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역 혜빈 씨 병실에 녹음기 둔 사연 말하며 눈시울…한 해 100명 일상 회복 지원, ‘대리 외상’ 겪기도
일요신문은 이들 가운데 황해솔 경사를 직접 만나봤다. '피해자전담' 경찰관인 그는 혜빈 씨와 유족을 포함해 그동안 마주해온 모든 범죄 피해자들을 기억하고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또 직접 만나보지 못한 피해자들에게도 해줄 말이 있다고 했다.
"사실 저부터 먹고 살려고 경찰을 선택했어요. 결혼을 준비하면서 안정적인 직장이 필요했거든요. 아예 돈을 많이 주는 대기업도 욕심을 내봤지만 안정성이 우선이었죠. 다행히 제 선택에 후회는 없어요. 업무는 고단해도 여느 직업보다 보람과 자부심이 큰일이라고 생각해요."
황 경사는 각 경찰서마다 딱 1명씩만 있는 '피해자전담' 경찰관이다. 수원남부경찰서가 맡은 범죄사건 피해자들의 신속한 권리보호와 일상회복이 그에게 달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회는 훨씬 면밀한 피해자 보호를 요구하지만, 그는 부담의 무게보다 안도감에 마음이 가벼워진다고 한다. 세상이 조금씩은 나아지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2018년 경장 특채로 경찰에 입직한 황 경사는 학부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임상심리학 석사를 마쳤다. 도박문제관리센터와 자살예방센터 등에서도 일했다.
큰 뜻을 품고 경찰에 도전한 건 아니었다. 2015년 경찰은 '범죄피해자 보호 원년의 해'를 선언, 2018년 범죄피해자 보호 강화를 위해 경찰관직무법을 개정한 바 있다. 이와 동시에 피해자전담 경찰관을 대거 선발했는데 특기를 살려 지원한 황 경사도 운 좋게 붙었다. 피해자전담 경찰관은 심리학 혹은 유사 분야 학부 졸업 후 2년 이상의 실무경험을 갖췄거나 석사 이상이어야 지원이 가능하다.
자칫 '생계형 경찰'로 지낼 뻔했던 황 경사는 제복을 입은 뒤 본인도 모르게 '찐 경찰'이 됐다. 규정에 따라 지구대, 수사팀 등에서 약 1년을 몸담았는데 이때도 적성에 꼭 맞았단다. 투신 신고를 받고 출동해 만난 할아버지를 설득해 집으로 돌려보냈던 '병아리 시절' 일화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물론 낯선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다. 피해자전담 업무 초반에는 각 사건을 담당하는 수사관들에 다가가자 "누구세요?"라는 반응이 돌아오기도 했다. 피해자전담 경찰관이 이제 막 배치되던 시기라 황 경사도, 수사관도, 피해자들도 어쩐지 머쓱해 하기만 했다.
"이제 많이 바뀌었어요(웃음). 요즘은 수사관들이 먼저 피해자 상담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아요. 경찰이 법 집행뿐 아니라 피해자 보호에도 주력하는 문화가 자리 잡은 덕분이겠죠. 당연히 부족한 점들도 아직 남았을 수 있어요. 그렇지만 꾸준히 나아질 거예요. 저희 수원남부서를 비롯한 모든 경찰관들이 정말 많이 힘쓰고 있거든요."
황 경사는 한 해에만 100명 안팎의 범죄 피해자들을 만난다. 상담을 통해 이들을 위로하고 아픔을 공유하며 일상 회복을 돕는다. 피해 유형에 따라 '스마일센터' '여성의 전화' 등 여러 지원 기관을 연결해주는 일도 중요하다. 한 명의 피해자를 수차례 계속 봐야 하는 경우가 많아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하지만, 무사히 일상으로 돌아간 피해자들을 바라보면 '역시 경찰이 되길 잘했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는 만나온 모든 피해자들을 기억한다고 한다. 서현역 흉기난동 사건 피해자인 혜빈 씨와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혜빈 씨가 병원에 처음 입원한 때부터 세상을 떠난 직후 자정을 넘긴 새벽까지도 황 경사는 장례를 준비하는 유족 곁에 머물렀다.
