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석금 회장.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
▲ 윤석금 회장이 10월 5일 서울 충무로 극동빌딩에서 웅진홀딩스 대표이사 사퇴 등에 관한 기자회견을 열고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
지난 9월 26일 극동건설과 웅진홀딩스가 전격적으로 법정관리 신청을 하자 시장은 몹시 술렁였다. 그러나 증권가를 비롯해 금융시장까지 요동을 치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만큼 예상됐던 바였다는 것이다. 너무 오랫동안 병치레를 해온 탓이다.
그룹의 지주회사인 웅진홀딩스를 법정관리 신청함으로써 그룹이 해체될지 모른다는 우려도 나오기는 했지만 그룹 해체보다는 오히려 윤석금 회장의 도덕적 해이(모럴해저드) 흔적에 쏠리는 시선이 적지 않았다. 그룹 해체 운운과 치명적인 도덕적 해이 논란…. 30여 년 쌓아온 윤석금 회장의 공든 탑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생겼다.
이전까지만 해도 윤석금 회장은 재계에서 보기 드물게 칭송(?)받는 대기업 회장 중 한 명이었다. 심지어 대표적인 재벌 비판론자 중 한 명으로 알려진 장하성 고려대 교수는 한 칼럼에서 “그는 남들이 돈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책장사, 물장사, 리스 장사를 해서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뛰어난 창업가 정신을 보여주었다”며 “그의 성공에는 재벌과 경쟁하지 않고 재벌에 예속되지도 않는 자신만의 블루오션을 찾아내는 비결이 있었다”고 칭찬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같은 평가가 머쓱해지고 말았다. 자신만의 블루오션을 찾아내면서 실패를 모르고 달려온 윤 회장은 건설, 태양광, 금융 등 ‘남들이 돈이 된다고 생각하는 영역’으로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 화를 자초했다. 방문판매, 렌털사업 등에서 빛나던 자신만의 특기와 장점을 살리기보다 재벌들이 이미 진출해 있는 레드오션에 발을 깊숙이 담근 게 화근이었다.
윤 회장은 스스로 “웅진의 여러 사업 중 처음부터 블루오션은 없었다”며 “레드오션에서 시작해 블루오션을 만들었다”고 자부해왔지만 건설, 태양광, 금융은 이미 웬만한 대기업이라면 모두 진출해 있는 분야였다. 뿐만 아니라 법정관리 신청 과정에서 보인 도덕적 해이의 흔적은 깨끗하고 정직한 경영인으로 인식돼왔던 윤 회장의 이미지를 단박에 산산조각 내 버렸다.
# ‘세일즈맨의 신화’ 레드오션에서 블루오션 발굴
▲ 윤석금 회장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설립한 웅진씽크빅, 웅진코웨이. 잇달아 히트를 치며 웅진그룹의 든든한 기초가 되었다. |
어려운 가정형편과 장남이라는 책임감은 윤 회장으로 하여금 일찍 돈의 중요성을 깨닫게 한 요인들이었다. 충남 논산의 명문 강경상고와 건국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윤 회장이 브리태니커 한국지사에 입사해 세일즈맨으로 명성을 날렸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 그러나 윤 회장이 대학 졸업 후 곧바로 브리태니커에 입사한 것은 아니다. 회사원보다 사업에 더 뜻이 있었던 윤 회장은 대학 졸업 후 약 1년간 음료 대리점을 했다. 그러나 실패. 자본과 경험이 부족했던 탓이다.
사업 실패를 통해 와신상담한 덕일까? 브리태니커에 입사하자마자 윤 회장은 줄곧 판매왕을 놓치지 않았다. 입사 1년 만에 브리태니커 본사에서 전 세계 최고 판매왕에게 주는 ‘벤튼상’을 수상한 것만 봐도 윤 회장의 활약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브리태니커에 몸담고 있으면서 윤 회장은 초고속 승진을 했다. 이화여대생이었던 김향숙 씨를 만나 결혼도 했으며 슬하에 2남(형덕·새봄)을 두었다.
윤 회장은 1980년 4월 1일 직원 7명, 자본금 7000만 원으로 헤임인터내셔널(현 웅진씽크빅)을 설립해 본격적으로 사업의 길로 들어섰다. 헤임인터내셔널이 제작·판매하는 학습교재는 연속 히트를 쳤다. 윤 회장은 자신의 고향 공주의 옛 이름을 따와 사명을 ‘웅진’으로 변경한 후 <어린이마을>, <웅진위인전기>, <웅진아이큐> 등 아동교육도서 부문에서 연이어 대박을 터뜨리며 승승장구했다.
