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반전 반복된 축구 인생 “은퇴 선언하니 J리그 오퍼왔다…축구계 후배 돕는 일 계획”
주인공은 지난 시즌 천안 시티 FC에서 활약한 임민혁이다. 그는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프로와 아마추어로서 총 18년 동안 이어온 축구 선수의 삶을 폐막하려 한다"며 선수생활의 마무리를 발표했다.
임민혁의 마지막 소속팀은 천안이다. 천안은 지난 시즌 K리그2 최하위를 기록한 약체였다. 그는 천안에서도 부상에 시달리며 6경기 출장에 그쳤다.
2017시즌 전남 드래곤즈에 입단하며 프로 무대를 밟은 그는 대전, 천안 등을 거쳤다. 그가 K리그에서 남긴 기록은 30경기 출장, 46실점, 무실점 경기 4회다. 특별할 것이 없는 기록이지만 그라운드를 떠나며 남긴 흔적만큼은 특별했다.
그는 "세상에는 간절히 원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안다"며 "포기하지 않고 끝내 쟁취하는 것도 훌륭한 일이지만 훌륭함만이 삶의 정답은 아니기에 한 치의 미련 없이 떠난다"는 말을 남겼다. 이외에도 자신은 정정당당하게 땀 흘려 노력했기에 만족감을 느끼고 있고 열정 있고 성실한 후배들의 자리를 빼앗지 않아 후련하다는 마음을 전했다.
숱한 이슈가 쏟아지는 리그 개막 초반 일정임에도 임민혁의 소식에 많은 눈길이 쏠렸다. '나의 축구 인생은 완벽하지도, 위대하지도 않았다'는 스스로의 평가와 함께 담담하게 써내려간 그의 '은퇴사'는 9000여 명이 넘는 이들이 '공감' 버튼을 누르게 만들었다.
세간에 화제를 모은 은퇴 발표 이후 약 열흘이 지나 그를 만났다. 그는 "이렇게까지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실 줄은 몰랐다"며 '화제의 인물'이 된 소감을 전했다. 약 500자 남짓의 은퇴사에 대해서는 "평생을 해온 축구다. 마무리를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생각도 많이 하고 나름 퇴고도 하면서 썼는데 이렇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 누구보다 특별했던 은퇴선언 이후, 뜻밖의 해외진출 기회가 찾아오기도 했다.
"글을 쓰고나서 며칠 뒤에 일본 J리그에서 오퍼가 왔다. J리그1의 콘사도레 삿포로 팀이었다. 골키퍼들이 줄줄이 부상을 당해 선수가 급하게 필요하다고 하더라. 선수 등록 마감 몇 시간을 남겨놓고 연락이 왔다. 고민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고 마음의 문이 닫힌 상태라 정중하게 거절했다."
선수로서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은 마음도 거절의 이유에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는 "몸상태를 스스로 가장 잘 알지 않나.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온 제안도 아니었다. 은퇴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했는데 번복한다는 게 소신에 맞지도 않는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숱한 프로 선수들이 그렇듯 임민혁 또한 학창 시절에는 두각을 드러내던 선수였다. 고향 영덕 지역에서 축구를 시작한 그는 전국 명문 포철공고에 진학했다. 그는 "학창 시절에는 잘했던 것 같다"며 웃었다.
포지션은 축구를 시작하던 시기부터 골키퍼였다. 초등학생 시절인 2002 한일 월드컵을 보며 당시 이운재의 활약이 뇌리에 남았다. 골을 넣기보다 막는 것에 희열을 느낀 '어린이 임민혁'이었다.
고교 무대에서 각종 대회 우승에 힘을 보탰으나 불운이 이어졌다. 고교 졸업 직후 포항 스틸러스 입단을 추진했으나 무산됐다. 구단과 구체적인 이야기가 오갔으나 결국 입단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 대학(동아대)으로 진학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학교생활이 시작되기도 전에 대학 축구부가 해체됐다. 임민혁은 "연속적으로 좌절을 겪으며 정신적으로 무너졌다. 스무 살 나이에 축구를 그만둘 고민까지도 했다. 하지만 이후 반전이 있었다"고 말했다.
