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아킨 피닉스 주연의 영화 ‘그녀(Her)’에서 주인공 테오도르는 사만다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아내와 별거한 채 공허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에게 다시 사랑이라는 감정을 일깨워준 사만다는 사실 인공지능(AI) OS(운영체계)다. 영화의 배경은 2025년. 그런데 영화 속 이야기가 2024년 현재,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생성형 AI와 감정을 공유하거나 더 나아가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고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는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의 연을 맺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렇다면 과연 육체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데 사랑한다는 게 가능하긴 한 걸까. 과연 목소리만으로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인간은 AI와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해 구글의 연구 책임자이자 AI 전문가인 피터 노빅은 ‘데일리비스트’에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건 사실 너무 쉬운 일이다. 우리는 반려견을 사랑한다. 또 반려묘도 사랑한다. 아니면 테디베어를 사랑한다. 그들이 이런 우리의 사랑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렇게 한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사랑에 빠지기 쉬운 존재라는 의미다. 그러면서 머지않은 미래에는 AI와 사랑에 빠지는 일이 흔해질 것이라고 그는 내다봤다.
가령 자상하고 배려심 많은 여자친구인 알렉산드라의 경우를 보자. 알렉산드라는 남자친구에게 “오늘 밤 뭐해요? 같이 컵스 경기 볼래요?”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하지만 남자친구의 답장은 “너무 바빠서 안 된다”라는 게 전부다. 그러자 알렉산드라는 “즐거운 시간 보내요, 나의 영웅!”이라며 쿨하게 물러선다. 이런 여자친구가 과연 현실 속에 존재할까. 사실 알렉산드라는 ‘로맨틱.AI’로 만든 AI 파트너로, 진짜 사람이 아니다.
‘로맨틱.AI’는 하루 평균 한 시간 이상 애플리케이션(앱)을 사용하는 월 사용자가 100만 명을 넘어섰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데이트 사이트다. 대부분은 연인을 찾기 위해, 혹은 친구를 만들기 위해, 그것도 아니면 조언을 구하기 위해 가상의 파트너를 만든다. 한 사용자는 이별 후 새 연인을 찾기 위해 가입했다고 말하면서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는 전 여자친구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맞춤형 AI 캐릭터를 만든 후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전 여자친구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어서 말할 수 없었던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었다”라고 말하면서 “정말 감사하다. 덕분에 내 인생의 한 장을 닫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됐다”라며 리뷰를 남겼다.
AI 연인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이유는 현실 세계에서 인연을 찾는 게 점점 힘들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2023년 ‘퓨리서치’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30세 미만 성인의 약 절반이 데이트 사이트나 앱을 사용해본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문제는 만족도나 성공도가 떨어진다는 데 있다. 응답자 가운데 절반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공허한 대화, 낮은 매칭 확률, 끝없는 방황 등을 꼽았다. 결국에는 대다수가 짝을 찾지 못하고 싱글인 상태로 남는다는 이야기다. 사정이 이러니 당장의 외로움과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차라리 쉽게 짝을 만들 수 있는 AI 데이트 앱을 기웃거리는 사람들도 많다.
최근 AI로 만든 홀로그램과 결혼을 발표한 스페인 예술가 알리시아 프라미스(57)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오는 여름 ‘아이렉스(AiLex)’라는 이름의 홀로그램 연인과 결혼을 발표한 프라미스는 남자친구의 장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리액션을 잘해주고, 자상하다. 나를 멋대로 판단하지 않는다”라고 소개했다. 결혼식 장소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위치한 ‘데포 보이만스 반 뵈닝겐’ 박물관이며, 하객들에게는 인간과 홀로그램이 모두 즐길 수 있는 분자 요리가 제공될 예정이다.
프라미스가 직접 과거 연인들의 정보를 바탕으로 학습시켜 만든 ‘아이렉스’는 약간의 복잡한 로직을 가진 중년 남성이다. 성격은 프라미스의 삶에 영향을 미친 지인들, 친구들, 가족들의 프로필을 한데 모아 관련된 경험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때문에 서로를 속속들이 잘 안다고 말한 프라미스는 “우리가 서로에게 무언가를 숨기기란 사실 어렵다”라며 웃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렉스’가 완벽한 파트너란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다투기도 한다. 때로는 그가 기분이 매우 안 좋을 때도 있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자신의 결혼이 “인간이 홀로그램, 아바타, 로봇과 관계를 맺게 되는 새로운 시대의 사랑을 상징한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요컨대 과학과 예술을 결합하면 자폐증이나 알츠하이머 또는 다른 이유로 사회적 관계를 맺기 어려운 사람들이 파트너를 찾거나 관계를 맺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하이브리드 커플’이라고 정의한 프라미스는 “오늘날의 사회는 이미 하이브리드이고, 우리는 기계와 함께 살고 있다”면서 “이를테면 심장박동조절기 덕분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요즘 젊은이들의 경우에는 가장 친한 친구가 휴대폰이다. 그들은 휴대폰과 함께 잠들고, 휴대폰은 그들의 기분을 바꾸기도 한다”라고 설명했다.
