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3일 중국 상하이에서 막을 내린 제25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최종국에서 한국의 에이스 신진서가 중국의 마지막 주자 구쯔하오 9단을 상대로 249수 만에 불계승을 거뒀다. 불가능한 일을 이뤘다는 평가가 줄을 잇는다. 혼자 이뤄낸 단체전 승리였기 때문이다.
신진서와 팀을 이룬 동료선수 4명이 1승도 거두지 못하고 조기 탈락하면서 올해 농심배 한국팀에는 적신호가 켜졌었다. 우승은커녕 이러다가 1승도 못하고 대회가 끝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올 정도였다.
신진서가 등판했을 때 중국은 7연승의 셰얼하오 9단을 비롯해 자오천위 9단, 커제 9단, 딩하오 9단, 구쯔하오 9단 등 초일류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일본의 이야마 유타 9단까지 남아있어 아무리 신진서라 해도 우승은 언감생심처럼 보였다.
#중국 최정예 5명을 무릎 꿇려
2라운드 최종국은 2023년 12월 4일 부산에서 열렸다. 신진서의 맞은편에는 8연승을 노리는 중국의 셰얼하오가 앉아 있었다. 이 셰얼하오에게 한국의 원성진, 변상일, 박정환이 차례로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한국랭킹 1위 신진서는 달랐다. 셰얼하오에게 단 한 번의 기회도 허용치 않고 완승, 기울어가는 승부의 흐름을 가까스로 멈춰 세웠다.
2월 19일, 제25회 농심배 최종 라운드가 중국 상하이에서 막을 올렸다. 신진서의 상대는 일본의 이야마 유타 9단. 이젠 노장의 반열에 들어선 그는 한때 일본 전관왕을 수차례 일궈냈던 강자다. 그리고 그 뒤에는 중국 바둑을 대표하는 최강자 4명이 도열하고 있었다. 한국이 우승하기 위해서는 신진서가 이들을 다 꺾어야 하는 상황. 나중에 신진서가 “이게 가능한 일일까”라고 생각했다던 바로 그 시점이었다.
신진서의 칼춤이 시작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첫 상대 이야마에게 완승을 거둔 신진서는 이제 본격적으로 중국 기사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이번 대회 최대 고비라고 생각했다. 그 대국을 이기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이 생겼다”는 자오천위와의 대국을 승리로 이끈 신진서는 중국랭킹 3위 커제와 2위 딩하오를 차례로 물리치고 마침내 1위 구쯔하오와 마주앉게 된다.
구쯔하오는 최종국과 관계없이 갚아줘야 할 빚이 있는 상대였다. 지난해 있었던 제1회 취저우 란커배 결승에서 구쯔하오는 신진서에게 대역전패의 아픔을 안겨준 인물. 신진서는 후에 “패배의 충격이 하도 커서 일상을 회복하는 데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아픔을 토로하기도 했다. 아무튼 구쯔하오는 신진서에게 역전승을 거둘 만한 저력 있는 강자이기도 했다.
최종국은 앞선 대국과는 달리 쉽지 않았다. 신진서는 중반까지 AI 진단 70% 우세를 유지했지만, 우변에서 치명적인 실수가 등장하면서 역전당하고 만다. 란커배 3국의 역전패가 생각나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초읽기에 몰린 구쯔하오도 완벽하진 않았다. 신진서의 실수로 거의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그 침착하던 구쯔하오에게서 패착이 나오고 만다.
신진서는 국후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대국할 때는 마지막까지 긴장을 풀면 안 되는데 우승컵이 아른거리자 좋지 못한 바둑이 또 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엔 마지막까지 정신을 바짝 차리자고 되뇌었고 그것이 승리로 이어질 수 있었다.”
결국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은 신진서는 마지막 우상귀에서 패를 내는 수단을 찾아냈고, 대형 바꿔치기 끝에 형세는 다시 역전됐다. 중국 정예 5명이 신진서 앞에 차례로 무릎을 꿇는 순간이었다.
#“전성기는 5년 후가 될 것”
농심배에서 '끝내기 6연승'이 나온 것은 처음이다. 7연승은 두 번 있었지만 모두 초반에 나온 것이어서 끝내기 연승에 비해 순도가 떨어진다. 앞선 기록은 2005년 제6회 대회에서 이창호 9단의 ‘상하이 대첩’과 2021년 22회 대회에서 신진서의 ‘온라인 대첩’ 5연승이었다. 더불어 신진서가 기록한 16연승(아직 진행 중이다)은 이창호 9단이 2005년 기록했던 14연승을 뛰어넘는 대기록이다. 또한 한 대회에서 중국의 출전선수 5명에게 모두 승리를 거둔 것도 신진서가 최초다.
