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돌아왔다.’
지난 3월 4일(현지시각), 미 연방대법원이 만장일치로 트럼프의 대선 출마 자격을 유지하기로 결정하면서 트럼프의 대권가도 앞에 놓여있던 장애물은 제거된 상태다. 그렇다고 해서 사법 리스크가 완전히 해소된 건 아니다. 유사한 소송을 제기한 메인주와 일리노이주의 판결도 아직 남아있는 데다 다른 소송도 여러 건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리스크는 트럼프 지지자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있는 듯하다. 지지자들은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환호하면서 트럼프의 컴백을 두 손 들고 반기고 있다.
미국인들은 왜 트럼프를 그리워하는 걸까. 정말 그의 잘못을 다 용서한 걸까. 여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경제 문제, 즉 먹고사는 문제 탓이다. 트럼프를 다시 애타게 찾는 미국인들의 속내를 들여다본 미국과 서방 세계의 언론들은 트럼프가 다시 지지를 받고 있는 이유로 높은 물가, 높은 금리, 분열과 도덕성에 대한 우려, 사법제도와 언론에 대한 깊은 불신 등을 꼽았다. 그리고 일부 트럼프에 대한 지극한 충성심을 갖고 있는 유권자들도 물론 있으며, 여기에 더해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 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도 유권자들의 불만을 사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로이터’는 ‘트럼프가 2024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는 네 가지 이유’라는 기사에서 높은 물가, 밀려드는 이민자들에 대한 불안, 사법제도에 대한 불신, 바이든 정부에 대한 실망 등을 트럼프 부상의 이유로 꼽았다.
먼저 높은 물가의 경우, 무섭게 치솟은 장바구니 물가로 불만이 폭주하고 있는 유권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공화당이 민주당보다 경제를 더 잘 관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아이러니한 점은 일반 시민들이 체감하는 것과 달리 실질적인 미국의 경제지표는 트럼프 시절보다 더 낫다는 데 있다. 트럼프 정부 당시 6.3%였던 실업률은 현재 역사적 최저치인 3.7%로 하락한 상태며, 소비자물가상승률은 2022년 6월 최고치였던 9%에서 현재 3%대까지 내려오는 등 양호한 편이다.
문제는 유색인종 유권자와 젊은 유권자들을 포함한 대다수 유권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임금 상승률이 식료품, 자동차, 주택, 아동 및 노인 돌봄과 같은 필수재 및 서비스 비용과 보조를 맞추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미국인들은 경제지표보다는 구매력을 더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기본적인 삶의 필요 요건들, 가령 주택 소유, 인플레이션과 보조를 맞추는 적정 임금, 교육비 지출 등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상실감도 팽배해지고 있다.
멕시코 국경을 넘어 밀려오고 있는 이민자들에 대한 불안감도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트럼프는 이러한 불안을 조장하고 포장하는 데 능숙한 사람이다. 아직도 자신을 미국 정치체제의 아웃사이더라고 자처하고 있는 트럼프는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고 선언하는 동시에 자신을 구세주로 묘사하고 있다. 이를테면 방화범이면서 동시에 소방관인 셈이다. 이와 관련, 트럼프 지지자인 아이오와주의 밥 스나이더는 ‘알자지라’를 통해 “트럼프는 강력한 지도자다”라면서 “그는 우리의 국경을 굳건하게 지켰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는 트럼프는 이번 선거전에서도 멕시코 국경의 장벽을 강화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으며, 심지어 대중 앞에서 이민자들을 독사로 묘사하는 시를 낭독하기도 했다.
트럼프의 사법 리스크에 관해서도 지지자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많은 유권자들은 트럼프의 행동이 당선 자격에 문제가 없다고 여기면서 오히려 그가 정치적 마녀사냥의 피해자라고 믿고 있다. 실제 올해 초 ‘로이터·입소스’가 조사한 공화당원들 가운데 적어도 절반은 트럼프가 유죄 판결을 받더라도 투표할 것이라고 답했다.
바이든 정부에 대한 실망도 트럼프 지지율에 한몫을 하고 있다. 그동안 바이든 정부는 막대한 투자를 통한 일자리 정책(인프라, 친환경에너지, 칩 제조 등)이 미국인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대중을 설득하지 못했다. 여기에 더해 바이든 정부가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 전쟁에 개입하는 외교정책을 취하고 있다는 점도 불만을 사고 있다. 이에 반해 ‘미국우선주의’를 주장하는 트럼프는 비개입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심지어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까 두려워하고 있는 트럼프 지지자들은 중동에서 강경한 태도를 밀어붙였던 트럼프 시절이 더 나았다고 한숨을 쉬고 있다.
