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 행진은 물론 시속 177km 홈런 치자 현지 시선 바뀌어…“겨우내 장신 투수 맞춤형 훈련”
이정후는 지난해 12월 샌프란시스코와 6년 총액 1억 1300만 달러(약 1500억 원)의 대형 계약을 맺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4년을 뛴 뒤 자유계약선수(FA) 조건을 행사할 경우 새로운 팀을 찾을 수 있는 옵트아웃 조항이 포함됐다. 디애슬레틱은 “최악의 FA 선정 기준은 선수의 기량보다는 계약 조건”이라고 밝혔다.
반면에 최고의 FA 계약 부문에서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계약한 오타니 쇼헤이(10년 7억 달러)가 25표로 1위, 야마모토 요시노부(12년 3억 2500만 달러)가 17표로 2위에 올랐다.
이렇듯 KBO리그 출신의 이정후에 대한 현지 매체의 시선은 초반에 부정적인 기류가 대부분이었다. 이정후가 KBO리그 최우수선수(MVP) 출신이고, 뛰어난 수비력과 콘택트 능력을 갖췄다고 해도 검증되지 않은 한국 선수일 뿐이었다.
이정후에 대한 미국 현지의 시선이 바뀌기 시작한 계기는 시범경기 성적이다. 먼저 이정후는 3월 7일 현재 5경기에서 모두 안타를 때려내며 순조롭게 연착륙 중이다. 타율 0.462(13타수 6안타) 1홈런 3타점 1도루 OPS 1.302의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메이저리그(MLB) 분석가들은 이정후가 지난 1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원정 시범경기에서 처음으로 홈런을 생산해낸 내용에 집중했다.
MLB 수석 분석가 제이크 민츠는 미국 야후닷컴에 기고한 ‘시범경기 데이터에서 새롭게 발견한 것’을 나열하며 이정후의 애리조나전 홈런을 분석했다. 이정후는 당시 3회초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라인 넬슨의 시속 152.4km의 패스트볼을 받아쳐 우중간 담장을 넘기는 홈런을 기록했고, 이 홈런은 MLB 스탯캐스트(타구 추적 시스템)에서 시속 177km로 127.4m를 날아갔다고 적었다. 발사 각도는 18도로 낮은 편이었다. 당시 이정후는 현장 인터뷰에서 홈런이 나온 상황을 “라인드라이브성 타구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쭉 뻗어나갔다”고 설명한 바 있다. 덧붙여 제이크 민츠는 “샌프란시스코와 6년 1억 1300만 달러에 계약한 이정후가 올해 MLB의 가장 매력적인 수수께끼 상자 중 하나”라고 소개했다.
MLB닷컴도 이정후의 시범경기 활약을 높이 평가했다. MLB닷컴은 지난 6일 최근까지 진행된 시범경기를 통해 크게 발전하고 있는 선수들을 조명했는데 여기에 이정후가 포함됐다. 이 매체는 이정후가 KBO리그 최우수선수로 선정된 2022년의 타격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정후의 스윙은 2루타를 치는 데 적합하지만 (애리조나전 첫 홈런처럼) 177km/h의 타구 속도로 공을 야구장 밖으로 날려버릴 수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정후는 MLB 진출을 앞두고 한국에서 개인 훈련을 통해 다양한 준비를 했다. 그중 하나가 피칭 머신의 릴리스 포인트(손에서 공을 놓는 높이)를 조정해 집중 타격 훈련을 한 점이다. 이 훈련은 김하성의 한국 훈련지인 서울 강남의 한 베이스볼 아카데미에서 이뤄졌다. 이정후는 “(김)하성이 형 소개로 그 훈련장을 알게 됐는데 그곳에 릴리스 포인트를 조정할 수 있는 피칭 머신이 있었다”며 “MLB 투수들이 구속도 빠르고 키가 크면서 릴리스 포인트가 높아 그에 대비해 한국에서 그 피칭 머신으로 훈련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정후가 MLB 진출을 앞두고 가장 많이 지적받은 게 빠른 공 적응 여부였다. 이정후가 KBO리그에서 뛰던 지난 7시즌 동안 타율왕도 두 차례(2021년, 2022년)나 차지할 정도로 콘택트 능력은 인정받았지만 빠른 공 대처 능력은 물음표로 남았다. 그런 시선을 잘 알고 있는 이정후는 겨우내 한국에서 미리 장신 투수의 빠른 공에 적응하려고 개인 훈련을 소화한 것이다.
이정후는 거포 유형의 타자가 아니다. 그는 “중장거리 타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공을 중심에 맞히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공이 중심에 맞으면 멀리 가는 걸 알고 있는데 95마일(153km/h) 정도의 빠른 공에 대응하다 보니 타구가 라인드라이브성으로 더 멀리 뻗어 나간다”고 설명했다.