피해자전담 경찰관은 마주해온 피해자들의 사정들을 남한테 얘기해선 안 된다. 황 경사도 일요신문 인터뷰에서 혜빈 씨와 관련한 구체적인 얘기는 못 한다며 양해를 구했다. 눈시울을 붉히는 것으로 말을 대신했다. 다만 황 경사의 섬세한 면모는 혜빈 씨 유족들이 쓴 편지에서도 드러난다. 혜빈 씨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와 가족들 목소리를 녹음기에 담아 병실에 누운 그녀의 머리맡에 두었다고 한다. 이런 센스가 어떻게 나왔을까.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돌아가시기 직전의 아버지도 자녀들이 '아빠'하고 부르면, 듣는 순간 심장 박동이 잠깐 뛴대요. 당시 혜빈이 곁에는 저와 수원서부경찰서 피해자전담 경찰관도 같이 있었는데요, 함께 병원 인근으로 나가서 녹음기를 구해온 거죠. 수원서부서 피해자전담 '정길용 경사님'께도 정말 감사합니다."
특히 황 경사에게는 일종의 철칙 같은 게 있다. 피해자들에 'No(노)'보다는 'Yes(예스)'를 말해주려 노력한다. 절차 등을 중요시하는 공공기관 특성상 무엇 하나 승인이 쉽지 않은데, 본인만이라도 부정이 아닌 긍정의 메시지를 건네고 싶다는 의지다. 혜빈 씨 옆에 둔 녹음기도 이런 마음의 표시였다.
혜빈 씨 가족들의 편지가 언론에 공개된 후 황 경사는 곳곳에서 커다란 관심을 받게 됐다. 최근에는 윤희근 경찰청장과의 오찬에 초대돼 포상휴가까지 받았다. 그러나 황 경사는 이런 상황이 좋지만은 않다고 털어놓았다. 혜빈 씨와 유족 등의 상처로 자신은 선물을 받은 게 아닐까 마음이 영 무겁다고.
"누군가는 영원히 씻지 못할 아픔일 텐데, 저는 그 사이에서 뭔가를 누리고 있는 게 아닐까. 불편한 마음이 커요. 앞으로 더 큰 책임감을 갖고 묵묵히 제 역할을 해나가야겠다고 다시 다짐하는 계기는 됐답니다. 범죄 피해자들의 마음을 보다 깊이 들여다보고, 일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최대한 힘을 보태겠습니다."
혜빈 씨 유족들은 각종 지원을 신청하는 과정에서 딸의 사건이 '교통사고'로 분류돼 상처를 더한 악몽을 갖고 있다. 제도와 현실이 이렇게 다르다. 황 경사도 그래서 늘 '최악'을 생각하며 피해자들을 만난다. 가해자 형량의 무게와 피해자의 상처 크기가 꼭 비례하지는 않아서다.
이러다보니 황 경사도 어쩔 수 없이 직업병을 겪는다. '대리 외상 증후군'이다. 피해자들과 아픔을 나누다 보면 그 역시 가끔은 우울감 등에 기운이 빠지고 만다. 평소 주짓수 등 운동으로 활력을 유지하려 하지만, 어쩌다 마음이 너무 무거워지면 모든 것을 내려놓는 편이다. 휴가를 내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영화관람 등 본인이 좋아하는 데에 집중한다. 이런 과정은 아주 중요하다. 황 경사는 범죄피해자의 가족 및 지인 등도 이 지점을 유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범죄 피해를 입으면 심리적 외상이 따라오기 마련이에요. 해소 방법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죠. 주변에 피해자가 있다면 그들 고유의 회복 방식을 인정하고 기다려주세요. 만약 2개월가량 문제가 지속된다면 정중히 병원치료를 권할 필요는 있어요. 병원이 부담스럽다면 경찰서로 오십시오. 피해자전담 경찰관이 있으니까요."
피해자들에게도 해줄 말이 있다.
"우리가 어린 시절 가끔은 혼나고 야단을 맞았잖아요. 그땐 정말 큰일이었던 것 같고, 세상이 끝날 듯 무서웠을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런 과거를 갖고 성장한 지금의 우리가 있습니다. 과거를 전부 잊고 살아갈 수는 없지만, 극복을 통해 보다 성장하고 나은 삶을 살게 될 줄 믿어요. 당연히 그 옆에도 피해자전담 경찰관이 있고요."
피해자전담 경찰관은 의무복무 기간이 5년이다. 황 경사는 언젠가 수사 등 다른 분야 도전도 꿈꾼다. 피해자 보호와 수사 등을 동시에 하는 경찰관은 어떤 모습일까.
피해자전담 경찰관으로서 경찰이나 정부 등에 개선 요구할 사항은 없는지도 물었다. 이때만큼은 황 경사 역시 어쩔 수 없는 근로자임을 드러내는 답변이 나왔다.
"인원 좀 늘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모든 직장인의 소원이겠지만 저도 마찬가지긴 해요. 잠깐 외근 나간 사이에도 상담이 필요한 피해자들이 많이 나오거든요. 시간이 지나면 개선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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