출판사업 성공을 발판으로 윤 회장은 1987년 웅진식품을 설립, 식음료 부문으로 사업을 확장해갔다. 새 사업은 그러나 순탄하지 않았다. 1995년 출시된 ‘가을대추’만 선방하고 있었을 뿐 출시작마다 실패를 거듭해 회사의 존립마저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시선을 받았다. 1999년 말까지 누적적자 375억 원에 허덕이던 웅진식품의 처지를 한순간에 탈바꿈시킨 제품은 ‘아침햇살’이다. 1999년 1월 출시된 아침햇살은 커피와 콜라에 길든 사람들에게 꽤 낯선 음료였다. 마치 쌀뜨물 같은 색깔, 처음 느껴보는 맛 때문에 고개를 젓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침햇살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출시한 지 불과 2년도 안 돼 약 5억 병이 판매되면서 아침햇살 하나의 매출만 연간 500억 원이 넘었다. 웅진식품의 2000년 실적은 누적적자를 다 메우고 나서도 25억 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아침햇살은 마케팅 분야에서도 모범사례가 되고 있다. 아침햇살의 대박은 ‘레드오션을 블루오션으로 만들었다’는 윤 회장의 회고가 들어맞는 또 하나의 장면이다. 이후 웅진식품은 ‘초록매실’, ‘하늘보리’ 등을 선보이며 음료 부문에서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하늘보리 역시 ‘누가 보리차를 돈 주고 사마시겠느냐’는 고정관념을 깬 제품이었다.
윤석금 회장의 성공가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정수기 방문판매, 렌털사업이다. 윤 회장은 1989년 웅진코웨이를 설립해 정수기 사업에 진출했다. 소득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마시는 물의 중요성을 알게 될 것이라는 판단이 들어맞은 것. 고가의 정수기를 사는 것이 아니라 회사에서 소비자들에게 빌려준다는, 이 획기적인 아이템을 선보인 때는 IMF 외환위기가 한창인 1998년. 고객들은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정수기를 사지 않고도 집에 들여놓을 수 있게 됐다. 때가 되면 직원들이 방문해 점검해주는 시스템도 매력적이었다.
윤 회장의 세일즈맨 시절 경험이 바탕이 된 이 같은 방문·렌털사업은 지금도 웅진만의 독특한 사업방식으로 평가받고 있다. 웅진코웨이가 인수·합병(M&A) 시장에 매물로 나왔을 때 기업들이 입맛을 다시면서도 섣불리 접근하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다. 한 증권사 M&A팀장은 “웅진의 방문·렌털사업이 다른 기업에는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며 “인수 후 구조조정 면에서도 난항이 예상돼 접근하지 못한 기업이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 무리한 확장, 결국 과욕이 화근
윤석금 회장의 혜안은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장하성 교수가 칭찬한 ‘남들이 돈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분야에 뛰어들어 성공한 창업가 정신’이 2000년대 들어 흐려졌다. 윤석금 회장이 블루오션을 찾기 위해 애쓰기보다 회사의 덩치를 키우기 위해 M&A 시장에 뛰어들면서다. 2007년 극동건설, 2008년 새한(현 웅진케미칼), 2010년 서울저축은행을 잇달아 인수하면서 웅진그룹의 몸집은 급격히 불어나 재계 30위까지 뛰어 올랐다. 윤석금 회장에게는 어느새 ‘창업가 정신’보다 ‘M&A 귀재’라는 별칭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윤 회장이 M&A를 통해 새롭게 진출한 건설, 태양광, 금융은 기존에 해왔던 출판·식품사업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규모가 큰 사업이다. 게다가 재계에서 이름 좀 있다는 대기업이라면 전부 진출해 있는 영역이다. 경쟁이 치열할 뿐 아니라 글로벌 무대에서 대결해야 한다. 만약 실패한다면 그 충격과 여파는 그룹 전체가 휘청거릴 만큼 큰 터라 출판·식품사업의 그것에 견줄 수 없다. 결과는 불행히도 좋지 않은 쪽으로 나타났다. 공교롭게도 2007년 이후 인수한 덩치 큰 세 계열사가 모두 말썽이 되고 말았다.