‘야후 파이낸스’는 ‘미국인들이 트럼프 경제를 갈망하는 이유’의 기사를 통해 트럼프가 다시 대선 후보로 부상한 가장 큰 이유로 인플레이션을 지적했다. 요컨대 인플레이션의 충격이 2017년부터 2021년까지 트럼프 시절에 대한 일종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플레이션은 이제 2022년 최고치를 훨씬 밑돌고 있지만, 그럼에도 미국인들은 영원히 오를 것만 같은 식료품비, 월세, 교통비에 분노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 지난 2월, ‘NBC 뉴스’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40%가 트럼프 시절이 생각보다 좋았다고 답했으며, 이는 2018년 NBC가 같은 질문을 했을 때보다 더 높은 비율이었다.
트럼프 시절 경제에 대한 좋은 기억들은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의 혼란스러운 대응, 2020년 선거 결과를 뒤집으려고 했던 시도, 국회의사당 난입 등 다른 부정적인 기억들까지 모두 잊게 만들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트럼프가 바이든에 맞서 자신의 경제 성과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선거운동을 펼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트럼프는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견고한 경제를 물려받았고, 덕분에 호시절은 2020년까지 계속 이어졌다. 오늘날과 비교하면 인플레이션은 말할 것도 없었다.
소득은 오히려 바이든 정부 때 더 많이 상승했다. 트럼프 시절 9.4%에 불과했던 소득 상승률은 지난 3년간 15.4%로 더 높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 문제는 물가상승률이었다. 물가상승률이 소득상승률보다 2.5%포인트(p) 더 높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말해 구매력이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트럼프 시절에는 소득상승률이 물가상승률보다 3.2%p 높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구매력이 상승하는 효과가 나타났다. 바로 이 점이 트럼프가 바이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이점이다. 바이든 정부가 아무리 “그동안 미국 경제는 낮은 실업률과 인프라 투자 등을 통해 성장을 이어갔다”고 주장해도 유권자들에게는 와 닿지 않는 것이다.
가령 트럼프 지지자인 아이오와주의 데이비드 브루넬(32)은 “나는 예전보다 돈은 더 벌고 있다. 그런데도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난하다”면서 “이 점이야말로 지금 미국 경제가 어디에 있는지 많은 것을 의미한다”라고 한탄했다. 세일즈 매니저이자 두 딸을 둔 싱글맘인 미란다 블레어(40)는 2008년에는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에게 투표했고, 2016년 대선 때는 힐러리 클린턴과 트럼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아예 투표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트럼프 정부 시절에는 식료품을 살 여유가 있었다. 딸들을 데리고 스키장에도 갈 수 있었다. 하고 싶은 모든 걸 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근 몇 년 사이 경제적으로 힘들어지자 트럼프에 대한 지지를 확고하게 굳혔다고 말한 그는 “지금은 형편이 너무 어려워졌다. 이전보다 수입은 늘었지만 집을 사는 건 절대 불가능해졌다.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임대료를 낸 적은 없었다”라고 분노했다.
그렇다면 왜 공화당의 다른 후보가 아닌 트럼프일까. 트럼프 지지자들은 ‘알자지라’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고, 그가 통치하는 방식을 봤기 때문에 그를 선호한다고 말했다. 매디슨 카운티의 조지 허튼은 “우리는 그저 나라를 되찾고 싶을 뿐이다. 우리는 트럼프가 대통령이었던 시절을, 아니면 그때보다 더 나아지길 원한다”라고 주장했다. 브루넬 역시 “트럼프가 ‘먼 길을 가는 좋은 코스’를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공화당 후보들을 고려해본 적이 없다”라고 동조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낙태 문제나 이민자 문제 등 실제적으로는 자신의 이득에 반하는 정책을 펼치는데도 불구하고 트럼프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이 역시 경제 때문이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현재 경제가 매우 좋거나 좋은 상태라고 응답한 유권자들 가운데 대다수는 바이든의 정책이 자신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답한 반면, 경제가 그저 그렇거나 나쁘다고 생각하는 민주당과 민주당 성향의 무당파들은 바이든의 정책이 자신들에게 해를 끼쳤거나 큰 차이를 만들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20년에는 바이든을 지지했지만 올해 대선에서는 트럼프에게 표를 던지겠다고 답한 유권자들 가운데 60% 가까이는 바이든의 정책이 자신에게 피해를 줬다고 답했다.
