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증원 갈등으로 전국의 전공의들이 집단 사직에 돌입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의료대란으로 번지기 전에 갈등을 봉합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지만 역설적이게도 전문가들은 지금이 의료개혁의 적기라고 말한다. ‘전공의 중심의 대형병원 인력구조’ ‘무너진 의료전달체계’ ‘PA 간호사 합법화’ 등 그동안 의료 현장에서 부조리로 지목되어 온 문제들이 이번 사태로 적나라하게 드러남과 동시에 일부는 해소의 실마리까지 보여준 까닭이다. 전공의 사직이 촉발한 의료개혁의 과제는 무엇이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짚어본다.[일요신문] 전공의 공백으로 대형병원 쏠림현상이 완화되고 있다. 대형병원이 응급·중증 환자만 선별해 받기로 하자 경증 환자들이 인근 중소병원을 찾으면서 의료전달체계가 정상화되는 역설적인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정부는 의료 공백으로 의료전달체계가 정상화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공의 집단사직 사태가 종료된 이후에도 지금과 같은 체계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환자들은 인재와 인프라가 집중된 병원을 찾아다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지역완결형 의료체계를 구축하지 않은 채 의대 정원만 늘리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공룡이 된 수도권 대형병원
환자가 중증도에 따라 동네 의원과 병원에서 종합병원으로, 그다음 상급종합병원으로 분산돼 진료받는 것을 의료전달체계라고 한다. 즉, 복통, 발열, 열상 등의 증상은 대학병원 응급실이 아닌 지역 내 병원이나 종합병원으로 가는 것이 정상적인 의료체계에 부합한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경증환자가 너무 쉽게 대형병원을 찾는다는 지적이 많았다. 복지부에 따르면 3월 7일 기준 응급실을 찾은 중등도(중증과 경증 사이) 이하 환자는 2월 1~7일 평균 대비 32.1% 줄었다. 거꾸로 말하면 그동안 증상이 심하지 않은 환자들이 중증 환자를 케어하는 병원을 방문했다는 뜻이다.
병상이 부족해서는 아니다. 한국은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많은 병상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다. ‘OECD 보건통계 2023’에 따르면 우리나라 인구 1000명당 병상 수는 12.8개로 전체 43개 국가 중 1위를 차지했다. OECD 평균(4.3개)과 비교해도 3배 이상 많았다. 2위는 12.6개인 일본, 3위는 7.9개인 불가리아였다.
그럼에도 이른바 ‘빅5’(서울대·세브란스·삼성서울·서울아산·서울성모병원)에는 병상이 늘 부족한 상태다. 이에 대해 한 상급종합병원 간호사는 “대형병원에만 환자가 넘쳐서”라고 답했다.
OECD 병상 수 1, 2위를 다투는 한국과 일본의 대형병원의 병상 수와 외래 환자 수를 비교해봤다. 2023년 서울아산병원의 하루 외래환자 수는 평균 1만 3260명인데 반해 도쿄대 의대 부속병원은 2022년 기준 하루 2681명밖에 되지 않았다.
수술 건수 격차는 더 심했다. 2022년 도쿄대 의대 부속병원의 수술 건수는 1만 1460건. 같은 기간 서울아산병원에서는 그보다 6배가 넘는 6만 9542건의 수술이 진행됐다. 이듬해인 2023년에는 7만 892건의 수술이 있었다. 서울아산병원의 병상 수(2764개)가 도쿄대 의대 부속병원(1157개)보다 두 배 넘게 많다는 것을 감안한다고 해도 높은 수치다.
병상 규모가 그나마 비슷한 서울대학교병원(1782개)도 마찬가지였다. 2023년 서울대병원에서 시행한 수술 건수는 약 3만 9143건으로 도쿄대 의대 부속병원의 3배를 넘었다.
