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지구의 끔찍한 미래를 예고했다는 데 있다. 따라서 인류의 암울한 미래를 그렸다는 점에서 이 영화들은 유토피아보다는 디스토피아에 가깝다. 그렇다면 킬러 로봇, 운석 충돌, 바이러스 감염, 기후 재앙 등 영화 속의 이런 시나리오들은 과연 얼마나 현실성이 있을까. 혹시 지나치게 과장된 망상은 아닐까. 실제 이런 종말론 시나리오들 가운데 일부는 좀 억지스러워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 가운데는 분명 충분히 현실에서 벌어질 가능성이 높은 영화들도 있다. 예를 들어 ‘아마겟돈’에서처럼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해 멸망할 가능성은 낮지만, ‘12몽키즈’에서처럼 바이러스 테러가 발생하면 매우 위험해질 수 있다. 전문가들이 꼽은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은 SF(공상과학) 영화 속 시나리오들은 무엇일까.
#소행성 충돌
때가 때인지라 1990년대 말에는 세기말의 공포를 다룬 영화들이 다수 개봉됐다. 이 가운데 1998년에 개봉된 ‘아마겟돈’과 ‘딥임팩트’는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한다는 가상의 시나리오를 다룬 영화로, 모두 공포에 가까운 지구의 미래를 그렸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영화처럼 만약 인류를 전멸시킬 만큼 커다란 운석이 지구와 충돌한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니, 그런 일이 실제 벌어지긴 할까.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이런 상상은 상당히 억지스럽다”라고 못 박는다. ‘유럽우주국(ESA)’의 행성방위부 사무소장인 리처드 모이슬은 ‘메일온라인’을 통해 “영화 ‘딥임팩트’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장면들은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얼마나 위험한지는 운석 크기에 따라 많이 다르다”라고 말하면서 “지구는 끊임없이 작은 운석들과 충돌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너무나 작아서 대기권에서 그대로 연소되기 때문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지구에 피해를 줄 만큼 커다란 운석은 어떨까. 이 역시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 정도로 큰 운석은 매우 드물게 발생하는 데다 실제로 지구와 충돌할 위험도 거의 없다. 이유는 충돌하기 훨씬 전에 미리 포착할 수 있고, 그만큼 준비하고 대응할 시간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가령 영화 ‘아마겟돈’에서는 운석 충돌까지 남은 시간이 단 18일만 있다고 가정했지만, 실제로는 100년까지 준비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미항공우주국(NASA)과 함께 방대한 양의 ‘지구근접천체’를 수시로 추적하고 있는 ESA는 지구 궤도를 가로지를 확률이 1% 이상인 천체의 ‘위험 목록’을 주기적으로 발표한다. 이 목록에 따르면, 3만 4500개의 지구근접천체 가운데 1600개만이 지구와 충돌할 가능성이 있고, 대부분은 너무 작아서 거의 눈에 띄지도 않는다. 이와 관련, 모이슬은 “지름이 1km이거나 그보다 큰 행성과 충돌할 위험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으며, 이 가운데 그 어느 것도 향후 100년 안에 지구와 충돌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궁극적으로 이 영화들이 가장 잘못 이해한 점은 실제로는 운석의 크기와 위험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운석이 크다고 꼭 더 위험한 건 아니다. 모이슬은 오히려 작은 운석일수록 더 위험하다고 말한다. 그는 “크기가 작을수록 개수도 더 많아지고 태양빛에 덜 반사되기 때문에 관측하기가 더 어렵다. 진짜 위험은 할리우드식의 파괴가 아니다. 그보다는 지구에 충돌할 만큼 충분히 크지만 제때 감지하기에는 너무 작은 소행성이다”라고 경고했다.
