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수기’ 극장가 꿰뚫은 항일 코드·K-무속…국내외 MZ세대 사로 잡은 비결
3월 24일 배급사 쇼박스에 따르면 '파묘'는 개봉 32일째인 이날 오전 8시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2024년 첫 천만 영화에 등극했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기준 누적관객수는 1000만 1642명에 달한다.
'파묘'는 개봉 3일째 100만, 4일째 200만, 7일째 300만, 9일째 400만, 10일째 500만, 11일째 600만, 16일째 700만, 18일째 800만, 24일째 900만에 이어 32일째에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는 2023년 연말 실관람객의 뜨거운 입소문을 타고 천만을 돌파했던 '서울의 봄'보다 하루 빠른 속도이면서 쌍천만 영화인 '범죄도시3'와 타이 기록이다. 역대 32번째 천만 영화이면서 한국 영화로는 23번째 기록, 그리고 아직도 대중에겐 생소한 오컬트 호러 장르로는 최초의 천만 기록이기도 하다.
공식 기록을 세우기에 앞서 천만 돌파 기념 인터뷰를 가졌던 장재현 감독은 "시사 이후에 영화계 동료 감독이나 스태프들이 다들 '진짜 마니악하다'는 평을 해주면서도 '손익 분기 넘기자, 파이팅!'이라고 응원해줬다. 그런데 스태프를 따라온 일반 관객들은 '영화 러닝타임이 너무 짧다'며 재미있어 하더라"라며 "일반 대중이 그렇게 느꼈다는 데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지만 감히 천만 관객을 달성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며 공개 이전의 설렘과 긴장을 회상한 바 있다.
실제로 오컬트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오래도록 특정 마니아들에게만 인기있는 특수 장르로 꼽혀 왔다. 한국의 무속신앙을 서양의 엑소시즘과 결부시킨 신선함, 그리고 '사제복을 입은 강동원'이 강점이었던 장재현 감독의 첫 장편 영화 '검은 사제들'(2014)이 540만 관객을, 실관람객의 호평을 바탕으로 수차례 중복 관람이 이뤄졌던 나홍진 감독의 '곡성'(2016)이 68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상위권에 오르긴 했지만 이 두 작품을 제외하고 비슷한 장르의 작품 중에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끈 작품은 아쉽게도 없었다.
그런 만큼 '파묘'의 이번 천만 기록은 영화계 관계자들은 물론, 대중들에게도 놀라움을 선사한다. 극장가의 비수기로 꼽히는 2~3월에 개봉한, 대규모 블록버스터 영화나 대중적으로 고정적인 관람층을 선점하고 있는 대형 프랜차이즈 시리즈 작품이 아닌 '마이너 중에서도 마이너'가 일으킨 기가막힌 파란인 셈이다.
'파묘'는 거액의 돈을 받고 수상한 묘를 이장하게 된 풍수사 상덕(최민식 분)과 장의사 영근(유해진 분), 무당 화림(김고은 분), 봉길(이도현 분)에게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을 담은 오컬트 미스터리 영화다. 이미 앞서 '검은 사제들', '사바하'(2019)로 독창적인 오컬트 유니버스를 구축해 나가던 장재현 감독의 세 번째 오컬트 영화로 시놉시스가 알려지면서부터 이 유니버스를 사랑한 팬들의 많은 관심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더욱이 배우 최민식이 선택한 그의 배우 역사상 첫 오컬트 영화라는 점에서도 긍정적인 관심을 선점한 상태였다.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는 이른바 '묘벤저스(파묘+어벤저스)' 4인방 가운데 무당 화림과 봉길의 콘셉트가 오컬트 팬덤을 넘어서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큰 호기심을 자아내며 흥행 청신호의 이른 시작을 알렸다. 정갈한 한복 아래 컨버스 운동화를 신은 채 접신 상태로 신명나게 대살굿을 펼치는 화림과 온몸에 경문으로 문신을 새긴 전 야구선수 출신의 법사 봉길의 모습은 그야말로 'MZ 무속인' 캐릭터로 특히 1020세대들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하며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실제로 개봉 이후로도 1020 젊은 관객들은 "화림과 봉길의 이야기를 후속편이나 책으로라도 꼭 보고 싶다"며 '화림봉길 앓이'에 시달릴만큼 이들 캐릭터에 푹 빠진 모습을 보였다.