#서울이 최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의료계는 낮은 수가 정책이 대형병원의 거대화 현상을 키웠다고 지적한다. 낮은 수가를 받는 대형병원이 이익을 내기 위해 박리다매식 경영으로 환자들을 끌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병원을 찾는 당사자인 환자들에게 수가는 고려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환자들이 대형병원에 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요신문은 상급종합병원 5곳에서 진료를 받은 경험이 있는 지방 거주 환자들을 만나 대형병원으로 상경하는 이유를 물었다.
60대 A 씨는 2023년 30대 자녀가 자궁암 0기에 해당하는 상피내암 진단을 받았다. A 씨는 자녀가 지역종합병원 의사의 소견서를 받아 오자마자 서울아산병원 예약을 잡았다. 진료까지 몇 달이 걸린다고 했지만 아산병원을 고집했다. 지방에 거주하면서도 굳이 빅5를 찾은 이유가 있냐는 질문에 A 씨는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부모니까 당연히 자식은 가장 좋은 곳에서 치료 받게 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며 “암처럼 큰 수술은 의사의 경험과 수술 장비가 다 한다는 말이 있다. 이미 환자들 커뮤니티 내에서 각 수술에 유명한 선생들도 정해져 있다. 그러니 다들 기차 타고 상경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역병원은 오진이 많거나 실력 있는 의사가 적을 것이라고 걱정을 하는 환자도 있었다. 30대 B 씨는 “할아버지가 지방의 한 국립대학교병원에 계셨는데 그 병원에선 수술이 어려워서 서울까지 오신 적이 있었다. 주변에서도 ‘작은 병원은 오진이 많으니 무조건 수도권 병원으로 가라’고 한다”고 말했다.
전공의 파업으로 서울세브란스병원에서의 수술이 연기된 40대 C 씨 역시 “조금 기다리더라도 안전한 곳에서 수술을 받고자 한다”고 말했다. 결국 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실력 좋은 의사’와 ‘좋은 인프라’였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모두를 갖춘 곳을 수도권의 대형병원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다만 지역병원에 오진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은 사실과 달랐다. 2017~2021년까지 한국소비자원에 접수된 ‘암 관련 피해구제 신청’ 조사 결과에 따르면 ‘상급종합병원’이 35.9%(47건)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했고, 다음으로는 ‘의원’ 28.2%(37건), ‘종합병원’ 23.7%(31건) 순으로 확인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의료계에선 단순히 의사 수만 늘리는 방법으로는 환자의 수도권 쏠림 현상을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 의사가 늘어나도 찾아오는 환자가 없으면 병원은 살아남지 못 한다는 것이다. 업계 종사자들은 지역완결형 의료체계가 구축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익명을 원한 지방 의대 출신의 전공의는 “결국 어느 병원을 갈지 선택하는 건 환자다. 지역의 거점 국립대병원도 수도권 대형병원만큼 믿을 수 있다는 신뢰가 생겨야 수도권으로 빠져나가는 환자를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의사도 그 지역에 남을 이유를 만들어줘야 한다. 현재로서는 지역 내 전공의도 수련병원이 부족해 수도권 병원으로 이탈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 상급종합병원 전직 봉직의 역시 “솔직히 지역의사제가 지역 의료를 활성화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라고 말했다. 지역의사제란 일정 기간 해당 지역 근무를 의무화하는 제도를 말한다. 일각에서는 의대 증원으로 늘어난 의사를 해당 지역에 일정 머물게 하는 지역의사제를 하나의 대안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지역의사제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동의했다. 그는 “아무런 제재 없이는 수련을 마친 전공의들이 대거 수도권으로 빠져나갈 가능성이 높다”면서도 “지역 의사가 배출된다고 해도 지역병원이 적절한 시설을 갖추지 못하면 환자들은 결국 서울로 떠날 것이다. 의사에겐 밥줄이지만 환자에겐 생명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라며 “의사 숫자를 늘리고 시장에만 맡겨둘 것이 아니라 환자들이 믿을 만한 지역의 공공의료 기관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