그래서인지 3월 7일 현재 이정후는 시범경기 5경기에서 13타수 6안타(1홈런)를 기록 중인데 장타율이 0.769다. 이정후의 KBO리그 7시즌 통산 장타율은 0.491였다. 흥미로운 건 이정후가 시범경기에서 때린 안타 6개가 모두 2스트라이크 이후의 상황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이정후는 이와 관련해 “삼진당하기 싫어서 무조건 공을 맞히려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정후에게 고민이 없는 건 아니다. 이정후는 5일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원정 시범경기에서 4회 무사 1, 3루에서 우완 라이언 펠트너의 2구째 몸쪽에 들어온 86.7마일(139.5km/h)의 체인지업에 헛스윙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공으로 바깥쪽 높게 들어온 87마일(140.0km/h)의 체인지업을 밀어 쳐 좌측 펜스로 향하는 라인드라이브 타구로 1타점 적시타를 만들어 냈다. 경기 후 이정후는 취재진과 인터뷰에서 이날 자신의 안타와 관련해 2구째 체인지업에 헛스윙한 것을 언급했다.
“여기 와서 체인지업에 헛스윙을 많이 하고 있는 것 같다. 미국 투수들의 체인지업은 한국 투수들과 다르다. 체인지업 스피드가 조금 더 빠르다. 87~88마일(140.0~141.6km/h) 정도 되는 체인지업에 헛스윙을 하고 있는데 그 정도 스피드의 체인지업을 가진 한국 투수를 본 적이 없었다.”
즉 자신이 KBO리그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체인지업에 헛스윙이 나온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MLB 시범경기에서 이정후는 삼진을 1개밖에 당하지 않았다. 시범경기 첫 경기였던 2월 28일 시애틀 매리너스전 4회 우완 카를로스 바르가스에게 당한 헛스윙 삼진이 유일하다.
대부분 KBO리그 투수들은 140km/h 중후반대의 직구를 던진다. 체인지업은 그보다 20km/h 정도 떨어진 구속에서 형성된다. 한국 투수들의 직구와 MLB 투수들의 체인지업 구속이 엇비슷하다 보니 이정후로선 생소한 경험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는 이정후가 아니다. 5일 콜로라도전에서 안타가 나온 상황에 대해 이정후는 이런 설명을 덧붙였다.
“체인지업에 한 번 헛스윙하면 ‘아, 이렇게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체인지업이 왔을 때 안타를 친 것 같다.”
콜로라도전에서 상대 투수 펠트너는 2구 체인지업에 헛스윙이 나온 걸 보고 3구째 바깥쪽 87마일(140km/h)의 체인지업을 던졌는데 이정후는 특유의 타격감으로 밀어 치는 스윙을 만들어 안타를 생산했다. 미국식 체인지업에 빠르게 적응해가는 이정후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이정후는 경기 후 클럽하우스에서 취재진을 만날 때마다 비교적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편이다. 지난 4일 경기 후에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정후는 클리블랜드 가디언스와의 원정 시범경기에 출전해 2타수 1안타 1득점 1타점 1볼넷 1도루로 멀티 출루 활약을 펼쳤다. 그런 그에게 같은 시각 샌디에이고의 김하성이 시애틀 매리너스전에서 시범경기 첫 홈런을 터트렸다는 내용을 전하자 이정후는 “진짜요? 와 역시!”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서로 좋은 기운이 왔다갔다 한 것 같다. 어제 (하성) 형이 (집에서) 김치찌개를 해주고, 고기도 구워줬는데 동생들 위해 좋은 일을 해서 (오늘) 홈런을 친 것 같다. 나도 형이 해준 음식을 맛있게 먹고 오늘 열심히 해서 안타 치고, 타점 올렸으니 서로 상부상조한 것 같다.”
이정후는 김하성을 자신의 은인이라고 표현했다.
“하성이 형은 내게 최고의 선배다. 한국에서부터 지금까지도 그렇지만 형을 보고 많이 배웠다. 형이 좋은 말을 해줬고, 먼저 길을 닦아 놓았기 때문에 내가 좋은 대우를 받고 메이저리그에 올 수 있었다. 내게 형은 정말 설명이 필요 없는 은인 같은 존재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 내가 제일 존경하는 형이다.”
이정후와 김하성의 소속팀 샌프란시스코와 샌디에이고는 내셔널리그 서부지구에 속해 있어 상대 팀으로 만나는 횟수가 적지 않다. 시범경기에서도 맞붙는다. 3월 9일 샌프란시스코가 샌디에이고 스프링캠프지인 피오리아 스포츠콤플렉스에서 원정 경기를 갖는데 이정후는 8일 경기 전 만난 취재진에 샌디에이고 원정 경기에 나선다고 말했다. 김하성, 고우석의 출전 가능성도 높다. 김하성이 수비 훈련 도중 등 뭉침 증세로 인해 7일 신시내티 레즈전에 결장했는데 8일 휴식을 취한 터라 9일 선발 출전할 확률이 높다.
고우석은 7일 경기 후 인터뷰에서 9일 샌프란시스코와의 홈 경기에 출전할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날 선발 투수는 다르빗슈 유인데 샌디에이고는 다르빗슈에 이어 등판할 불펜 투수로 고우석, 톰 코스그로브, 엥헬 데 로스 산토스, 로베르트 수아레스, 스티븐 코렉까지 총 5명을 예고했다. 고우석이 몇 회 나오느냐에 따라 이정후와 만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고우석은 이정후와 맞대결에 대해 “재미있을 것 같다”고 답했다.
MLB 시범경기를 통해 코리언 메이저리거 3명이 한 경기에서 모두 만난다면 팬들에게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할 듯하다.
미국 애리조나=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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