작품에 짙게 깔려있는 항일 코드도 흥행에 큰 몫을 해냈다. 마치 이야기의 '허리를 끊듯' 오컬트에서 크리처 물로의 갑작스러운 장르적 전환이 이뤄진 '파묘'의 후반부를 두고 상영 초 실관람객들의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기도 했지만, 이후 N차 관람(같은 작품을 여러 번 반복해서 보는 일)을 통해 장재현 감독이 작품에 심어둔 항일 관련 메타포와 이스터에그(제작자가 특정 뜻을 담고 장면에 숨겨놓는 메시지)가 알려지면서 호평이 불호평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대놓고 애국심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장재현 감독 특유의 변태적인(?) 디테일 설정을 통해 그려낸 이 코드에 관객들의 해석과 재해석이 더해지면서 이를 접하고 호기심을 가진 신규 관람객의 자연스러운 유입도 이끌어냈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파묘'의 인기에 대해 "앞서 나홍진 감독의 '곡성'에서도 그랬듯 우리나라 관객들은 이슈가 되거나 자신이 좋게 본 작품 안에 한 번만 관람해서는 잘 눈치챌 수 없는 코드가 있다면 몇 번이라도 재관람해서 그걸 직접 영화관 스크린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는 것 같다"며 "코로나19 시국부터 극장가가 얼어붙고 OTT가 세를 넓혀가면서 이런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었는데 이번 '파묘'가 그걸 다시 부활시킨 첫 작품이 아닐까 싶다"고 설명했다.
'파묘'의 인기는 국내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배급사 쇼박스에 따르면 인도네시아에서는 3월 21일 기준 200만 관객을 돌파해 현지 개봉 한국 영화 흥행 순위 1위에 오르며 '쿵푸팬더4'를 제치고 3일 연속 상영 스크린수 1위를 기록했다. 이전까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많은 관객수를 달성했던 한국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70만)이었다. 베트남에서도 한국 영화 역대 최고 오프닝 스코어를 기록했으며 대만에선 개봉 일주일 만에 2888만 대만 달러(약 12억 원)의 흥행 수익을 올렸다.
이와 함께 베를린 국제영화제, 홍콩 국제영화제, 우디네 극동영화제에 초청됐고 오는 4월 9일부터 21일까지 열리는 브뤼셀 판타스틱 영화제에는 경쟁 부문에 공식 초청된 상태다. 브뤼셀 판타스틱 영화제는 스페인의 시체스 영화제, 포르투갈의 판타스포르토와 함께 세계 3대 판타스틱 영화제로 꼽힌다. 앞서 봉준호 감독의 '괴물'(2006),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2016) 등이 대상에 해당하는 황금까마귀상을 수상한 바 있다.
한편, '파묘'의 최종 관객 수가 어느 정도까지 도달할 지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지난 2월 22일 개봉 후 31일 차인 3월 23일까지 줄곧 박스오피스 1위를 수성해 온 작품이라는 점에서 천만 돌파 이후에도 뒷심을 받고 남은 기간 동안의 흥행을 이어갈 것으로 예측된다. 여기에 오는 4월 24일에는 '쌍천만'을 기록한 배우 마동석의 대표 시리즈 신작 '범죄도시4'가 개봉하는 만큼, 극장가로 천만 관객의 발걸음을 이끌어낸 '파묘'의 뒷심을 이어 국내 영화의 또 다른 흥행 순풍도 기대해볼 만 하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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