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록파’ 박목월 시인(1915~1978년)의 미발표 육필 시들이 타계 후 46년 만에 세상 빛을 본다. 박목월 시인의 장남 박동규 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자택에 소장하고 있던 박 시인의 노트 62권 등에 담긴 미발표작 가운데 엄선한 164편을 공개한다.
박목월 시인은 생전 노트에 시를 썼다. 그 노트를 원고지에 옮겨 적은 뒤 책으로 출판했다고 한다. 따라서 노트에 담긴 시들은 창작 초기 단계로서 시상(詩想) 전개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 단초가 되는 셈이다.
이 노트들엔 아직 한 번도 공개된 적 없고 문학계에도 발표된 적 없는 시들이 담겨 있다. 시인 김소월·정지용·윤동주 등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들은 작고하기 전에 대부분 시들을 공개하거나 발표했다. 이에 비해 박목월 시인에게 미발표 작품 상당수가 있었다는 사실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왜 생전에 작품들을 공개하거나 발표하지 않고 노트에 그냥 덮어두었을까’ 하는.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박목월 시인의 노트가 있음을 처음 언급한 이는 우정권 단국대 교수였다. 지난 1월 10일 서울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에서 열린 ‘심상 50주년 기념, 목월을 기리며’ 행사장에서다. ‘심상’은 박목월 시인이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하며 받은 상금으로 시 문학 진흥과 발전을 위해 1973년 창간한 시 전문 월간지다. 지난 50년 동안 발행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시 전문 월간지다.
우 교수는 이날 심상 50주년 기념식에서 “시인 박목월 장남인 박동규 전 서울대 국문과 교수의 자택에서 박목월 시인이 육필로 작성한 시 노트 62권을 발견했다”며 “그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서울대 방민호, 한양대 유성호, 단국대 박덕규 등 국문과 교수들과 함께 ‘박목월 유작품 발간위원회’(발간위원회)를 조직했다. 발간위원회는 경북 경주에 있는 ‘동리목월문학관’에 이미 소장돼 있던 노트 18권도 입수해 함께 작품들을 분석하고 연구해 왔다”고 말했다.
일요신문 취재 결과, 박동규 전 교수가 소장한 노트 62권과 동리목월문학관 소장 노트 18권 등 모두 80권에 실린 시 작품 편수는 318편에 달한다. 이들 중 한 번도 세상에 공개된 적이 없는 미발표작이 무려 290편. 발간위원회 위원들은 이 미공개 작품들 가운데서도 완성도와 문학적 가치 등을 기준으로 164편을 엄선했다.
발간위원회는 이번에 엄선한 미공개 작품 164편을 오는 3월 12일 오전 10시 30분 한국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모두 공개할 예정이다. 발간위원회는 기자회견을 통해 박 시인의 시 노트 62권 실체도 공개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역경을 헤쳐나간 박 시인의 문학적 고뇌를 엿볼 수 있을 것으로 발간위원회는 보고 있다. 박 시인의 작품이 창작되는 변천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건 덤이다.
이번에 공개되는 작품엔 1936년과 1939년도에 창작된 시들이 있다. 또 1958년 무렵과 1970년대 시대적 격변기에 박 시인이 얼마나 지난하게 문학적 삶을 살아내려 했는지 짐작케 하는 작품들도 있다고 한다. 특히 박 시인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작품과 가족, 신앙 등을 소재로 한 작품들도 상당수 공개될 것으로 알려졌다.
학계 일각에선 박 시인의 미발표 시가 공개되면 작가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질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발간위원회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과 근대화 시대를 지낸 한 시인의 내면 모습을 모두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시대 문화사를 되새겨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목월 시인의 미공개 작품을 먼저 접한 학계 인사들은 “한국 시 문학사를 다시 써야 할 수도 있다”고 평가할 정도다.
우정권 교수는 “오는 3월에 공개되는 박목월 시인 작품들은 한 시인의 작품 세계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라며 “우리나라 격동기에 문학적 흐름의 깊은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격동의 역사 속 ‘순수서정’ 창시…시인 박목월은 누구인가
박목월(朴木月) 시인은 1915년 1월 6일 경상북도 경주에서 태어났다. 시인이 18세가 되던 1933년, 개벽사에서 발행하는 잡지 ‘어린이’에 동시 ‘통딱딱 통딱딱’이 뽑혔다. 같은 해 ‘신가정’ 6월호에 동시 ‘제비맞이’가 당선돼 박목월은 동시를 주로 쓰는 시인으로 출발했다. 그러다 정지용 시인을 통해 1939년 9월 ‘문장’에 추천돼 본격 시 창작 활동에 나선다.
1946년 6월, 조지훈 박두진과 공동시집 ‘청록집’을 발간해 세칭 ‘청록파’라는 명명을 받게 된다. 1948년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과 사무국장으로 활동했고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터지자 한국문학가협회 별동대를 조직, 1953년까지 공군종군문인단 일원으로 군 복무했다. 전쟁이 끝나고 홍익대학교, 서라벌예술대학, 중앙대학교 등에서 강의했고 1959년 4월 한양대학교 조교수가 돼 타계할 때까지 한양대학교에서 후학을 키우는 데 매진했다. 1977년 한양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78년 자신이 출석하던 원효로 효동교회에서 장로 안수를 받았다. 같은 해 3월 24일 새벽에 산책하고 돌아온 후 지병인 고혈압으로 63세 나이로 타계했다. 문학계에선 “박목월 시인은 우리 현대시사에서 간결한 단형서정의 완성자이며 그 특유의 순수서정이라는 방법론을 창시한 작가”라고 평가하고 있다.
김지영 기자 you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