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희 기자회견. 사진공동취재단 |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그녀의 어머니가 말을 받아주었다. 그 탤런트와의 대화는 그다지 부드럽게 진행되지 못했다. 김현희와 여자 탤런트는 호텔 밖으로 나와 야외에서 사진촬영을 한 후 헤어졌다.
일본의 하야시 마리코라는 여성 작가와의 인터뷰가 잡혔다. 김현희나 우리나 늘 만나던 기자나 수사관들 외에 일반인들을 만날 때면 부담도 적고 흥미도 있었기 때문에 다른 때보다는 인터뷰가 부담스럽지 않았다.
하야시 마리코는 일본대학 예술학부 문예학과를 졸업하고 카피라이터를 거쳐 작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제94회 나오키상, 제8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제32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일본에서 널리 알려진 작가였다. 작품으로는 <첫날밤> <불유쾌한 과일> <거침없는 여자가 아름답다> 등이 있다.
초겨울 아침 우리는 안가로 이용하고 있는 서울 시내 모 호텔에서 만났다.
검정 투피스에 검정 스타킹을 신은 그녀는 일본 여성치고는 덩치도 좋고 개방적이었다. 자유분방한 소설을 많이 쓰는 여성 작가라는 말을 들어서 그런지 성격도 활달해 보였다. 그녀는 인터뷰에 앞서 선물을 가져왔다며 김현희에게 주면서 펴보라고 하였다. 김현희는 인터뷰를 할 때마다 특히 일본에서 온 사람들과 인터뷰를 할 때면 늘 많은 선물을 받아왔기 때문에 그 날도 고맙다고 하면서 옆에 가만히 놓아두었다.
“선물을 열어보세요.”
하야시 마리코가 웃으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김현희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데도 그녀가 자꾸 열어보라고 하여 김현희가 포장을 뜯자 일본 전통 떡이었다.
“맛이 어떤지 먹어 보세요.”
그러자 그 작가가 또 먹어보라고 권했다.
“괜찮습니다.”
김현희는 조용하게 사양했다. 김현희는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음식을 잘 먹지 않았다. 혹시 자신의 먹는 모습에서 어떤 흉이라도 잡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을 것이고 인터뷰는 정중하게 격식을 갖춰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거절했던 것이다.
“아니 왜 자꾸 먹으면서 하자고 그래?”
인터뷰를 마치고 작가와 헤어지자 김현희는 얼굴을 찌푸리고 못마땅해 했다.
▲ 1989년 3월 21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일각의 KAL기 폭파 조작설 주장과 김현희 진술의 차이점을 비교분석한 기사. 최창아 씨는 조작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누가 어떻게 했는지 전혀 언급하지 못하고 수사내용이나 김현희 진술 오류의 꼬투리를 잡는 식이라고 지적했다. |
어느 날은 직업군인인 나의 오빠까지 조작설에 대해서 묻기까지 했다.
“어떻게 오빠까지 의심해?”
“신문이며 방송까지 온통 난리잖아? 게다가 성당에서 기도회까지 하고 있고.”
성당의 신부님들이 기도회를 하면서 KAL기 사건이 조작이라고 하는 데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에 나중에 통일이 되어서 북한에서 KAL기 납치를 계획하고 추진했던 사람들이 자백을 하게 되면 신부님들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이 하느님 앞에서 떳떳할 수 있을까 생각하자 가슴이 답답했다.
안기부(국가정보원)에서 이렇다 할 적극적인 해명도 없었다. 물론 안기부에서 김현희 사건 외에도 간첩 사건을 수사하고 나면 수사발표로 그만이지, 그 이후 가끔 있는 세간의 의혹에 대해 맞네 아니네 하면서 대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수사관이 지나간 사건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면 수사정보기관으로서 국민의 신뢰를 잃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하겠지만 조작설 때문에 답답했다. 내 개인적으로도 젊은 시절 국가 정보기관의 수사관으로 나름대로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고 임한 사건이었는데 조작설에 휘말리자 실망스러웠다.