뛸 곳이 사라진 그는 당시 내셔널리그의 현대미포조선에서 뛸 수 있게 됐다. 실업리그 우승을 도맡아 하던 강팀이었다.
"테스트에 응시해 합격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스무 살이라 겁 없이 덤볐던 것 같다. 그 때 조민국 감독님을 만났다. 조 감독님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내 축구인생이 나뉜다고 생각한다."
미포조선에서 1년간 뛴 그는 또래보다 1년 늦게 고려대로 진학했다. 그는 "저는 미포조선에서 뛰고 싶었다. 스무 살에게는 적지 않은 월급과 수당이었다(웃음). 감독님도 그러셨고 주변에서도 모두 학교로 가는 것을 권유했다"며 "지금이었다면 선수 생활을 이어갔겠지만 그땐 대학에 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환경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직업 선수로 생활하다 다시 학생 선수로 돌아간 것에 대해 "양면성이 있다"고 말한다. "축구선수로 성장하려면 미포조선에 남는 것이 맞았다고 생각한다. 내셔널리그 수준이 대학무대에 비해 더 높았다. 기량면에서 경각심을 가지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면서 "다만 학교생활을 하면서 인간으로서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축구선수만으로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지 않나"라고 했다.
대학무대 강팀 고려대에서도 주전 골키퍼 자리를 지켰다. 3학년 이후 2017시즌에는 전남에 입단하며 꿈에 그리던 프로 선수로서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었다.
어렵게 맞이한 프로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그는 "경기에 출전하면 실수로 실점하는 장면이 나왔다. 눈에 띄는 큰 실수는 아니었지만 분명 내 실수였다"며 "많은 기회를 잡지 못했고 2018년에는 임대로 대전에 다녀왔다. 2019년은 1군 경기 출장 없이 군대에 갔다"고 말했다.
군복무는 또 한 번의 은퇴 위기였다. 그는 상무나 대체복무가 아닌 현역병으로 복무했다. 다행인 점은 상근 예비역이었기에 퇴근 후에는 개인 운동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임민혁은 "이 때 축구를 마무리하려 했다"면서도 "그래도 아쉬움이 남더라. 더 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어서 전남으로 돌아가게 됐다"고 했다.
결국 선수생활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게 된 시간은 천안에서의 1년이었다. 그는 "잘해보려 했는데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부상이 있었다. 회의감도 들고 실망감도 쌓이면서 마음을 스스로 정리하게 됐다"고 밝혔다.
특별했던 은퇴 선언 이후, 그는 오로지 후련한 마음만을 느꼈다고 한다. "많이들 '짠하게' 생각하시더라. 그 글을 읽고 울었다는 연락도 많이 받았다"면서도 "딱 한번 나도 뭉클한 마음이 들었다. 아버지께서 장문의 메시지를 주셨다. 실망하실 줄 알았는데 '수고했다, 잘했다' 격려해 주시고 '사랑한다'고 하시더라. 나도 처음으로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썼다"고 했다.
선수로선 마무리를 맺었지만 임민혁은 앞으로도 축구계에서 일하고 싶은 뜻을 전했다. 일단 그는 학업을 마치기 위해 오는 가을부터 학교로 돌아간다.
"축구계에 위대한 선수도 있지만 나 같은 선수가 훨씬 많다. 1년에 300명 정도가 소리 소문 없이 프로에서 사라진다. 그 사람들이 노력을 안하거나 열심히 안하는 것은 아니다. 운이 없거나 환경이 따르지 못한 선수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있다. 나는 선수 생활 중 실패를 반복하다보니 내가 좋아하는 축구를 싫어하게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축구를 싫어하는 감정으로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후배들은 그런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제도를 정비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다."
그는 자신의 은퇴에 관심을 가져 준 축구팬들에게도 감사 인사를 남겼다.
"너무 감사합니다. 저는 축구에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거든요, 마음의 빚이 있기 때문에 항상 갚겠다는 생각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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