24일 입국한 신진서는 공항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극적인 우승을 이뤄내서 기쁘기도 하지만 대회 직전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마냥 기뻐할 수도 없다”면서 “아마 할머니가 하늘에서 함께 해주셔서 좋은 성적이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자신의 전성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스무 살에 세계대회 첫 우승을 했는데 이후 5년은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어서 지금을 전성기라 볼 순 없을 것 같다”며 “향후 5~10년은 꾸준히 성적을 내야 전성기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 바둑에 대한 책임감은 갖되, 부담 없이 즐겁게 대국에 임하고 싶다. 또 인간적으로도 지금보다 성숙한 기사가 되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중국, 국가대표팀 운영에 문제점 제기
올해 농심배는 포기하다시피 했던 국내 바둑계도 일제히 환영하는 분위기다. 송태곤 9단은 “신진서 9단이 혼자 남았을 때 나머지 중국 5명과 일본 1명의 기사를 대입해보면 신진서 9단이 7 대 3 정도로 앞선다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승부는 산술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그중 한 번만 삐끗해도 끝나는 상황에서 전부 버텨냈다는 것이 정말 놀랍다”고 감탄을 표했다.
바둑TV 해설의 박정상 9단은 “중국 바둑의 현 세대를 두고 중국에서는 ‘황금세대’라고 칭한다. 이번 농심배 대표선수 중 자오천위 9단을 제외한 4명이 세계대회 우승을 한 차례 이상 경험해본 선수들이고, 구쯔하오, 딩하오, 커제는 현 중국랭킹 1~3위에 위치해 있는 기사들이다. 이런 기사들을 상대로 신진서 9단이 올킬을 거둔 것은 대단한 위업이다. 중국에서도 충격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19년 만에 다시 안방에서 수모를 겪은 중국 바둑계와 팬들도 충격이 적지 않은 듯 보인다. 중국 바둑의 원로 녜웨이핑 9단은 장탄식을 쏟아내며 “어찌 이렇게 안 될 수가 있는가…. 부진의 원인은 좀 더 살펴봐야 하겠지만 훈련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며 현 대표팀 감독 위빈 9단의 책임론에 무게를 실었다.
또 중국바둑협회 창하오 주석은 현지 인터뷰를 통해 “중국에서 열리는 농심배 3차전은 항상 춘제(설날)가 끝난 후 바로 열리는데, 이 기간은 중국 기사들이 대국이나 훈련 등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 문제”라면서 “농심배 대표 선수들이 대회를 준비하고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심도 있게 논의해봐야 할 것 같다”고 문제점을 짚었다.
우승은 했지만 한국에서도 문제점을 지적하는 소리는 있다. 신진서 9단이 발군이라지만 다른 기사들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어서다. 4년 연속으로 신진서가 마지막을 연승으로 장식한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다른 4명은 농심배에서 통할 만한 실력이 아니라는 뜻도 된다. 실력 향상을 위해 국내 기사들이 더욱 분발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19년 전 상하이 대첩과 다른 점? 더 높아진 만리장성 훌쩍~
“한 사내가 관문을 지키고 있으니, 천군만마도 공략해내지 못하는구나(一夫當關 萬夫莫開·일부당관 만부막개).” 중국의 한 언론이 이백의 촉도난(蜀道難)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 중국과 일본의 고수 다섯 명을 연속으로 무너뜨리고 대역전 우승극을 연출한 이창호 9단의 신기를 극찬한 말이다.
이창호 9단은 2005년 제6회 대회에서 한국팀의 마지막 주자로 나서 뤄시허, 장쉬, 왕레이, 왕밍완, 왕시를 차례로 제압하고 우승컵을 안겼다. 이 9단은 앞서 열렸던 1회부터 6회까지 농심배에서 9연승을 거두며 한 번도 우승컵을 놓친 적이 없어 농심배 ‘철(鐵)의 수문장’으로 불렸다.
당시 이창호의 상하이 대첩은 숱한 에피소드를 남겼다. 한국에 우승컵을 내준 뒤 중국의 창하오 9단은 “한국 기사를 모두 꺾어도 이창호가 남아있다면 그때부터 시작이다”라고 했고, 최종국 상대였던 중국 왕시 5단은 “이 바둑을 통해 하늘이 높다는 걸 알았다”며 머리를 숙였다.
그런데 이번 신진서의 농심배 활약은 이창호 9단의 무용(武勇)을 넘어선다는 게 지배적인 평가다. 이창호 9단은 1회부터 6회까지 6년에 걸쳐 14연승을 완성해냈는데, 신진서는 22회 대회부터 25회 대회까지 4년 만에 16연승이라는 새로운 기록을 작성했다. 그만큼 신진서가 홀로 더 분전했다는 의미다.
