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1일 중국 푸젠(福建)성 우이산시에서 열린 제15회 춘란배 세계바둑선수권전 본선 16강전에서 변상일 9단이 중국의 당이페이 9단에게 227수 만에 불계승을 거두고 8강에 안착했다. 함께 출전한 박정환 9단도 중국 리웨이칭 9단에게 고전했으나 303수까지 가는 접전 끝에 극적인 반집승으로 8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그러나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혔던 신진서 9단은 중국의 복병 양카이원 9단에게 일격을 당해 아쉬움을 남겼다.
변상일 9단은 13회 대회부터 세 번째 출전으로 이날 승리를 포함해 9승 1패를 기록하며 춘란배에 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기 챔피언 자격으로 16강전부터 모습을 드러낸 변상일은 중국 랭킹 7위의 까다로운 상대 당이페이 9단을 만났다. 당이페이와는 통산 상대전적에서 4승 3패로 앞서고 있지만, 직전 열렸던 한국바둑리그에서 패했던 터라 안심할 수 없었던 상황. 하지만 최근 춘란배에서 불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변상일을 당이페이가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변상일은 133수 무렵 우세를 잡은 후 단 한 번도 상대에게 역전을 허용치 않고 완벽하게 국면을 마무리했다.
이 대국을 지켜본 한 프로기사는 “변상일 9단은 신진서 9단과 함께 현재 우리나라 기사들 중 중국 톱클래스 기사들과 대등하게, 아니 그 이상으로 겨룰 수 있는 기사”라면서 “하지만 신진서 9단에게 최근 15연패를 당하면서 다소 주눅든 모습을 보였는데, 최근 바둑리그에서 신진서 9단을 꺾으면서 자신감을 되찾은 모습이 대국 내용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박정환 9단은 지난해 16강에서 반집패를 당했던 리웨이칭 9단을 다시 만나 지난해의 아픔을 고스란히 돌려줬다. 한때 1%까지 추락했던 승률을 막판에 뒤집었다. 303수까지 이어진 치열한 접전 끝에 집념의 반집승을 거두고 8강에 안착했다. 이 대국을 유튜브로 해설한 이현욱 9단은 “박정환 9단이 전성기를 넘긴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에서 난다 긴다 하더라도 박정환을 절대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유감없이 보여줬다”고 높이 평가했다. 12회 대회 우승자이기도 한 박정환 9단은 13회와 14회 대회에서 모두 16강에 탈락했지만, 3년 만에 8강에 오르며 대회 두 번째 우승에 도전하게 됐다.
하지만 함께 출전한 우승후보 영순위 신진서 9단은 중국의 복병 양카이원 9단에게 일격을 당해 조기 탈락했다. 흑을 든 신진서는 초반 수읽기 착각이 나오면서 50여 수부터 양카이원 9단에게 밀리기 시작했고, 역전의 기회를 노렸지만 실패하면서 140수 만에 때 이른 종국을 맞았다. 신진서는 농심배 우승 이후 중국갑조리그에서 샤천쿤 7단에게 일격을 당한 데 이어 다시 양카이원 9단에게 패하면서 큰 승부 이후 피로가 가시지 않은 듯한 모습을 보였다.
한편 신진서를 꺾은 양카이원은 승리 후 자신의 SNS를 통해 “꿈에서나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상대를 이겼다. 계속 힘을 내겠다”라고 말해 화제를 모았다. 이에 앞서 중국 네티즌들은 춘란배 16강전 대진추첨이 확정되자 양카이원이 승산이 없다고 보고 ‘명복을 빈다’며 위로를 전한 바 있다. 현지 언론들은 “양카이원이 팬들의 예상을 멋지게 비켜냈다”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최근 농심배 등에서 신진서에게 억눌렸던 감정을 양카이원이 약간이나마 해소시켜 준 것으로 풀이된다.
대국 후 열린 대진추첨 결과 박정환 9단은 구쯔하오 9단과 8강에서 만났고, 변상일 9단은 미위팅 9단과 4강행을 다툰다. 상대 전적은 박정환 9단이 9승 1무 5패, 변상일 9단이 12승 6패로 앞서있다. 8강전과 4강전은 12월 17일과 19일 열리며, 결승은 내년 개최될 예정이다.
제15회 춘란배 세계바둑선수권의 제한시간은 각자 2시간 25분에 1분 초읽기 5회, 덤 7집반이 주어지며 우승상금은 15만 달러(약 2억 원), 준우승 상금은 5만 달러(6700만 원)다.
[승부처 돋보기] 제15회 춘란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 본선 16강전
흑 신진서 9단(한국) 백 양카이원 9단(중국) 140수끝, 백 불계승
#1도(흑, 미지근하고 싱겁다?)
좌하 전투에서 흑의 착각이 있어 백이 유리한 국면. 여기서 신진서는 흑1로 먼저 중앙 흑의 틀을 갖추는 진행을 택했는데 이 수가 조금 미지근했다. 백2로 좌우 백이 손을 잡아서는 흑이 좀 싱겁지 않느냐 보였는데….
#2도(AI의 추천)
흑은 불리한 마당이므로 온건함보다는 난전을 꾀하는 편이 좋았다. 흑1이 AI의 추천. 이렇게 갈라놔야 국면이 어지러워지고 불리한 쪽에 찬스가 생기는 법이다. 백2면 흑3으로 버틴다. 중앙 백은 여전히 미생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3도(신공지능의 오류)
신진서에게도 복안은 있었다. 흑1~5가 강력하다. 이른바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겠다는 양육취골(讓肉取骨)의 수법. 백에게 내준 ‘거북등 빵때림’은 아프지만 흑11로 가운데 백을 잡았다는 게 신진서의 계산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터져 나온 백12의 붙임이 양카이원의 묘수로 신공지능의 오류를 유도했다.
#4도(흑, 무사할 수 없다)
백△에 신진서는 하염없는 장고에 들어간다. 가장 상식적인 흑1은 백2의 끊음이 기다린다. 흑3으로 끊어도 백4·6으로 비집고 나오면 좌우 흑돌 중 하나는 무사할 수 없을 것이다.
#5도(흑, 괴롭다)
무려 30분의 장고 끝에 신진서는 흑1의 호구로 대응했지만 백2에 이은 4의 먹여침이 양카이원이 준비한 좋은 수(축을 예방하고 있다). 결국 백12까지는 필연인데 백14까지 좌우 흑이 갈려져 괴로운 형태가 돼버렸다(7…4).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