#팬데믹(대유행)
‘컨테이젼’ ‘아웃브레이크’ ‘12몽키즈’ 같은 영화들은 처음 개봉됐을 때만 해도 SF 영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 보였다. 대부분 실제 그런 재앙이 벌어지리라곤 믿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지난 몇 년간 이 재난 영화들은 지극히 현실로 다가왔다. 다만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을 통해서 경험했듯 어쩌면 팬데믹이 반드시 세상의 끝을 의미하는 건 아닐 수도 있다. 사실 흑사병부터 스페인 독감까지 인류는 이미 여러 차례 전염병에서 살아남았고, 때문에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어떤 바이러스도 지구 종말로 이어진다고 믿지는 않는다.
이와 관련, ‘생존위협연구센터’의 코로나 바이러스 전문가인 조켐 리트벨드는 “팬데믹은 인류에게 존재론적 위험보다는 재앙적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자연발생적인 바이러스로 전염병이 돌아서 인류가 멸망한다는 ‘컨테이젼’이나 ‘아웃브레이크’는 다소 현실적이지 않다는 의미다. 그러면서 리트벨드는 “차라리 인간이 만든 바이러스가 실험실 외부로 유출돼 재앙이 닥친다는 ‘12몽키즈’가 더 현실적”이라고 덧붙였다. 네덜란드 ‘생존위험관측소’의 설립자인 오토 바르텐 역시 “자연발생적 전염병이 인류의 멸종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극히 낮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전염병은 그렇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동의했다.
오늘날에는 AI(인공지능)의 발달로 이런 위험이 더욱 높아졌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AI를 이용한 새로운 생물학 무기 개발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가령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의약품 개발을 위해 설계된 한 AI는 새로운 생물학 무기를 개발하는 용도로 쉽게 변경될 수 있다. 이 AI는 단 6시간 만에 기존의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4만 개 이상의 새로운 독성 분자를 발견했다.
이처럼 AI가 생물학 무기에 대한 ‘진입 장벽’을 낮추게 되면 심각한 위험이 초래되는 건 당연하다. 가령 인간이 만든 페스트균이 외부로 유출될 경우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다. 이에 대해 바르텐은 “진짜 큰 위험은 실험실 유출이나 바이오 해커들에게서 비롯된 팬데믹일 수 있다”고 말하면서 “생명공학 기술의 지속적인 발전은 새로운 위험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각국 정부는 인간이 만든 전염병으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체계적으로 줄여나가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12몽키즈’나 ‘부산행’이 보여준 종말론이야말로 보다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AI의 반란
챗GPT와 같은 생성형 언어 모델이 비약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터미네이터’나 ‘매트릭스’ 같은 영화가 현실로 다가왔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AI가 인류를 지배한다는 설정은 사실 황당할 수 있지만, 전문가들은 이 영화들의 몇 가지 세부 사항들은 소름 끼칠 정도로 사실적이라고 말한다.
‘생존위협연구센터’에서 AI의 위험성을 연구하는 하이든 벨필드는 “터미네이터가 시간을 거슬러 와서 우리를 공격한다는 설정은 사실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터미네이터’ 시리즈 속 진짜 악당은 ‘스카이넷’이다. 이 자율적인 AI는 전원이 꺼질까봐 걱정된 나머지 (핵)무기 발사를 결정한다. 그런 면에서는 실제로 오늘날 더 위협적인 존재다”라고 주장했다. 극중 ‘스카이넷’은 인간이 만든 컴퓨터 전략 방어 네트워크로, 스스로 지능을 갖추게 되는 무시무시한 AI다.
벨필드는 “만약 AI가 스스로 코드를 작성하고 해킹하는 데 능숙해진다면, 그리고 전원 차단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이 시스템 가운데 일부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다만 ‘매트릭스’와 같은 영화가 상상하는 것처럼 AI가 지각력을 갖게 되거나 인간을 증오하게 되는 설정은 과한 면이 있다. 그보다는 AI가 인간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되는 경우는 충분히 가능하다. 벨필드는 이를 원자력, 전기, 철강, 반도체 등 산업용 제어시스템에 침투해 오동작을 유발해 엄청난 피해를 입힌 ‘스턱스넷’ 컴퓨터 바이러스와 비교했다. 벨필드는 “AI가 악의적이 되기보다는 우리가 이에 대한 적절한 가드레일을 설치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더 우려스럽다”라고 했다.