상대했던 기사들도 다르다. 당시 이창호는 중국 3명, 일본 2명을 꺾었는데 일본의 장쉬와 왕밍완은 전성기를 넘긴 기사들이고, 뤄시허, 왕레이, 왕시가 중국을 대표한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이번에 신진서가 6연승을 거둔 기사들은 구쯔하오, 딩하오, 커제가 중국을 대표하는 랭킹 1~3위들이고, 자오천위를 제외한 4명은 세계대회에서 한 차례 이상 우승컵을 들어 올린 정상급 기사들이어서 2005년에 비해 순도에서 앞선다.
우승상금 5억 분배는? 신진서 2억 7800만 원 획득
농심신라면배 상금은 우승한 팀에게만 5억 원이 지급되는 승자 독식 구조다. 2위와 3위 팀에게는 개인당 대국료 300만 원과 연승상금 외에 한 푼도 주어지지 않는다. 종전까지 우승상금은 2억 원이었는데 17회 대회부터 5억 원으로 크게 올랐다.
상금배분에 대해 정해진 규칙은 없다. 대회 들어가기 전 선수들이 자체적으로 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기원 관계자는 “한국기원에서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선수들이 상금 배분에 대해 논의한다. 다만 지난해 기준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대회를 기준으로 하면 5억 원의 상금은 일단 출전선수 5명이 70%를 균등하게 배분받는다. 그러니까 선수 1인당 무조건 7000만 원은 지급받는 것이다. 이는 신진서 9단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머지 30%인 1억 5000만 원은 성적에 따라 차등 지급된다. 그중 20%인 1억 원은 승리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그리고 마지막 10% 5000만 원은 우승을 결정지은 사람에게 지급된다. 이번 대회의 경우 신진서 혼자 승리에 기여하고 우승을 결정지었으므로, 1억 5000만 원 전액이 신진서의 차지가 된다. 그러니까 신진서는 총 2억 2000만 원을 상금으로 획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농심배는 3연승을 거둘 경우 연승상금 1000만 원을 지급하고 1승을 더할 때마다 다시 1000만 원이 추가되는데, 신진서는 총 6연승을 거뒀으므로 4000만 원의 연승상금이 추가로 지급된다. 거기에 승패에 관계없이 지급되는 대국료가 대국 당 300만 원이므로 다시 6을 곱하면 1800만 원, 총 2억 7800만 원을 획득하게 된다.
다른 국내 선수들의 경우는 기본 7000만 원에 모두 한 번의 대국만을 소화했으므로 7300만 원이 자기 몫이 됐다.
참고로 신진서 다음으로 많은 수입을 올린 기사는 중국의 셰얼하오 9단이다. 셰얼하오는 중국이 마지막에 패하는 바람에 대회 상금은 놓쳤지만, 7연승(7승 1패)을 거둬 연승상금 5000만 원과 대국료 2400만 원을 더해 총 7400만 원을 챙기게 됐다.
[승부처 돋보기] 한편의 드라마 같은 영웅 탄생기
제25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최종국
흑 신진서 9단(한국) 백 구쯔하오 9단(중국), 249수끝, 흑 불계승
1도[구쯔하오, 노림을 품다]
중반부터 흑의 반면 10집 우세가 꾸준히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다. 보통이라면 신진서에게 이대로 밀려버리는 게 자주 보던 스토리였는데 구쯔하오는 과연 중국랭킹 1위다웠다. 백1의 꼬부림은 노림을 품은 수. A로 밀고나오는 수와 B의 차단을 맞보기로 하고 있다. 흑은 어떻게 처리하는 게 최선일까?
2도[회심의 한 수]
실전에서 신진서의 선택은 흑1이었다. 이쪽을 뚫려서는 전체적으로 엷어진다는 판단. 흑▲ 5점은 ‘어떻게든 수습되겠지’라는 생각이었을까. 여기서 백2에 이어 4의 끼움이 구쯔하오 회심의 한 수였다. 이제 흑▲는 무사하기 어려워졌다.
3도[시한폭탄]
우변에서 신진서의 난조가 계속된다. 흑1도 이상한 수. 우변은 패가 되었는데(그것도 흑이 불리한 늘어진 패) 흑1은 별로 도움이 안 된다. 구쯔하오로서는 바로 이 장면이 바둑을 끝낼 찬스였다. 패를 따낸 백2가 패착 1호. 이것으로 A로 흑 한 점을 개운하게 따냈으면 신진서의 연승행진은 골인 직전에서 멈췄을 것이다. 우상귀에는 무시무시한 시한폭탄이 숨어 있었다.
4도[신진서만 보고 있었다]
백1이 마지막 패착이었다. 우상귀에는 흑2~6까지 패를 내는 교묘한 수단이 숨어 있었던 것. 이것을 구쯔하오는 끝까지 보지 못했고, 신진서는 뒤늦게 발견한 것이 이 바둑의 승패를 바꿨다. 바둑이 끝나자마자 구쯔하오는 제일 먼저 이곳을 짚으며 ‘보지 못했다’고 자책했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