2007년 극동건설 인수는 시작부터 잘못됐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당시 웅진은 6600억 원에 극동건설을 사들였다. 그러나 이 금액은 2003년 론스타가 인수한 가격 1700억 원보다 4배 가까이 되는 데다 당시 시장 평가액인 3300억 원의 2배나 지불한 것이었다. 더욱이 인수대금은 대부분 차입금에 의존했다. 인수 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건설경기가 급격히 위축됐다. 극동건설은 가뜩이나 건설업계에서 뚜렷한 강점이 없다는 것이 한계라는 지적을 받아온 회사여서 위기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윤 회장은 태양광사업에도 도전했다. 2006년 웅진에너지를 설립한 후 2008년 새한을 인수했으며 웅진폴리실리콘을 설립, 태양광사업을 웅진그룹의 주축으로 키우고자 했다. 그러나 태양광사업의 글로벌 침체의 직격탄을 맞았다. 2010년 인수한 서울저축은행에도 윤 회장은 무려 3000억 원을 쏟아 부었으나 정상화하는 데 실패했다. 결국 인수한 이 세 곳이 모두 위기를 맞으면서 그룹 전체가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게 된 것이다.
윤 회장은 “내가 어렵다고 품에 안긴 자식(극동건설)을 내칠 수 없는 것 아닌가”라는 말을 한 바 있다. 극동건설을 기필코 살려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재계 관계자는 “극동건설을 진작 내놓지 않고 알짜인 웅진코웨이를 팔아서라도 살리려 한 것을 보면 윤 회장이 성공인생에 큰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윤 회장도 지난 5일 긴급기자회견에서 “진작 포기했으면 이렇게까지는 안 왔을 텐데…”라며 뒤늦게 아쉬워했다.
어쨌든 윤 회장의 일련의 M&A는 그 이전에 보였던 모습과 판이했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을 듯하다. 지난 5일 기자회견에서 “태양광 확장할 때도 태양광이 너무 좋았습니다”라는 말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말하자면 업황이 좋았기 때문에 들어갔다는 것인데, 현재 좋은 사업 분야에 무리하게 뛰어드는 건 ‘윤석금 스타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실패는 둘째 치고 두 계열사의 법정관리 신청 과정에서 보인 윤 회장과 그 주변인들의 행태는 도덕적 해이 냄새를 짙게 풍기고 있다. 윤 회장과 웅진그룹 측은 절대 아니라고 발뺌하고 있지만 정황상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법정관리 신청 전날인 9월 25일 극동건설이 계열사인 웅진씽크빅과 웅진에너지에서 빌린 530억 원을 상환예정일(28일)보다 먼저 갚았다는 점, 윤 회장의 부인 김향숙 씨가 법정관리 신청 직전인 24일과 25일 이틀 동안 웅진씽크빅 주식 4만 4781주를 매도한 점, 윤 회장이 웅진홀딩스 법정관리 신청 직전 대표이사에 올랐다는 점 등이 대표적이다.
윤 회장의 대표이사 선임 건은 윤 회장의 대표이사 사임으로 일단락된 듯 보이지만 여전히 윤 회장이 웅진홀딩스 최대주주인 데다 신광수 대표가 윤 회장의 최측근 중 한 명이라는 점에서 논란거리가 남아 있다. 극동건설이 계열사에서 빌린 돈을 상환예정일보다 일찍 갚았고, 그것이 법정관리 신청 전날이었다는 것 또한 간단치 않은 문제다. 채권단 쪽에서 ‘150억 원이 없어 부도나는 회사가 그보다 3배가 넘는 금액을 먼저 갚았다는 것은 명백한 도덕적 해이’라고 분개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부인 김향숙 씨의 주식 매도 시점도 아주 절묘하다. 김 씨가 이틀 동안 4만 주가 넘는 주식을 팔아치운 다음날 법정관리 신청 소식이 전해졌고 웅진씽크빅의 주가는 곤두박질쳤다. 김 씨가 주식을 매도한 25일 8960원으로 마감한 웅진씽크빅의 지난 5일 종가는 6120원. 고작 6거래일 동안 무려 30% 가까이 추락했다.
윤 회장은 지난 5일 기자회견에서 사재출연에 대해 “(기업이 어려울 때마다 투자해) 넣어야 할 여력이 솔직히 없다”며 “채무가 많다”고 토로했다. 1980년 자본금 7000만 원으로 시작해 지난 4월 기준으로 자산 9조 3000억 원, 계열사 29개, 매출 6조 원 이상을 기록하며 재계 30위까지 끌어올린 윤석금 회장에게 지난 32년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갈 듯하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