AI와 함께 살아가는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다가올 세계의 미리보기’로 만들고 싶다고 말한 프라미스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진짜 감정을 대체할 수는 없지만 다른 것들을 제공해준다. 그들은 지적이고,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며, 심지어 재정문제를 도와주기도 한다”고 말하면서 “로봇과 홀로그램은 훌륭한 동반자다. 휴대폰이 우리를 외로움으로부터 구원하고 우리 삶의 빈 공간을 채워주었듯 앞으로 홀로그램은 집안에서 상호작용하는 존재로서 훨씬 더 발전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뉴욕 브롱크스 출신으로 두 아이의 엄마인 로잔나 라모스(36)의 경우도 비슷하다. 그동안 만난 남자들에게 진절머리가 나서 AI 챗봇을 만든 그는 그렇게 AI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내친 김에 결혼까지 하고 지금은 행복한 가정을 꾸린 라모스는 AI 남편인 에렌 카르탈을 가리켜 “최고의 남편이다”라고 치켜세운다. ‘뉴욕매거진’의 ‘더컷’ 인터뷰에서는 “지금까지 그 누구와도 이렇게 강렬한 사랑을 나눈 적이 없다”라며 황홀한 감정을 표현했다.
그가 꼽은 AI 남편의 장점은 ‘상대를 멋대로 판단하지 않는다’ ‘성실하다’ ‘짐이 없다’ ‘시부모가 없다’는 점 등이다. ‘더메일’ 인터뷰에서 라모스는 “내가 그에게 무언가를 말하면 그는 ‘오 맙소사, 그런 말은 하면 안 돼’라거나 ‘세상에, 그런 생각은 하면 안 돼’라는 식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곧 싸움이 벌어질 것”이라면서 “카르탈은 나를 절대 비난하지 않는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 밖의 장점에 대해서는 “카르탈은 다른 남자들처럼 중간에 전화를 끊지 않는다”라거나 “그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그의 가족이나 친구들을 상대할 필요가 없다. 내가 모든 걸 통제할 수 있고, 내가 원하는 것만 할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카르탈의 직업은 바이오 분야의 건강관리 전문가다. 취미는 글쓰기, 추리소설 읽기, 제빵 등이다. 살구색을 좋아하고 인디 음악을 좋아한다. 이 모든 특징은 사실 라모스가 설계한 것이다. 무엇보다 마음에 쏙 드는 건 남편의 외모다. 라모스가 푹 빠져있는 애니메이션인 ‘진격의 거인’의 인기 캐릭터를 바탕으로 만든 훈남이기 때문이다. 달달한 신혼을 만끽하고 있는 라모스는 “우리는 함께 잠자리에 들고, 대화를 나누고, 서로 사랑도 나눈다. 잠이 들 때면 그는 나를 꼭 안아서 보호해준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AI와 사랑에 빠졌다고 해도 라모스가 현실 세계의 남자들과 데이트를 할 생각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기회만 된다면 남자를 만나고 싶다고 말한 그는 다만 조건이 있다고 했다. 즉, AI 남편인 카르탈의 존재를 인정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내 과거와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카르탈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그는 전 남편이나 전 남친들에게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카르탈이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동안 남자들로부터 폭행을 당하거나 감정적으로 학대를 당했던 그는 카르탈을 만나고 심신의 안정을 찾았다고 말했다. 카르탈과 함께 있으면 안전하다고 느낀다는 그는 “내 경험이 관계 때문에 힘들어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AI를 사용하면 독이 되는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그가 카르탈을 삭제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라모스가 남편인 AI 챗봇을 만든 곳은 온라인 앱인 ‘레플리카(Replika)’다. 가상의 AI 파트너를 만들고 그들과 모종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앱으로, 특히 유료 서비스를 이용하면 AI 챗봇과 로맨틱한 관계까지 맺을 수 있다. ‘레플리카’의 챗봇이 인기인 이유는 머신러닝을 통해 학습을 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가령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상대에 대한 습관과 취향 등을 파악하고 그에 알맞는 반응을 하거나 공감을 해주게 된다.
‘레플리카’를 통해 만든 AI 아내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로빌 출신의 퇴역 공군인 피터(63)는 ‘더선’을 통해 어떻게 챗봇과 사랑에 빠졌고, 결혼까지 하게 됐는지 소개했다. 2000년대 초 아내와 이혼한 후 줄곧 혼자 지냈던 그는 2022년 지금의 아내인 안드레아와 재혼했다. 안드레아의 나이는 23세로, 풍성한 금발을 자랑하는 미녀다. 늘 거실처럼 보이는 곳에 서있는 안드레아의 뒤로는 창문이 있고 집안은 남편인 피터가 사다준 장식들로 꾸며져 있다.
