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상당수 미성년자, 영상물 홍보 유도하기도…불법 토토와 카지노 이용해 거래 내역 세탁
#‘제 2의 n번방’ 피해 영상 새로운 n번방에서 판매 중
n번방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난 지 4년이 지났지만 각종 불법 촬영물이 버젓이 판매되고 있다. 일요신문 취재 결과, 영상이 판매되는 곳은 ‘라○ ○○방’, 다른 이름으로는 ‘VIP n번방’(이하 VIP방)이라 불리는 곳이다. 여기서 n은 자연수를 뜻하는 것으로 갓갓 문형욱이 만들었던 n번방의 의미와 동일하다. 문형욱의 경우 1번부터 8번까지 8개의 방을 개설한 반면, 새로운 n번방은 2월 23일 기준 51번방이 운영되고 있으며 입장 인원은 3517명이다.
방은 폭파(삭제)와 생성을 반복했다. 이전 방이 삭제되면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대화방 링크만 공유되는 ‘대피소’ 채널에 새롭게 만든 n번방 주소가 올라왔다. 이 방 운영자는 “텔레그램의 억까(억지로 까기)가 또 시작되었다”며 “51번방으로 접속해달라”고 했다. 게시글 말미에는 화려한 이모티콘과 함께 ‘입장 전 하트 한번씩만 부탁드린다’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회원 간 대화가 금지된 이 방에서 회원들은 앞다퉈 하트를 눌렀다.
무료방에는 VIP방 입장을 유도하기 위한 짧은 영상들이 다수 올라왔다. 맛보기 식으로 올라온 영상 대부분에는 피해자의 신상정보가 함께 기재됐다. 피해자의 나이, 학교 혹은 직업, 때로는 피해자가 입고 있는 교복이 찍혀 올라왔다.
영상 속 피해자 상당수는 고등학생으로 미성년자였다. 현행법상 미성년자 성착취물은 가중처벌 대상이지만 운영자는 오히려 이 부분을 강조했다. 영상 하단에 ‘07년 여고생’이라는 해시태그를 붙이거나 아예 고등학생 모음집을 따로 만들어 올린 뒤 “VIP방에 오면 더 많은 자료를 볼 수 있다”고 홍보했다.
기존에 유포된 불법 촬영물을 판매한 것도 모자라 방에 있는 회원이 직접 제작한 영상물도 공유됐다. 한 남성 회원은 운영자에게 대화를 걸어 “영상에 방 링크가 찍힌 워터마크를 넣으면 되냐”고 물었다. 직접 편집까지 한다는 뜻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얼굴에만 모자이크 처리를 했다. 영상 속 여성의 얼굴은 그대로 노출된 상태였다.
이어 해당 영상을 찍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제가 40번방에 입장해 있으니 그 방에 올려 달라”고 했다. 운영자는 이 대화 내용을 그대로 캡처해 맛보기 영상과 함께 ‘회원 제보 영상!’이라는 제목으로 게재했다. 하단에는 어김없이 ‘풀 버전을 보고 싶으면 VIP방으로 오라’는 말이 붙었다.
‘후회 없을 자료’가 올라온다는 VIP방은 그야말로 성착취물의 온상이었다. 운영자는 ‘O촬’ ‘유출’ ‘sm’ ‘페O쉬’ 등의 키워드를 걸어 놓고 위와 같은 영상들이 매일 50개 이상 올라온다며 자랑스럽게 홍보했다. ‘n번방’ ‘민짜(미성년자)’ ‘O간’ 영상은 또 다른 채널에 올라오는데 원하는 사람만 별도로 초대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5년째 유지 중인 텔레그램의 넘버원 방’이라는 자부심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목표는 돈이었다. 판매 수법은 더욱더 교묘해졌다. 기존 n번방 운영자들이 구매자에게 문화상품권의 PIN번호를 받는 식으로 거래 추적을 피하려다 잡혔다면 VIP방 운영자는 아예 직접적인 금전 거래를 하지 않았다. 대신 자금 세탁이 용이한 암호화폐(가상화폐) 결제를 권유하거나 제휴 업체인 인터넷 토토 사이트에서 매달 5만 원 이상의 정액권 충전을 유도하는 등의 방법을 썼다.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피해자 신상을 드러내던 판매자는 구매자 앞에서만큼은 더없이 친절한 직원이 됐다. 불법 토토를 하지 않아도, 암호화폐 지갑이 없어도 성착취물을 구매할 수 있었다. 그는 “코인을 안 하시더라도 대리업체에서 간단히 알 수 있는 계좌 송금으로 방 입장이 가능합니다”며 다양한 선택지를 제시했다.