히스패닉 유권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2016년 선거 당시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려는 트럼프 정책을 반대하는 히스패닉 유권자는 3분의 2에 달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히스패닉 유권자의 37%는 트럼프의 정책이 개인적으로 도움이 됐다고 응답한 반면, 바이든의 정책에 대해 그렇다고 응답한 유권자는 15%에 불과했다.
캘리포니아 센트럴밸리에 거주하는 헨리 페레즈(50)는 “트럼프 시절에는 돈을 잘 벌었다. 코로나19로 힘든 시기에도 말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2016년에는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으나 2020년에는 트럼프의 노조 정책에 불만을 품고 바이든을 지지했다. 하지만 올해는 다시 트럼프를 지지할 계획이라고 말한 그는 “경제 때문이다. 그저 주유소에 가거나 상점에만 가 봐도 바이든의 정책이 나에게 어떤 해를 입히는지에 대해 바로 알 수 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돌고 돌아 트럼프’를 외치는 미국인들의 민심을 보면 어쩌면 정치 이념은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눈앞의 이익, 먹고 사는 문제는 늘 역사적으로 다른 모든 것에 앞섰다. 1992년 조지 H.W. 부시에 맞서 민주당 대선 후보로 출마했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선거 구호는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였다. 당시 ‘강한 미국’을 내세웠던 부시 대신 미국인들은 ‘잘 사는 미국’을 외친 클린턴에게 표를 던졌고, 클린턴은 43.9%의 득표율로 37.4%에 그쳤던 부시를 누르고 제42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음모론 신봉 트럼프 지지자들 ‘사법 리스크’ 따위야…
트럼프의 사법 리스크 또한 지지자들에게는 음모론에 불과하다. 요컨대 트럼프가 법적, 정치적 음모론의 희생자라고 믿는 것이다. 실제 ‘워싱턴포스트’와 몬머스대학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공화당 유권자의 절반 이상이 2020년 대선에서 바이든이 ‘투표 조작’으로 승리했다고 믿고 있다. 트럼프에게 표를 던지겠다고 답한 유권자의 약 82%도 이 같은 견해를 나타냈다.
이와 관련, 트럼프 지지자인 미란다 블레어(40)는 “나는 우편투표제를 신뢰하지 않는다. 바이든은 8120만 표를 획득할 만큼 카리스마가 없다”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지지자인 린 메이슨(60) 역시 “3년 전 국회의사당 습격 사건이 폭력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면서 트럼프의 결백을 굳게 믿고 있다.
오히려 이들은 2020년 대선 결과에 불복하고 이를 뒤집으려고 했던 트럼프의 시도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고 주장하는 민주당을 가리켜 “현 정부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실질적인 위협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다시 말해 트럼프가 직면하고 있는 기소가 정치적인 동기에 의한 것이며, 2024년 선거를 방해하기 위한 음모라고 주장한다.
트럼프 지지자들의 이런 발상은 부분적으로는 트럼프 본인이 의도한 것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수년간 트럼프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조사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며, 자신의 정치적 성공을 전복시키려는 노력이라고 주장해 왔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또한 “트럼프는 자신에 대한 이런 공격을 가리켜 보통의 미국인들을 위해 싸우는 자신을 저지하려는 엘리트 계층의 방해공작이라는 프레임을 씌운다. 이는 그의 지지층에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메시지다”라고 지적했다.
트럼프의 이런 지속적인 수사 덕분에 국회의사당 폭동이나 마러라고에서 발견된 기밀 문서들과 같은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이런 혐의들이 트럼프를 정치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음모라고 보고 있다. 많은 유권자들이 그에 대해 호의적인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처음으로 투표에 나서는 18세의 에반 워커는 트럼프의 어떤 점이 특히 좋은지 묻는 ‘알자지라’의 질문에 “나는 그의 성격이 좋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굉장히 외향적인 성격이다”라고 치켜세웠다. 또한 트럼프의 결백을 의심하지 않는 에밀리아 산체스(24)는 “트럼프가 모든 재판 절차를 방송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은 그가 용감한 데다, 미국인들이 그것을 볼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는 것을 보여준다”라면서 굳건한 지지를 보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