사건 발생이 1987년이었고 나는 6년 정도 KAL기 사건의 주역인 김현희와 같이 지냈다. 안기부를 퇴직한 지 20년이 지났고 사건이 발생한 지 어느덧 25년 정도 된다. 내 나이도 어느덧 중년으로 들어섰는데 젊었을 때 자긍심을 갖고 근무했던 안기부 수사관으로서 조작설이 난무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조작설이 커지면서 나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몇몇 일본 방송국과 인터뷰를 했다.
“우리는 KAL기 사건이 북한의 공작에 의한 테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김현희가 테러리스트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궁금한 것은 KAL기 사건이 아니라 김현희와 함께 생활하는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런 것들을 물어볼 것입니다.”
일본 방송국은 그렇게 나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러나 인터뷰가 진행되면서 가끔 세간의 의혹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다. 잔잔히 인터뷰에 응하던 나도 그 대목에 이르면 저절로 목소리 톤이 올라가곤 했다.
그 무렵 나는 북한 공작원으로 활동하다 남한으로 귀순한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노동당 작전부 소속 대남공작원으로 활동하다가 93년도에 귀순하였는데 자기도 김현희(그때 이름은 몰랐지만)와 같은 공작원 양성소인 북한 인민군 695부대(김현희는 금성정치군사대학이라 부름) 출신으로 6년 후배라고 했다. 그는 KAL기 사건이 일어난 1987년도에 입학해 1993년까지 공작원 교육을 받았는데 KAL기 폭파가 북한의 여자 공작원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을 공작원들 사이에서는 다 아는 사실이라고 했다.
“우리는 KAL기 사건을 실패한 공작이라고 말합니다.”
“실패한 공작이라고요? KAL기를 폭파시키고 115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게 만들었는데 실패한 공작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뭐예요?”
“김현희가 체포되어 전향했기 때문입니다. 김현희에게 남한 실정을 제대로 알려주지 못해 전향을 하여 북한이 많은 비난을 받지 않았습니까? 득보다 실이 많은 사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실패한 공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북한은 자신들이 안했다고 부인하고 있잖아요?”
“당연히 부인하지요. 김현희가 전향하여 여러 가지 문제가 노출되자 그 이유 중 하나가 여자 공작원들에게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그때까지 교육받던 여자공작원을 모두 해산시켰습니다.”
▲ 김현희 항소심 첫공판. 연합뉴스 |
나는 그들이 누가 조작을 했는지 조작자를 제기하면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조작설로 내세우는 것은 의혹이다. 안기부가 수사한 내용이나 김현희가 진술한 내용 중에 오류가 있거나 착오가 발견되면 그 점을 지적하여 조작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KAL기 테러 사건은 간단한 살인사건이 아니다. 살인사건이라면 한두 사람만 입을 다물면 은폐될 수 있지만 KAL기 폭파사건은 여러 나라와 많은 사람들이 관계되어 있다. 김현희와 김승일을 체포한 바레인 경찰 당국, 일본인으로 위장한 여권 때문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조사한 일본과 미국 CIA를 비롯하여 많은 정보기관과 수사기관들이 이 사건을 수사했다. 그런데도 조작이라는 발표를 한 것을 본 일이 없다.
조작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의혹을 이야기한다. 안기부의 발표나 김현희의 진술에 오류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의혹을 주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의혹의 많은 부분이 해소됐고, 또 의혹이 곧 조작은 아니다. 의혹은 수사를 잘못했거나 진술을 잘못한 경우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김현희와 KAL기 폭파에 대해서 두서없이 이야기한 것은 나의 귀중한 청춘을 김현희와 함께 보냈기 때문이다. 더 잊히기 전에 내가 옆에서 지켜본 그녀에 대해 기록을 남기는 것도 역사라고 생각했다. 후대의 사람들이 평가할 때 이 기록이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 원고를 읽어 주신 독자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정리=이수광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