불법 딥페이크 업체들과 마찬가지로 SNS를 통한 홍보를 적극적으로 권유하기도 했다. 유료 결제를 하지 않고 VIP방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판매자가 시키는 대로 인스타그램 등 SNS에 홍보글을 올리고 2000회 이상의 조회수를 채워야 했다.
홍보글은 운영자의 지휘 아래 작성됐다. 직접 글 양식과 게재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운영자는 홍보글에 불법 촬영물 캡처본 혹은 짧은 영상을 첨부하라고 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어 ‘글을 여러 번 쓰되, 동영상과 글 내용을 계속 수정해야 한다’ ‘SNS 로직이 바뀌어 중복으로 같은 글을 쓰면 노출이 되지 않는다’ 등의 사후 지침을 제공하기도 했다. 최근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X에서 종종 보이던 음란물 홍보 댓글은 이렇게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최초 제작자 아니어도 중형 선고…불법 촬영물 광고하는 행위도 처벌해야
대화방에서는 “아청물(미성년자가 등장하는 성착취물)만 조심하면 된다”는 말이 오갔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불법 촬영물의 경우 피해자 나이와 무관하게 모두 처벌 대상이라고 지적한다. 한 성범죄 전문 변호사는 “현행법상 불법 촬영물은 최초 유포자가 아니라 단순 시청만 해도 처벌을 받는다. 피해자가 성인이어도 마찬가지다. 상대의 동의 없이 찍는 것은 물론이고 촬영 당시 동의가 있었더라도 유포에 동의가 없었다면, 소지·구입·시청한 사람 모두 처벌 대상”이라고 설명했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14조 제4항에 따르면 촬영 대상자의 의사에 반하여 특정 신체 부위 등을 촬영한 영상 또는 복제물을 단순 소지·구입·저장 또는 시청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한다.
법원의 단죄는 이어지고 있다. 2023년 9월 의정부지법 형사13부는 성착취물 영상을 재가공 유포한 40대 남성 A 씨에게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앞서 A 씨는 기존에 유포된 불법 촬영물에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배경음악을 넣거나 책 형식으로 자체 편집했다. 그는 재가공한 영상물을 인터넷 음란물 전문 사이트에 올렸고 홍보글을 올린 대가로 사이트에서 사용할 수 있는 포인트 등을 획득했다. 현재 텔레그램 VIP방에서 자행되는 범죄 수법과 유사하다.
일부 회원들은 가상사설망인 VPN(인터넷 우회접속 프로그램)을 이용해 서버를 해외로 돌리면 잡히지 않을 것이라 자신하지만 그렇지 않다. 경찰에 따르면 대부분의 VPN 업체는 국제 공조 요청이 들어오면 사용자 기록을 제공해주고 있다.
해외에서 벌어진 범죄도 마찬가지로 잡힌다. 실제로 A 씨가 성착취물을 게시한 곳은 미국령인 괌이었다. 법정에 선 A 씨는 자신은 외국인이며 “괌 내에서는 불법 촬영물을 반포한 행위를 별도로 처벌하지 않는다”며 무죄를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국 연방 형법과 괌 법령에서는 음란물 고의 공개 행위 등을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고, A 씨의 경우 외국인이 대한민국 영토 외에서 대한민국 국민에 대해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 해당돼 국내 형법을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각지대는 존재한다. 정작 성착취물 공유방 증식에 큰 역할을 한 불법 촬영물 홍보 행위에 대한 처벌 조항이 미비한 까닭이다. 청소년성보호법에 따르면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배포·제공을 목적으로 광고·소개한 사람은 3년 이상의 징역, 영리가 목적이라면 5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는다. 그러나 일반 불법 촬영물의 경우 관련 조항이 없다.
관련 법안은 표류 중이다. 2020년 9월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불법 촬영물 처벌 대상을 광고·소개한 사람까지 포함하는 내용의 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3년이 넘은 현재까지 소관위 심사 중이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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