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환 감독 희대의 명작, 거장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메가폰 잡아…엠마 스톤 등 출연 논의 중
2003년 4월 4일 영화 ‘지구를 지켜라!’, 같은 달 25일 영화 ‘살인의 추억’을 연이어 개봉한 제작사 싸이더스의 차승재 당시 대표가 한 말이다. 그만큼 극찬했던 장준환 감독의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는 7만 3132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순제작비 33억 원, 마케팅비 12억 원으로 당시 기준에선 블록버스터급 투자가 이뤄진 기대작 상업영화였지만 관객들은 이 영화를 외면했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 ‘지구를 지켜라!’는 영화 팬들 사이에서 희대의 명작으로 여전히 호평받고 있다. 그리고 이제 곧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될 예정이다.
#비운의 명작
2003년 당시 싸이더스는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제작사였지만 ‘지구를 지켜라!’의 흥행 참패는 너무 충격적이었다. 3주 뒤 ‘살인의 추억’ 개봉이 예정돼 있었지만 흥행 가능성은 더 낮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플란다스의 개’로 실력을 인정받은 봉준호 감독이지만 상업영화 감독으로 성공할지는 아직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장기 미제 사건을 다룬 ‘살인의 추억’은 범인이 잡히지 않는 형사물이라는 치명적인 한계가 존재하는 탈장르적 요소의 영화였다. 순제작비 26억 원에 마케팅비 15억 원으로 ‘지구를 지켜라!’보다 투자 규모가 작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살인의 추억’은 525만 5376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대박이 났다.
이후 봉준호 감독은 세계적인 거장으로 거듭났다. ‘괴물’ ‘마더’ ‘설국열차’ 등의 대작을 연이어 선보였고 ‘기생충’으로 미국 아카데미까지 휩쓸었다. 반면 장준환 감독은 2013년 ‘화이 : 괴물을 삼킨 아이’를 선보여 239만 4466명의 관객을 동원했지만 ‘지구를 지켜라!’ 당시의 집중됐던 평단의 호평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2017년 영화 ‘1987’이 723만 1638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력과 작품성을 모두 인정받았지만 ‘지구를 지켜라!’ 당시의 독창적인 색채는 아니었다.
평단과 언론의 압도적인 호평에도 불구하고 ‘지구를 지켜라!’는 극장 흥행에 실패했다. 만약 당시 ‘지구를 지켜라!’도 흥행에 성공했다면 한국 영화계가 또 달라졌을 수 있다. 당시에는 홍보 마케팅의 실패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구를 지켜라!’에 마케팅비 12억 원을 쓴 싸이더스는 제작비가 7억여 원 적게 들어간 ‘살인의 추억’에 마케팅비는 3억 원 더 많은 15억 원을 투입했다.
특히 지금은 물론이고 그 당시에도 너무 유치해 보인 영화 포스터에 대한 지적이 가장 많았는데 사실 포스터 탓을 하기도 어렵다. 영화 ‘지구를 지켜라!’는 마지막 5분을 빼면 전혀 다른 영화가 된다. 납치극을 중심으로 부조리한 사회 문제를 드러내는 블랙 코미디 장르의 영화로 흠잡을 데 없는 명작이다.
그런데 마지막 5분의 반전으로 장르가 SF가 됐다. 그 5분 때문에 ‘명작’의 범주를 넘어선 ‘희대의 명작’이 됐지만 너무 재기발랄한 독창성은 홍보에 걸림돌이 됐다. 반전은 감춘 채 블랙 코미디와 SF를 넘나드는 영화를 홍보하는 데에는 한계가 분명할 수밖에 없다.
극장 개봉 당시에는 흥행에 참패했지만 ‘지구를 지켜라!’는 이제 희대의 명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2003년 개봉 당시에도 흥행 성적만 아쉬웠을 뿐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부천 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비롯해 부에노스아이레스 국제독립영화제, 브레셀타스틱영화제,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모스크바 국제영화제 등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호평을 받았다.
#제목은 ‘Save The Green Planet!’
2024년 ‘지구를 지켜라’의 리메이크가 결정됐다. 다양한 한국 영화가 세계 각국에서 리메이크됐지만 희대의 명작인 만큼 이번에는 글로벌 영화계가 주목하는 리메이크다.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를 위한 준비 작업이 시작되면서 원작 감독인 장준환 감독은 ‘석세션’, ‘더 메뉴’ 등의 각본을 집필한 윌 트레이시와 함께 각본 작업에 돌입했다. 장 감독이 리메이크작 연출까지 맡을 가능성도 제기됐지만 결국 연출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맡기로 결정됐다. 리메이크작 제목은 영화 ‘지구를 지켜라!’의 영어 제목 ‘Save The Green Planet!’이 될 것으로 알려졌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2009년 ‘송곳니’로 제62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알프스’로 제68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골든오셀라 각본상, ‘더 랍스터’로 제68회 칸영화제 심사위원상, ‘킬링 디어’로 제70회 칸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한 그리스 출신 거장이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로 제75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제72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제39회 런던 비평가 협회상 영국작품상 등을 수상했으며 2023년에는 ‘가여운 것들’로 제80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거머쥐었다.
‘지구를 지켜라!’ 리메이크작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과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춘 아일랜드 제작사 엘레멘트 픽처스의 에드 귀니, 앤드류 로우 프로듀서가 제작을 맡고 아리 애스터 감독의 스퀘어 페그, CJ ENM 등이 공동 제작으로 참여한다. 촬영은 2024년 여름 미국 뉴욕에서 시작될 예정이다.
아직 캐스팅 관련 정보는 공개되지 않고 있는데 미국 매체 버라이어티는 엠마 스톤이 ‘지구를 지켜라!’ 리메이크작 출연을 논의 중이라고 보도했다. 엠마 스톤은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가여운 것들’ 등의 작품에 출연하며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과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다만 어느 캐릭터를 맡을지는 확실치 않다. 원작 ‘지구를 지켜라!’는 ‘병구’(신하균 분)와 ‘강만식’(백윤식)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또 한 명의 주인공은 순이(황정민 분)로 배우 황정민은 이 영화로 부에노스아이레스 국제독립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따라서 엠마 스톤이 ‘순이’ 역할로 출연할 가능성이 높지만 아예 ‘병구’ 역할을 여성 캐릭터로 바꿔 엠마 스톤이 맡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가장 기대되는 캐릭터는 단연 ‘강만식’이다. 배우 백윤식은 이 캐릭터로 당시 국내 3대 영화 시상식이던 대종상과 청룡영화상, 대한민국 영화대상의 남우조연상을 휩쓸었고 제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선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1976년 ‘단둘이서’ 이후 27년여 만에 영화 ‘지구를 지켜라!’에 출연한 백윤식은 강만식 캐릭터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이후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로 거듭났다. 과연 어떤 할리우드 배우에게 이 기막힌 캐릭터가 주어질지 영화 팬들 사이에서도 관심사가 되고 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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