또 한 가지 걱정스러운 점은 언젠가 핵무기 시스템 통제에 AI를 사용하게 되는 경우다. 바르텐은 “AI는 엄청난 능력으로 단순히 인간이 프로그래밍한 목표를 수행하려고 한다”라면서 “만약 인간이 AI가 어떤 목표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장애물이 된다면 AI는 이러한 위협이나 장애물을 제거하려고 할 것이고, 이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라고 우려했다.
‘터미네이터’ 영화에서 또 한 가지 틀린 점은 인류에게 너무 많은 전투 기회를 부여했다는 설정이다. 사실은 그렇게 장기간에 걸쳐 전투를 벌일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의미다. 바르텐은 “일반적으로 영화에는 서사가 필요하다. 선과 악의 싸움 말이다. 이때 인간은 적어도 한쪽 편에 서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현실에서 만약 AI가 세상을 지배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저항할 새도 없이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를테면 중세시대 군대가 현대식 군대와 맞서 싸우는 전쟁처럼 말이다. 이처럼 극단적인 힘의 불균형이 생긴다면 장기전이 아니라 한쪽이 단기간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핵전쟁
미국 중부 캔자스시티를 배경으로 한 핵전쟁 영화인 ‘그날 이후’부터 매우 현실적인 ‘스레드’까지 지금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영화들이 핵전쟁이 발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예측했다. 특히 1980년대 냉전 시기에 핵전쟁 영화는 ‘워게임’과 같은 할리우드 히트작들을 필두로 르네상스 시대를 구가했다.
고전적인 SF 스릴러인 ‘워게임’은 무료함을 느낀 한 해커가 우연히 미국의 핵 통제 시스템에 침입해 인류를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는다는 이야기다. 개봉 당시 너무나도 현실적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심지어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영화를 본 후 행정부의 사이버 보안 접근 방식을 전면 개편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워게임’이 정말 현실적으로 느껴졌던 이유는 이 영화가 핵전쟁에 관한 가장 소름끼치는 요소들 가운데 하나를 잘 포착했다는 데 있었다. 요컨대 핵으로 인한 파멸이 얼마나 빨리 일어날 수 있는지였다. 냉전시대에는 미국과 소련 모두 위협을 감지한 후 자국의 미사일을 발사할 때까지 약 12분의 시간이 있다고 주장했었다.
또 한 가지 우려스러운 점은 ‘워게임’에서와 마찬가지로 핵무기 발사가 컴퓨터 오류로 발생할 경우다. 이는 점점 더 많은 국가들이 AI를 이용해 무기 시스템을 자동화하는 추세에 있다는 점에서 더욱 공포로 다가온다. 따라서 진짜 위험은 어느 나라든 공개적으로 핵전쟁을 시도한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기도 전에 작은 오류가 발생해 통제불능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데 있다.
많은 핵전쟁 영화들이 올바르게 다루고 있는 또 다른 사실은 핵전쟁이 정말로 세상의 종말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벨필드는 핵전쟁이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 과학적으로는 아직 ‘열린 문제’라고 말하면서도 종말론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건 사실이라고 했다. 그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아마 모든 도시들이 폭파될 테고, 방사능에 피폭되겠지만 그게 전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면서 “그러나 당시 칼 세이건 교수와 일련의 과학자들이 주장했듯이 진짜 문제는 ‘핵 겨울’”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핵전쟁이 발발하면 대화재가 발생하고, 이로 인해 대량의 재와 먼지가 지구 상층을 뒤덮어서 햇빛을 흡수하게 되고, 이 때문에 지면에 도달하는 일사량이 줄어 기온이 크게 내려간다는 이론이다. 벨필드는 “핵폭발 모형으로 실험을 한 결과 전망은 암울하다.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높다. 북반구의 농작물 수확량은 90~95% 정도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로써 전세계에서 약 20억~50억 명이, 그리고 영국과 미국 인구의 95%가 기아로 사망할 수 있다”라고 전망했다.
