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시 분리’ 등 경찰 강제조치 근거 없어…관련 법안 단 두 차례 발의, ‘가해자 차단’ 입법 필요
#외도 의심해 여자친구 손가락을…
서울 강동경찰서에 따르면 2월 14일 오전 8시쯤 서울 강동구 소재의 한 병원에서 30대 남성 A 씨가 특수상해 혐의로 긴급체포됐다. 같은 날 새벽 5시쯤 A 씨는 동거 중이던 여자친구 B 씨가 늦게 귀가하자 “다른 남자 만난 것 아니냐”고 따지며 B 씨를 무차별 폭행했는데, A 씨의 폭행은 2시간 동안 이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B 씨는 얼굴을 심하게 다쳤고 어깨뼈가 부러졌으며, A 씨가 폭행 뒤 흉기로 옷과 머리카락을 마구 자르는 과정에서 손가락까지 크게 다쳐 병원에서 봉합 수술을 받았다. 신고하면 죽이겠다는 A 씨의 협박에 B 씨는 병원에 도착해서야 경찰에 신고할 수 있었다.
SBS 인터뷰에서 B 씨는 “손가락에 너무 심하게 피가 나서 ‘진짜 신고 안 하겠다. 제발 병원만 데려가 달라’고 했다. 일단 ‘칼을 들고 가도 된다. 만약에 내가 앞에서 신고하면 바로 나를 찔러도 된다’고 설득했다. (병원에 가서) 간호사한테 살려달라고, 신고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5cm 정도의 열상을 입었으며 신경 손상이 우려돼 수술을 받아야 했다”고 말했다.
경찰 조사 결과 A 씨는 B 씨와 2014년 6월부터 약 9개월 교제하면서 폭행을 일삼았던 걸로 드러났다. B 씨가 교제 폭력으로 남자친구를 경찰에 신고한 건 모두 7차례다. 경찰은 특수상해 혐의로 A 씨를 구속하고, 정확한 범행동기와 그동안의 폭행 경위 등을 조사 중이다.
경찰은 지난 1월부터 내부 지침에 따라 B 씨를 교제폭력 보호대상 ‘A 등급’으로 지정했다. A 등급에 대해서는 한 달에 한 번씩 경찰이 유선으로 안전을 점검하고 피해자 요청 시 스마트워치를 지급하거나 신변 보호가 이뤄진다. 하지만 B 씨는 A 씨의 협박과 회유 등으로 보호조치를 신청하지 않아 경찰도 적극적으로 나설 수가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단순 사랑싸움? ‘중범죄 전조 증상’
전문가들은 지속적인 교제 폭력이 보복 살인 등 중범죄의 전조 증상이라고 입을 모은다. 2023년 5월 서울 금천구에서 30대 남성이 교제 폭력 사건으로 경찰 조사를 받고 집에 돌아간 지 1시간 만에 신고자인 동거녀를 보복 살인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가해자는 먼저 경찰 조사를 받고 나와 피해자의 집 지하주차장에서 1시간가량 기다리다가 범행을 저질렀다.
