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웅 OST 참여 효과 그 이상…명배우 연기력 바탕 인생 성찰 이끌어내며 호평 일색
2월 극장가는 대표적인 비수기다. 그나마 설 연휴가 2월에 있는 경우 반짝 대목이 되기도 하지만 영화계 전반에 불황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2024년 상황은 전혀 다르다. 설 연휴에도 별다른 대작 영화는 개봉하지 않았다. 한국 영화로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창고에 들어갔던 ‘시민덕희’가 뒤늦게 이번 설 연휴에 개봉했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2월 19일까지 ‘시민덕희’는 165만 3388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설 연휴 흥행 1위는 외화 ‘웡카’로 247만 1054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두 영화 모두 흥행이 크게 기대된 작품은 아니지만 별다른 경쟁작 없이 설 연휴 기간 극장가를 지키며 예상보다는 높은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이로 인해 2월 19일 기준 2024년 연도별 박스오피스 역시 ‘웡카’와 ‘시민덕희’가 1, 2위를 기록 중이다.
그런데 2024년 극장가에는 특이한 부분이 하나 있다. 애초 흥행력에선 그리 주목받지 못하는 독립영화들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작품은 71만 533명의 관객을 동원한 정치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과 24만 8736명의 관객을 동원한 독립영화 ‘소풍’이다. 상업영화로 보면 기대 이하의 흥행 성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관객이 1만 명을 넘기기도 쉽지 않은, 10만 명만 넘기면 역대 흥행 순위에 오를 정도인 독립영화계를 기준으로 보면 두 편 모두 엄청난 흥행세다.
1월 10일 개봉한 정치 다큐멘터리 영화 ‘길위에 김대중’이 11만 817명의 관객을 동원했을 당시에도 엄청난 흥행력을 선보인 독립영화라는 반응이 이어졌는데 ‘건국전쟁’과 ‘소풍’은 이를 가볍게 뛰어 넘었다.
아무래도 정치 다큐멘터리 영화는 관객의 정치색에 따른 반응이 갈리는 데다 특정 정치인에 대한 팬덤도 흥행에 기여한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과 진보 성향의 관객들이 11만 관객을 동원한 데 이어 이번에는 고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는 보수 성향 관객들이 대거 극장으로 몰려들고 있다. 그동안 진보 색채의 정치 다큐멘터리 영화는 많이 제작됐으며 흥행작도 여러 편이 나왔지만, 이번처럼 보수 색채의 정치 다큐멘터리 영화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흥행력이 더욱 배가되는 분위기다.
이런 측면에서 더욱 흥행 성적에 눈길이 가는 작품은 순수 예술 독립영화 ‘소풍’이다. 나문희, 김영옥, 박근형 등이 주연을 맡았는데 남녀노소 관객들에게 두루 사랑받는 노년의 명배우들이다. 그렇지만 탄탄한 팬덤이 존재하거나 티켓파워를 자랑하는 배우들은 아니다. 과거에도 중·노년들이 주연으로 참여해 흥행에도 성공한 영화가 분명 존재했다. 그렇지만 독립영화가 아닌 상업영화로 기획된 작품들이었다.
영화 ‘소풍’의 흥행에 엄청난 에너지를 불어 넣으며 초기 흥행을 주도한 것은 OST 작업에 참여한 가수의 팬덤이다. 바로 2024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가수 임영웅이다. 임영웅은 드라마 OST에는 몇 차례 참여했지만, 거듭된 요구에도 영화 OST는 참여했던 적이 없다. 그러다 ‘소풍’에서는 자작곡 ‘모래 알갱이’로 OST에 참여했다. 인생 황혼기의 인물들이 쌓아가는 우정을 그린 영화가 더 많은 관객에 알려지면 좋겠다는 임영웅의 바람이 ‘모래 알갱이’ 삽입 결정으로 이어졌다.
사실 ‘모래 알갱이’는 주인이 따로 있는 곡이다. 듣는 이들에게 위로와 치유의 감흥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반영된 곡으로, 임영웅은 이 노래를 발표하며 “팬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길 바란다”고 밝힌 바 있다. ‘소풍’ 제작진은 배우들의 절제된 감정이 ‘모래 알갱이’를 통해 관객에게 최고의 감동으로 다다를 것이라고 판단했고, 임영웅이 제작진의 이런 진심어린 부탁을 받아들이면서 영화 엔딩곡으로 활용됐다.
그렇게 영화 ‘소풍’에게 ‘모래 알갱이’를 빼앗긴(?) 원주인인 임영웅의 팬들은 직접 극장을 찾아 다시 이 노래의 주인이 됐다. OST가 돼 영화 관객을 위한 노래가 된 만큼 임영웅 팬들이 ‘소풍’의 관객이 된다면 다시 한 번 이 노래의 주인이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임영웅의 팬덤은 임영웅의 진심에 반응하며 조용히 영화 ‘소풍’에 힘을 실어줬다.
‘소풍’은 개봉 9일 만에 관객수 20만 명을 넘겼다. 사실 임영웅의 팬덤이 한 번 움직이면 2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임영웅 공식 팬카페 영웅시대 회원수는 20만 명을 넘어섰고, 한 번의 전국투어 때마다 동원되는 누적 관객수도 통상 20만 명을 넘긴다. ‘피케팅(피 튀기는 티케팅 전쟁)’이 필수인 임영웅의 공연으로 단련된 팬들에게 극장 예매는 매우 손쉬운 일이다.
그런데 현재 ‘소풍’의 흥행세는 단지 임영웅 팬덤의 효과로만 보기 어려울 만큼 확대되고 있다. 손익분기점(약 27만 명) 돌파도 임박한 상황이다. 영화 흥행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당연히 그 자체로 좋은 작품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에 적절한 제작사의 홍보가 관객들의 입소문으로 이어지면 비로소 흥행이 이뤄진다. 아무리 좋은 영화일지라도 관객들이 극장을 찾아야 입소문이 나는데 ‘소풍’에서는 그 촉매작용을 임영웅이 담당했다. 그리고 이제 ‘소풍’이 좋은 영화라는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흥행이 시작되는 분위기다.
인터넷 포털 네이버의 실관람객 평점이 8.97점이나 될 만큼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소풍’은 기본적으로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와 가족, 친구, 우정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에 웰다잉과 존엄사 등의 문제에 진지하게 다가서며 인생에 대한 성찰까지 이끌어 낸다. 큰 기대 없이 관람했지만 결국 펑펑 울었다는 평이 가장 많이 눈에 띄는데, 영화를 보며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이 생각났다는 반응도 많았다. 설 연휴에 고향을 가지 않으려 했다가 ‘소풍’을 보고 할머니 생각이 나서 가야겠다는 반응을 보인 평도 있다. 또 자신에게도 이런 친구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남긴 평도 있다.
이처럼 전반적인 관객 평은 김용균 감독의 ‘소풍’ 연출의도가 관객들에게 제대로 전달됐음을 보여준다. 1937년생 김영옥, 1940년생 박근형, 1941년생 나문희 등 국민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이야 따로 말할 필요도 없다. ‘와니와 준하’ ‘불꽃처럼 나비처럼’ 등으로 인정받은 김용균 감독은 특유의 서정적인 미장센으로 보는 관객들의 감성을 자극하며 ‘소풍’의 완성도를 높였다.
김은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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