#기후 변화
‘워터월드’ ‘투모로우’ ‘설국열차’ 등 지금까지 기후 재앙을 다룬 영화들은 많았다. 하지만 다행인 점은 전문가들이 이 영화들 가운데 어느 것도 딱히 현실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2004년작 ‘투모로우’에서는 급격한 지구 온난화가 북대서양 해류에 교란을 일으켜 극지방의 빙하가 녹아내리고, 이로 인해 지구 전체가 빙하로 뒤덮인다는 지구 종말을 묘사했다.
하지만 바르텐은 ‘투모로우’에 묘사된 시나리오가 기후과학자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기후위기가 발생할 확률은 100%다. 실제 우리 주변에서도 이런 징후들을 엿볼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러나 기후 변화가 인류의 멸종이나 디스토피아, 또는 사회적 붕괴로 이어질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약 0.1% 정도)”라고 예상했다. 이는 기후 변화가 인류를 거의 전멸시킬 수 있다고 상상하는 ‘설국열차’와 같은 영화들이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의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류가 기후 재앙에서 완전히 안전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벨필드는 “기후 변화는 긴장을 악화시키고, 어쩌면 다른 위험 요소들을 증가시킬 수 있지만 그 자체로는 파괴적인 요인이 아니다”라면서 “기후 변화는 그 자체로 실존적 위협이라기보다는 ‘존재적 위험의 주요 원인’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라고 설명했다. 가령 세계적으로 농작물을 재배하는 게 점점 어려워지고, 심지어 밖에서 거주하는 것조차 어려운 곳들이 생겨나면서 이주민 발생, 질병 발생, 심지어 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벨필드는 기후 변화를 ‘실내 온도가 올라가는 것’에 비유했다. 즉, 모두가 죽을 정도로 뜨거워질 가능성은 낮지만 싸움이 벌어질 가능성은 훨씬 높아진다는 의미다.
#전문가들이 꼽은 가장 현실적인 지구 종말 영화
1. '12몽키즈'
실험실 밖으로 유출된 생물학 무기는 인류 멸망의 진짜 위협이 될 수 있다.
2. '터미네이터'
‘스카이넷’과 같은 인공지능은 예측할 수 없다. 인류를 파멸시키거나 노예로 삼아 자신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
3. '스레드'
핵전쟁의 위협은 현실이며, 인류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다.
#전문가들이 꼽은 가장 비현실적인 지구 종말 영화
1. '딥임팩트'
적어도 앞으로 100년 동안은 지구를 파괴할 만큼 큰 소행성과 충돌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2. '투모로우'
기후변화는 인류를 직접적으로 파괴한다기보다는 다른 실존적 위험을 증가시킬 가능성이 높다.
3. '아웃브레이크'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팬데믹은 파괴적일 수 있지만, 인류를 완전히 멸망시킬 가능성은 낮다.
#영화 속 AI가 인류를 파괴하는 방법
1. AI의 반란
인간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AI를 설계할 수 있다. 이 경우 AI가 되레 인류를 지배하는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다.
2. 생물학 무기
AI로 생물학 무기와 독성 화합물의 개발이 가속화될 수 있다. 만약 치명적인 페스트균이 테러리스트들의 손에 들어갈 경우 비극을 맞이할 수 있다.
3. 핵전쟁
핵무기에 대한 군사적 의사결정이 AI로 대체될 수 있다. 이 경우 손써볼 겨를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전 세계가 파괴될 수 있다.
4. 점진적 교체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 천천히 AI에게 제어권이 넘어갈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인간은 본인이 만든 창조물에 의해 조용히 사라질 수 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