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드라마의 주제일 것 같은 문장. ‘사랑할 땐 살기를 바라고, 미워할 땐 죽기를 바라니 살기를 바라다 죽기를 바라는 그 모순이 미혹’이라는 문장의 매혹도 있었다. 주연 조연 가릴 것 없이 배우들도 모두 명품 연기를 보여주어서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다. 특히 초반에 사라진 최대훈의, 질투에 미혹된 미친 왕 연기는 잊을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하다. ‘연인’ 땐 완전히 매혹되어 길채와 장현, 그리고 양음을 지켜봤는데, ‘세작’은 거리를 두고 보게 된다. 아마도 소재의 차이인 것 같다.
‘세작’의 중요한 소재는 바둑이다. 바둑판은 하나의 세계다. 막상막하인 고수들끼리의 바둑은 승부욕을 자극하며, 영감인지 열정인지 구분이 안 되는 강렬한 희열을 경험하게도 한다. 그러나 승패가 목적이다 보니 그 세계는 전쟁터다. 돌 하나하나가 전사고, ‘나’는 전사를 부리는 장군이다. 더 많은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수를 읽어야 하고, 상대에 밀려서도 안 된다.
늘 전체를 염두에 두고 돌을 놓다 보면 지금 놓는 돌은 미끼일 수도 있다. 기대령 강몽우가 사랑까지도 전체 판을 위한 돌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바둑의 고수답지만, ‘지금 이 순간 여기서 충만하게’를 통해 길 없는 길을 만들어가는 사랑의 노래와는 대조적이다.
반면 ‘연인’에서 중요한 소재는 명창 양음의 노래였다. 지극한 짝사랑을 멈추지 않는 양음은 노래할 때만 마음 놓고 마음을 다 담아 그 사랑을 표현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니 홀린 듯 노래할 수밖에 없다.
“아득히 바라본다. 정다운 그대 얼굴, 먼 바람에 실려 온 그리운, 그리운 그 얼굴….”
음악은 어디서 오는가. 내 안에 원래 있었던 것인지, 삶의 결핍과 상처가 노래가 된 것인지 노래는 마치 신탁처럼 운명을 풀어내는 힘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지금 여기 이 순간, 마음을 들려주는 음악에 공명한다. 머리를 쓰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집중하고, 전체를 위해 돌을 놓는 것이 아니라 돌 하나에서 전체를 본다. 한 존재의 가슴 속에 억류되어 있는 욕망을, 사랑을, 질투를, 그리움을, 눈물을 불러내 그 흐름을 바라본다. 감정이 흘렀던 그 길을 따라가면 생을 이끌어왔던 열정의 힘이 보이지 않겠는가.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그런 느낌이 드는, 잘 만든 영화를 보았다. 박흥식 감독의 ‘해어화’다.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던 진실한 연인이 내 소중한 친구의 소울메이트가 되어 ‘나’ 소율을 떠났다. 게다가 천재작곡가인 연인은 친구에게 딱 맞는 한(恨)의 노래를 만들어 친구를 승천하는 용으로까지 만들었다.
“눈물아, 비 되어라. 아, 침묵아, 이젠 천둥이 되라. 설움아, 너는 폭풍이 되라.”
소율의 꿈이었던 무대 위에 친구가 서서 그녀 속 설움을 승화하고 있을 때 소율은 보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남친의 진실까지. 소율은 친구도, 연인도, 노래도 다 빼앗겼다. 그런데 친구는? 훔쳐간 것이 없다며 당당하다. 사랑은 불가항력이고, 노래는 재능이니. 화가 날수록 소율은 초조해지고 자기를 던져 한바탕 복수를 해보지만 결과는 폐허가 된 삶뿐이다.
그 폐허 속에 찾아온 곡이 있다. ‘사랑, 거짓말이’.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며 ‘헛된 나를 잊는 대신 부디 너만은 잃지 않기를’ 기원하고 영원히 떠난 연인의 곡이다. 그 곡이 명곡인 이유, 바로 소율 영혼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거짓말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상대의 배신이 아니다.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는, 사랑에 대한 ‘나’의 관념이 집착을 낳았기 때문이다. 사랑이 거짓말이 되고, 우정이 분노가 되고, 재능이 아무 소용없어지는 성장통을 겪으며 우리는 사람을, 사랑을, 내 속에서 놀고 있는 감정들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 같다.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