피해자가 처벌 의사를 밝혔음에도 가해자가 구속되지 않아 대형 범죄로 이어진 사례도 있다. 2018년 동거녀를 상습폭행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나온 30대 남성이 한 달 뒤 동거녀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이 남성이 같은 해 3월 동거녀를 폭행하고 집에 불을 지르려 한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도주 염려가 적다는 이유로 법원에서 기각됐다. 이 남성은 영장이 기각돼 풀려난 뒤 이 같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교제 폭력이 끊이지 않는 이유로 피해자가 원하지 않으면 처벌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라는 점이 꼽힌다. 교제 폭력의 경우 대부분 ‘폭행죄’로 간주된다. 일반 폭행은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이마저도 피해자가 처벌 의사를 철회하면 처벌되지 않는다. 교제 폭력 가해자는 피해자의 주거지, 직장, 가족 신상정보 등 많은 개인정보를 알고 있기 때문에 보복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피해자들이 합의에 이르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물론 합의서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곽준호 법무법인 청 변호사는 “예전처럼 합의서만 쓰면 마냥 선처가 되지는 않는다. 교제 폭력 사건의 특성을 재판부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초범이라 하더라도 폭력 정도가 심하면 합의서와는 별개로 실형이 선고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또한 교제 폭력은 가정 폭력이나 스토킹 범죄와 달리 즉시 분리 등 경찰이 강제적 조치를 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다. 가정 폭력의 경우 가정폭력처벌법에 따라 경찰이 재발 우려가 있는 사안에 대해 긴급임시조치를 통해 직권으로 가해자 퇴거 명령을 신청할 수 있다. 스토킹 범죄의 경우도 스토킹 처벌법에 따라 신고 즉시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하며, 피해자 요청 시 접근금지 조치가 실시된다. 교제 폭력 피해자는 직접 요청해야만 가해자와 긴급 분리 조치가 가능하다.
일각에서는 ‘왜 맞으면서 계속 만나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교제 폭력 유형의 특성상 가해자는 피해자를 주변인과 단절시키거나 자신의 지배하에 두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 과정에서 폭행이나 성범죄가 발생한다. 특히 가스라이팅이 교묘하게 이루어진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얘기하기 어렵다.
곽준호 변호사는 “교제 폭력은 가스라이팅이 주로 동반된다. 쉽게 말해, 때릴 정도면 말로는 얼마든지 피해자에 대한 억압이 들어간 상태일 확률이 높다. 가해자들은 연인을 정신적·육체적으로 지배하면서 폭력을 행사한다. 따라서 교제 폭력 사건은 면밀한 보호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피해자 느는데 입법 ‘지지부진’
교제 폭력 신고와 검거 건수가 급증세인 만큼 입법을 미룰 수 없는 상황이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2023년 교제 폭력으로 검거된 피의자 수는 총 1만 3939명으로 2019년(9858명) 대비 약 41% 증가했다. 교제 폭력 범죄 신고 건수도 4년 동안 2만 6000여 건 늘어나 2023년 7만 7150건을 기록했다.
하지만 교제 폭력의 입법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은 진전이 없다. 국회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접근 금지 등 교제 폭력 피해자 보호를 내용으로 하는 법안은 21대 국회에서 두 차례 발의됐다. 더불어민주당 권인숙·박광온 의원은 기존의 가정폭력처벌법에 교제 폭력을 막을 근거를 마련하자는 내용의 법 개정안을 2021년 1월과 3월 각각 대표발의했지만 논의 없이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이처럼 입법 과정이 더딘 까닭은 교제 관계 정의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입법을 위해선 교제 폭력의 개념과 대상, 유형 등을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일반 폭력과 달리 교제 폭력은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법 규정이 필요한 게 사실”이라면서도 “연인 사이를 어떻게 정의할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도 함께 진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가해자의 접근을 차단하는 형식의 입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이윤호 고려대사이버대 경찰학과 석좌교수는 “피해자에게 스마트워치를 지급하는 제도는 정말 미흡한 점이 많다”면서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게 스마트워치를 채워야 한다. 경찰이 가해자의 위치를 모니터링해 피해자 근처에 접근하면 출동하는 방식이 더 자연스러운 분리 조치다. 피해자가 피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가 오지 못하게 막는 것이 정의”라고 지적했다.
곽준호 변호사는 “교제 폭력 피해자를 보호대상으로 지정해 모니터링하는 현행 제도는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 경찰 입장에서는 보호 대상 근처에 상주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결국 폭행 사건이 발생해도 출동하는 데 일정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가해자에게 전자발찌 등을 채워 피해자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고, 경찰력을 높여 예비 보호조치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손우현 기자 woohyeon1996@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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