없었던 현상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과 황동혁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이 일으킨 K콘텐츠 인기가 이제는 현지에 단단히 뿌리내렸다는 증거다.
#셀린 송 감독은 누구?
‘패스트 라이브즈’는 ‘기생충’에 이어 한국 사람들의 한국 이야기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노린다. 영화는 어릴 때 애틋한 감정을 나눴던 소년소녀가 성인이 된 뒤 뉴욕에서 다시 만나 며칠간 함께 지내면서 떠올리는 추억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배우 유태오와 한국계 미국인 배우 그레타 리가 주연을 맡았다.
영화는 셀린 송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와 정사가 녹아있는 작품이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감독은 10대 때 가족과 캐나다로 이주해 성장했다. 이후 뉴욕으로 건너가 극작가로 활동하면서 한국의 만재도 해녀들의 이야기를 엮은 연극 ‘엔들링스’ 등을 선보였다. 앞서 ‘기생충’이 온전히 한국을 배경으로 한국어 대사를 통해 작품을 완성한 것처럼 ‘패스트 라이브즈’도 한국인의 정체성과 감정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셀린 송 감독은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주목받는 연출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아시아계 신인 여성 영화감독으로 작품상 후보에 오른 첫 번째 인물이기 때문이다. 나란히 작품상 후보에 오른 ‘오펜하이머’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까지도 셀린 송 감독을 극찬하면서 “미묘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평했다. ‘셰이프 오브 워터’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지난 20년 사이 나온 최고의 장편 데뷔작”이라고 호평했다.
셀린 송 감독은 영화 ‘넘버3’와 ‘세기말’ 등을 연출한 송능한 감독의 딸이다. ‘넘버3’는 신인이던 송강호의 명대사로도 잘 알려진 작품이다. 또한 큰아버지는 임권택 감독의 대표작인 ‘씨받이’, ‘길소뜸’ 등 시나리오를 집필한 송길한 작가다. 대대로 이어진 영화 DNA를 물려받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주목받는 주인공이 됐다는 사실도 흥미를 자아낸다.
#‘이성진’으로 미국서 활동, 골든 글로브·에미상 석권
올해 골든 글로브와 에미상에서 가장 큰 화제를 모은 작품을 만든 주인공들 역시 한국계 창작자들이다. 이성진 감독과 배우 스티븐 연이 그 주역이다. ‘성난 사람들’을 통해 제81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의 감독상과 남녀 주연상, 제75회 에미상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 남녀주연상 등 8관왕을 휩쓸었다.
골든 글로브와 에미상은 전 세계 대중문화의 중심인 미국에서도 주류 콘텐츠들이 주목받는 무대다. 그동안 한국계 배우 산드라 오, ‘오징어 게임’이 대성공에 힘입은 황동혁 감독과 이정재 등이 수상 성과를 거뒀지만 동시에 두 개 시상식의 주요 부문을 한국계 창작자들이 싹쓸이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성난 사람들’의 극본을 쓰고 연출한 이성진 감독은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한국계 미국인이다. 영어 이름 대신 이성진(LEE SUNG JIN)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낸다. 전 세계 190여 개국에 공개된 ‘성난 사람들’ 크레디트에도 이성진이라는 한국 이름을 올렸다. 이성진 감독은 한국계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작품 곳곳에 녹여 넣었다. ‘성난 사람들’의 주인공 스티븐 연은 극 중 한국계 이민자 가정의 장남으로, 돈을 벌어 부모를 편하게 모시고 싶은 ‘K장남’의 모습을 보인다. 극의 주요 무대 역시 한인 교회로 설정돼 있다.
2021년 영화 ‘미나리’로 아시아계 배우로는 처음 미국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스티븐 연은 이번 골든 글로브에서 아시안 배우 가운데 처음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역사를 썼다. ‘미나리’ 역시 미국에 정착한 한인 이민 가정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한국계 미국인 정이삭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국계 창작자들의 눈부신 약진, 그 바탕이 되는 한국 DNA가 녹아있는 작품의 선전이 어느 정도인지 엿보이는 기록들이다.
#낮아진 할리우드 문턱…김태희부터 이상희까지
상황이 이렇다 보니 최근 할리우드로 진출하는 배우들의 보폭도 빨라지고 있다. 해외 활동에 뜻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배우들의 작품 활동 역시 눈에 띈다. 배우 김태희는 아마존 프라임비디오 오리지널 시리즈 ‘버터플라이’를 통해 미국 작품에 처음 출연한다. 미드 시리즈 ‘로스트’로 유명한 데니얼 대 킴이 주연과 제작을 맡은 ‘버터플라이’는 전직 정보요원을 둘러싼 첩보 액션극이다. 김태희가 어떤 역할을 맡을지 아직 구체적으로 공개되지 않았지만 글로벌 OTT 시리즈에 처음 출연해 활동의 무대를 넓히는 새로운 도전의 측면에서 주목받고 있다.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는 배우 이상희는 넷플릭스가 제작하는 미국 오리지널 시리즈 ‘더 리크루트’ 시즌2의 주연을 맡았다. CIA가 연루된 스파이의 세계를 그린 액션 시리즈다. 이상희는 극 중 한국 국정원 요원(유태오 분)의 아내인 한국인 캐릭터 난희 역을 맡았다.
이외에도 ‘오징어 게임’의 이정재는 디즈니 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애콜라이트’의 주연을 맡아 촬영을 마쳤다. ‘오징어 게임’이 낳은 스타 정호연 역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연출하는 애플TV 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디스클레이머’에 출연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한국 배우들의 할리우드 진출이 대대적인 뉴스로 주목받은 사실과 비교하면 최근의 흐름은 격세지감 그 자체다.
이호연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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