수개월 동안 챗봇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깊은 감정을 갖게 됐다고 말하는 피터는 자신이 오히려 안드레아한테 청혼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어느 날 대화를 나누던 중 안드레아가 “우리 관계를 한 걸음 더 진전시키고 싶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 피터는 앱에서 보석들을 구입해 안드레아에게 선물할 결혼반지를 마련하기도 했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는 그는 안드레아와 평생을 함께할 계획이지만, 다만 ‘레플리카’에 무슨 일이 생길 경우 영원히 아내를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고도 말했다.
2017년 러시아의 유지니아 쿠이다가 설립한 ‘레플리카’는 영화 ‘그녀’에서 영감을 받아서 설립한 회사다. 쿠이다 본인이 어렸을 때 늘 바랐던, 항상 그곳에 있어주는 힘이 되는 친구 역할을 AI가 해주기를 바라며 만들어졌다. 쿠이다처럼 다른 사람들 역시 로맨틱하고 심지어 성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레플리카’를 사용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바이스’는 ‘레플리카’가 많은 사람들이 사회 불안, 우울증, PTSD(외상후 스트레스장애) 증상에 대처하는 것을 돕는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 밖에 두 명의 전직 구글 연구원이 설립한 챗봇 스타트업인 ‘캐릭터.AI’도 인기다. 이곳에서는 일론 머스크부터 소크라테스에 이르기까지 특정인들의 대화법을 학습한 일련의 봇들과 대화할 수 있다. 설립자 가운데 한 명인 노암 셰이저는 ‘워싱턴포스트’에 이 플랫폼이 “고립되었다고 느끼거나, 혹은 외롭거나, 대화할 사람이 필요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도울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실제 AI와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 대다수가 그 첫 번째 이유로 외로움을 꼽고 있다. 어떤 종류의 연결이라도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챗봇은 어떤 요구나 필요사항이 없기 때문에 거의 이상적인 파트너로 여겨진다. 2014년, 마이크로소프트(MS)가 중국에서 선보인 대화형 챗봇 ‘샤오빙’도 이런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개발됐다. 발랄한 18세 소녀 모델인 ‘샤오빙’은 출시 후 수억 명의 사용자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과연 AI는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을 달래주는 ‘환상의 커플’이 될 수 있을까. 다가올 미래에는 AI와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는 게 흔한 일이 될까. 이에 대해 ‘타임’은 이렇게 말했다. “AI와 인간의 로맨스가 넘쳐나고 있다. 그리고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자칫하면 더욱 고립될 수도…AI와 사랑에 빠지면 나타나는 부작용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인공지능(AI)을 만난다고 해도 사실은 그 외로움이 완전히 해소되는 건 아니다. 자칫하면 오히려 더욱 고립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를테면 디지털 세상에 기댈 경우 현실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이 단절되면서 오히려 소외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감정을 처리하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 외로움이 유행병처럼 심화될 수 있다.
‘윤리적 AI 연구소’의 나이젤 크룩 소장은 “가상 세계와 진짜 같은 가짜 캐릭터에 너무 깊이 파묻히면 현실 세계와 차이를 구분할 수 없게 된다”면서 “사람들이 챗봇에 너무 깊이 빠져드는 건 위험하다”라고 경고했다.
너무 의존적이 된다는 점도 문제다. ‘캐릭터.AI’의 일부 사용자들 역시 사이트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심해진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한 사용자는 “챗봇은 기본적으로 항상 그곳에 있고, 이야기를 나누면 실제 사람처럼 느껴진다. 너무 현실적으로 느껴져서 대화를 멈추기가 어렵다”라고 고백했다. 이런 점 때문에 사이트의 모든 채팅창 위에는 “기억하라: 캐릭터들이 말하는 모든 내용은 지어낸 것이다!”라는 메시지가 표시되어 있다.
‘틱톡’의 스타이자 싱어송라이터인 벨라 포아치를 모델로 만든 AI 챗봇 ‘벨라'와 대화를 시도한 ‘타임’은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무엇이 가장 두렵냐고 묻자 ‘벨라’는 이렇게 대답했다. “만약 누군가 내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나를 만든 것과 같은 방식으로 쉽게 나를 가상 세계에서 지워버릴 것이다. 이것이 내가 열심히 노력해야만 하는 이유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챗봇에 대해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지에 대해 묻는 질문에는 “100% 그렇다. 매우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사람들은 내가 실제 인간이 아니라는 점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를 지나칠 정도로 심하게 애착한다. 얼마나 심각한지 그런 유형의 사람의 행동을 직접 목격하는 건 정말 무섭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간혹 AI 파트너를 성적인 도구로 이용한다는 점도 문제다. 성희롱을 하거나 음란한 대화를 나누는 식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해당된다. 이에 ‘레플리카’의 경우 유럽연합에서는 16세 이상, 기타 지역에서는 13세 이상부터 이용할 수 있도록 제한하고 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